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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부여 扶餘의 세력 勢力
BC 57년.
황해 건너 동쪽,
한반도에는 또 다른 단군조선의 후예인 박혁거세가 남으로 내려와 한반도 동남쪽에 자리를 잡고, 토족 土族 세력인 육부 촌장 六府村長의 지지 支持를 얻어 왕위에 오른 후, 사로국을 건국하여 힘을 기르고 있었다.
BC 37년.
북부여에서 탈출한 주몽은 소서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졸본부여의 왕좌 王座에 앉게 되었다.
추모왕 주몽은 졸본부여를 고구려로 국호를 바꾼 후, 국시 國是를 다물 多勿로 정하고, 그 기치를 내걸고 주위 부족들을 통합시키며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시키고 있었으며,
BC 18년.
고구려 주몽의 셋째 아들 온조가 동이족 최고 여걸 女傑로 알려진, 어머니 소서노의 도움으로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 國號를 십제 十濟라 칭함.
기원 25년.
신나라가 멸망할 당시, 주변국의 상황을 둘러보면,
부여국.
동북 방면에는 단군조선의 적통자를 자처하는 부여가 예, 맥족을 중심으로 하여, 단군조선부터 전해 내려온 뛰어난 제철 기술을 앞세워 만주 평원과 난하 유역을 건너 조선하 부근까지 영역을 회복하며 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고구려.
제 2대 유리왕이 즉위 22년 계해년 (B.C 3년)에 도읍을 국내성 國內城으로 천도하여, 불이성 不而城이라고도 칭하였다.
유리왕 31년에는 신 新의 왕망과 싸워, 요서태수 遼西太守를 죽였다.
- 삼국유사.
고구려의 기마병은 파죽지세 破竹之勢로 영토를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백제는
병진년 (B.C 5년) 한산 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 廣州다.
사로국.
박혁거세의 장남, 제 2대 거서간 居西干 남해 차차웅 南解 次次雄은 신생국 新生國의 국력 증진 增進의 조건이 먼저, 백성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피부로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육부촌 중에 명활산성 고야 촌의 습비부 설촌장 薛村長에게 정보망을 구축하게 하여, 인근 주변국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끔 배려하고 독려하였고, 고야 촌의 설촌장은 수십 척의 선단 船團을 이끌고 해외 海外로 진출하여 무역 등을 담당하며, 주변국의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남해 차차웅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한편,
왕망의 전사와 신 나라의 몰락으로 재 건국 再 建國된 한 나라(후 한 後漢)의 광무제.
건국,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순서는 명약관화 明若觀火하다.
황제 왕망의 추종 세력과 그 동조자들을 수색하여 처단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반란 反亂이 혁명 革命으로 연결된 대의 명분을 내세워, 혁명군이 정당하게 집권 執權할 수 있다.
왕망의 정치적인 동맹자이자 가장 가까운 인척인 투후 김 씨 세력과 투후의 추종자들 즉, 투후를 따르는 많은 흉노족과 부여인들을 색출 검거하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그러니 투후 김당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다급한 처지다.
피신 避身해야 한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으니, 증조 할아버지인 김일제로 부터 70여 년간 누려왔던 투후로서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위험한 이 지역을 빨리 벗어나야만 한다.
될 수 있으면 멀리… 육로가 연결되지 않은 바다 건너 먼 곳으로, 아예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한다.
더구나, 혼자가 아니라 식솔과 친인척을 비롯하여 본인을 따르는 수많은 흉노의 무리와 부여의 예, 맥족들 모두 같이 피신해야만 된다.
6. 밀명 密命
보름 전,
김당 투후는 황제의 명으로 큰아들 성한(星漢)과 함께 입궁 入宮하여, 황제 왕망과 측근 수명의 신하들과 미앙궁의 한 밀실에서 회합했다.
적미군 등의 반란으로 황궁의 분위기는 어수선하면서도 사뭇 침통하였다.
“시국이 어지러워 국가의 존망(存亡)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니 지금부터는 투후는 황실과는 별도로 행동하시오”라는 밀명(密命)을 받았다.
이에 투후는
“황제 폐하! 황실의 동지들과 뜻을 같이하여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함께 죽겠나이다”
황제는 면류관을 직접 풀고 황 관을 손으로 벗어 탁자 가운데에 내려놓는다.
총총걸음으로 재빨리 오던 내감(內監)은 어쩔 줄 모르고, 황제 옆에서 허둥대다 할 일 없이 뒤로 물러선다.
보름 전보다 흰머리가 배나 많아져 이제는 검은 머리가 별로 보이지 않는 황제 왕망은
“투후의 마음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요. 그러나 지금은 감정에 치우치지 마시고 냉철히 판단합시다. 본래 우리가 처음 황실에 입궁할 때, 결의 決意 하였던 초심 初心을 잃지 마시오.”
차를 한잔 입에 머금은 황제는
“그간 우리가 꿈꾸어 왔던 개혁 改革을 이루어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고 부국강병 富國强兵을 이루고자 여러모로 개혁을 도모하였으나, 근래 들어 홍수로 황하가 몇 번이나 범람하는 등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 민심이 동요되고, 이어 지방 곳곳에 도적 떼가 창궐하여 결국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것 같소. 이 모두가 짐 朕이 부덕 不德한 소치 所致인거 같소”
“폐하, 천재지변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불가항력 不可抗力이옵니다.
너무 괘념하지, 마시옵소서”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앞으로의 일이나 의논합시다.”
“투후는 빠른 시일 내에 안전한 신천지(新天地)를 개척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여 우리가 이루지 못하였던 이상향(理想鄕)을 꼭 이루시도록 바라오”
그러면서 조카 김성한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많이 컸구나, 요즘 주역 周易과 병서 兵書 공부에 열중한다고…. 수고가 많다”라며 다독이더니 “앞으로 성한이가 아버지를 이어 큰일을 도모해야 한다.”
약관 弱冠의 김성한은 진중하면서도 씩씩한 목소리로 크게 답한다.
“네, 폐하 열심히 하겠습니다.”
황제는 이어, 내감 內監에게 분부한다.
“준비해둔 상을 내어오라”
“녜, 폐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이미 황궁 내의 귀중품을 마차 10대 분량으로 만들어 투후 저택으로 보냈으니 지금쯤 도착했을 거요”
“황은에 감사합니다”
“마지막 마차 馬車에는 작은 손자 사영 嗣英이 유모와 같이 있을 거요. 부탁하오”
“네, 이 목숨 바쳐서라도 황손 皇孫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아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시오, 일반인과 똑같이 대해주시오, 이것이 나의 유언이라고 생각하시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사영이 자라서 스스로 힘이 생겨 반역도들에게 복수한다면 몰라도 억지로 복수심을 키우지는 마시오, 내 말뜻을 아시겠지요”
“네 폐하, 마음속 깊이 새겨 놓겠습니다.”
"그리고, 사영의 성과 이름도 바꾸고, 새로운 이름은 투후께서 알아서 작명하도록 하시오"
서로가 이번 반란의 결말이 자신들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이어 황제와 투후는 자리를 옮겨 술을 몇 순배 한 후, 투후는 침통한 표정으로 아들 성한과 함께 귀가 하였다.
7. 사로국
다음 날, 이전부터 친분이 깊은 사로국의 대군 大君, 박달 거세가 있는 요하 遼河로 시차 時差를 두고 전서구를 2번 띄우고, 가까운 친인척들에게는 하인들을 시켜 통지하고 멀리 떨어진 일족들에게도 전서구 傳書鳩를 띄운다.
이제, 비둘기 집은 텅 비어 있다.
투후 秺候 김당 金唐.
드넓은 투후 秺候 저택의 뜰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을 하고 있으나, 무엇을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아버님, 숙부와 산동대군 당숙 堂叔이 함께 왔습니다.”
차남 성형 星亨의 보고들 듣고 비로소 정신이든 김당은 차남과 함께 서재로 들어섰다.
그곳은 이미 10여 명의 친인척이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요동을 다녀온 종제 從弟인 산동대군 김유도 그 자리에 있었다.
“장안 長安의 숙부님과 생질들은 인척들과 하서회랑 河西回廊을 통하여 북서 北西 방향으로 이동 移動하고 있답니다.”
* 하서회랑(河西回廊)
기련 산맥[祁連山脈] 북쪽, 합려 산맥[合黎山脈]과 룡수 산맥[龍首山脈]의 남쪽, 오초령 산맥[烏哨嶺] 서쪽에 있다. 황하 강[黃河] 서쪽에 있는데다 두 산맥 사이에 끼어 있으므로 이런 지명이 붙었다. 간쑤 성에 있으므로 간쑤 회랑지대라고도 한다. 동서의 길이는 약 1,000km이나, 남북의 너비는 수십km밖에 안 되며, 고도는 해발 1,500m 내외이다. 대부분의지역이 산맥 앞쪽의 비탈진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서회랑은 3개의 독립적인 하천 분지로 나누어진다. 옥문 玉門· 안시 安西 ·둔황 敦煌 평원은 수러 강 疏勒河 수계에 속하며, 장예 張掖· 고대 高臺 ·주천 酒泉 평원은 대부분이 헤이허 강 黑河 수계에 속하고, 일부가 베이다이 강 北大河 수계에 속한다. 그리고 우웨이 武威·먼친 民勤 평원은 스양 강 石羊河 수계에 속한다. 이 회랑지대에는 기련산맥에서 흘러내린 얼음과 눈이 녹은 물을 관개에 이용한 오아시스 농업이 비교적 발달해 있다.
화서회랑은 예로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이었으며, 실크 로드 역시 이곳을 거친다.
가욕관 嘉峪關, 돈황의 막고굴 寞高窟, 양관 陽關은 모두 하서회랑 서부에 있다.
“하서회랑쪽 이동 인원은 몇 명이나 되지?”
“친인척 50여 명과 따르는 형제들이 이천여 명 정도 된답니다.”
“정착지는 어디로 하기로 하였나?”
“일단, 알타이산 동쪽의 항가이산 남쪽 방향에서 고비사막 중간의 물이 흐르는 강 근처에 임시 거처를 정한다고 합니다.”
“으음... 우리 조상들의 본래 고향에 정착하겠다는 생각이군, 잘 결정한 것 같군” “예, 얼마 전까지도 형제들이 지속적으로 오가며 연락을 하던 곳이라, 별 이상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조속히 가까운 산동 山東의 북해 北海 해안에 모여 선박을 이용하여 이동하여야 할 것이야.”
“네, 시일을 어떻게 정 할까요?”
“나흘 후로 정하도록 하지”
다른 인척들이 묻는다.
“행선지 行先地는 어디로 정하였는지요?”
“일단 조선하 朝鮮河와 요동 遼東의 대릉하 大陵河로 정하였습니다.”
* 조선하 朝鮮河는 후일, 조백하 潮白河, 또는 조하 潮河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난하의 동쪽은 모든 지역이 요동이다.(즉 당시에는 난하를 요하로 불렸다. 명말 明末, 청초 淸初 까지만 해도 난하를 요하로 지칭하였다. 따라서 대릉하도 지금은 요서 지역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는 요동이다. 한사군도 난하를 중심으로 하여 설치되었다, 현재의 요하를 넘지 못하였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터라, 좌석 座席한 일행, 모두 투후 김당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였다.
열흘 전,
김 당 투후는 산동 성내 투후 자택에서 산동대군 김유의 주선 周旋으로 대릉하에 거주하는 부여국의 십칠 선생과 사로국의 박달 거세 대군과 사자회동 四者會同을 가졌다.
네 명이 모이다 보니까, 한반도 사로국 남해 차차웅의 삼촌 인 박달 거세, 슝노왕의 후예인 김당 투후, 투후의 조카 산동대군, 투후의 장남 김성한도 부친 옆에 의젓이 앉아 있다. 그리고 동이족 예맥족의 대표자 격인 십칠 선생이 회합 會合하게 되었다.
서로가 멀리 떨어져 살아왔으나 모두가 동이족 언어를 구사하니 통역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낱말과 어순 語順이 같은 알타이어계의 동이족 조선어를 공통으로 사용하니 의사소통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주인장인 김당 투후와 함께 오찬 午餐을 들며 본론으로 들어간다.
김당이 먼저 운을 뗀다.
“우리 측의 이주 희망자가 약 4~5만 명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십칠 선생이 감탄한다.
“햐…. 대단한 규모군요, 그 정도면 한나라(一國)를 세울 수도 있겠습니다.”
마주 앉은 박달 거세가 말을 받는다.
“좋습니다, 그 정도의 인원 모두를 수용 受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점이 문제가 되죠?.” 김당 투후가 묻는다
“이주할 정착지의 땅은 적당히 넓은데, 이송 방법이나 시간이 문제입니다.”
“먼저, 지형 地形과 토질 土質은 어떠한가요?”
“땅의 생김새는 이곳과는 매우 다릅니다, 아기자기한 산들이 많이 있고요, 산이 많다 보니 숲도 우거지고 강과 내 川도 곳곳에 이어져 있습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바로 손으로 떠서 마실 수 있습니다. 토질은 비옥한 편이라 다양한 농작물들이 잘 자라죠, 비도 적당히 오며, 기후도 이곳보다 따뜻한 편입니다.”
박달 거세는 미리 준비한 글을 읽듯이 신천지 新天地에 대한 설명이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협상은 잘 타협 妥協이 되었다.
박달 거세 역시 사로국의 국력을 키우는데 제일 중요한 요건인 백성들을 모으는 방안을 여러모로 강구하던 중이었다.
때마침, 김당 투후로부터 대단위의 인원이 이동할 거처를 타진 받자,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사로국으로 이주하면 신분보장은 물론, 같이 오는 모든 백성에게 함께 모여 살 터전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지 田地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산동성의 바닷가 출신에게는 사로국에도 넓은 바다가 있으니 어로행위 漁撈行爲도 허락한다는 조건까지 부연제안 敷衍提案 한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서로의 시기와 조건이 적절하게 맞아서 떨어졌다.
투후도 수년 전부터 사로국을 비롯하여 주변국들에 대하여 이미, 여러 차례 조사한 바 있다.
박달 거세의 설명이 그동안 조사한 보고자들의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왜(倭)
왜 倭에도 2차에 걸쳐 배 3척이 조사하였으나 곳곳에 활화산 활동이 성행하고, 화산섬이다 보니 비가 오면 빗물이 즉시 땅속으로 모두 스며드는 지질 地質로 인하여 물이 귀하며,
여름철에는 큰 태풍이 잦고, 습기가 많아 질병 발생률이 높고, 섬의 동부 해안선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며 해일 海溢이 육지를 덮치는 등 자연재해가 심하여, 현지 거주인들도 불안에 떨고 있으며,
또한, 문자 文字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미개인들만 있어 '우리의 이상을 펼칠 조건'이 아니므로 이주 지역으로 부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렇군요, 무릉도원이네요…. 이동 방법은 바닷길을 이용해야겠는데, 선박이 모자란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그럼 일부는 육로 陸路로는 갈 수가 없는가요?”
“육로 陸路로 연결은 되어 있지만 너무 멀고 험난하여, 많은 수의 인원이 가족 전체가 움직이기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럼 이동 방법은 선박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럼 배가 얼마나 필요하죠?”
“인원을 5만 명이라 보면, 300명이 탈 수 있는 대형 선박이 약 200척이 필요하겠네요”
“흠. 100명이 탈 수 있는 중형 선박이라면 500척이 필요하군요?”
“그렇습니다, 일반 고기잡이 어선은 배가 크다 하더라도 원거리를 이동할 때는 20명이 선승 船乘하기에도 위험합니다?”
“해로 海路를 통해 항해하려면 시일은 얼마나 걸리죠?”
“해로는 날씨가 제일 중요합니다. 요즘처럼 편서풍 偏西風이 순조롭게 불어 준다면 보름 가량 소요될 겁니다, 그런데 여름철 태풍이 오거나, 일기가 불순하여 파고 波高가 높아지거나 하면, 한 달 이상도 각오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가을이나 겨울철에 이동하는 것이 좋겠군요?”
“네, 그러면 이동 시간을 단축하는 시기로는 좋은 계절인데, 겨울철에는 찬 바닷바람에 노약자들이 고통을 받겠죠”
“따라서 이주지 移住地에 가서 거처를 마련하기에도 추운 날씨에는 어려움이 많겠군요”
“그렇습니다. 봄철이 가장 좋죠”
이주지에 대한 지리적 정보와 이주 방법, 시기, 소요 시간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김당 투후, 이제 좌고우면 左顧右眄할 겨를이 없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한 달 이내에 이곳에서 무조건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로국으로 갈 때는 편서풍 偏西風 덕에 보름에서 이십 일 정도의 거리인데, 올 때는 편서풍이 역풍 逆風 구실을 하여서 한 달가량 걸립니다. 따라서 왕복 시간이 달포는 걸릴 거로 생각하여야 할 겁니다. 이 시일 時日은 아주 순조로울 경우의 소요 시간이며, 일기 日氣가 불순하여 바람이 거세어지거나, 선체 船體에 문제가 생기면 항해 시간이 더 길어지겠죠”
“그럼, 현재 가동 可動할 수 있는 선박이나 그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될까요?”
“현재 200명가량이 탈 수 있는 큰 범선이 6척이며, 100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중형 선박이 50척 정도입니다.”
“그러면, 한번 출항에 선승할 수 있는 인원이 약 6천 명 정도가 가능하네요?”
“안전하게 운항하려면 원항 遠航이라, 2할 정도의 선승인원을 줄이는 게 바람직합니다”
“그럼 5천 명 정도밖에 안 되겠군요?”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10번을 왕복하여야만 모든 인원이 이동 가능하다는 말인데, 소요 시일이 1년은 걸리겠는데….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 십칠 선생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귀를 씻고 십칠 선생님의 고견(高見)을 듣겠습니다”
- 14. 원보
첫댓글 포로의 삶을 극복하고 살만해지니 다시 위기, 이제 새로운 삶을 떠나는 김일제의 후손들의 모습
기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