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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글 퍼옴>
박정희와 악마주의
-혹은 ‘숭고한 희극’의 미학적 가능성에 관한 고찰
-한국인들에게는 마법적인 지도자가 필요해.
-북한 아니면 남한?
-둘 다.
3년 전 버스에 탔다가 엿들은 두 독일 학생의 대화다. 마침 신문에서 북한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있던 참이었다.
이 싸가지 없는 두 녀석은 지금 북한은 물론 남한까지 싸잡아 ‘욕’을 한 것이다.
정상적 언어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이게 ‘욕’이란 걸 안다. 그런데 이인화라면 다르다 그에게는 이게 ‘욕’이 아니다.
그는 이 녀석들의 대화를 자기 세계관의 확증으로 이해 할 게다.
내가 이글을 쓰는 건 이인화가 정상적인 언어 능력을 되찾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서론은 이만하면 됐다.
역경험론
이인화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이렇게 요약한다.
“험악하고 심정적이다.” 그리고 이 험악하고 심정적인 견해는 “바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모든 전제와
추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위인의 영웅적인 천분을 부정하는 모든 소인배”들의 견해라는 것이다.
이 전지적 작자 시점 한편 진형준은 이인화의 소설을 평하면서 “유신세대의 한명으로서 청년기에 받았던 정신적 상처의 억압으로부터
내가 조금도 자유로워 지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고백”한다.
여기서 (그들의) 독재는 심리요법으로 치료해야할 피해망상증이 된다.
이렇게 진형준이 독재라는 사회현상을 심리적 트라우마로 환원시키면 이공을 받아 이인화는 박정희 비판이 심리적 성격의 것
즉 “험악하고 심정적인 것”이라는 골대에 집어넣는다. 이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
유신시대를 겪은 한 사람으로부터 자백(“고백”)을 받은 후, 유신을 겪지 않은 이인화는 “박정희의 시대를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거리를 가진 세대로서 보다 객관적인 진리에 다가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여기서 체험은 사태의 객관적 이해를 막는 인식론적 장애물이 되고 “거리를 가진 세대”인 이인화는 “보다 객관적 진리에 다가”갈
존재적인 보장을 갖게 된다. 이 심오한 인식론. 역경험론?
이 심오한 인식론으로 도달한 “보다 객관적인 진리”란게 이런 거다:
박정희는 “자신의 통치가 갖는 억압적 본질에 대해 어떤 위선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까놓고 하는 강도짓은 강도짓이 아니란 얘긴지? 그나마 뻔뻔한 거짓말이다.
박정희는 자기의 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불렀고 그걸 ‘독재’라 부르면 잡아 가두었다.
아무리 민주주의의 형태가 다양해도 대체 적 기준은 있는 법이다.
텔레비전을 샀는데 화면이 없고 소리만 난다면, 그것은 텔레비전이 아니라 라디오라고 불러야 한다.
“박정희 시대를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거리”, 이 거리 때문에 이인화는 박정희가 ‘위선적인 거짓말’을 해도 장충체육관에
오천 명을 모아놓고 집단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이인화 특유의 영웅주의사관은 제 3공화국에 대한 평가를 “영웅의 천분”을 알아보는 신비한 인식기관을 가진 군자와
그걸 갖지 못한 “소인배” 간의 유교적 대립으로 바꾸어 버린다.
여기에 전범출신의 어느 일본인을 모범으로 삼은 정진홍,
이 쪼르륵거리는 소리의 반주에 맞추어 진형준은 “아기장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민중의 염원을 들먹인다. 난리가 났다.
영웅이여. 오라, 민중이 기다리노라. 그대의 천분을 알아줄 사람들도 이미 있노라.
정말 한국인에게는 ‘마술적 지도자’가 필요한가 보다. 이 엄청난 시대착오.
영웅시대
역사가 영웅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믿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에는 서사시가 역사학을 대신 했다.
중세에는 신의 의지가 역사를 이끌었다. 이때는 성경이 역사를 대신했다. 근대인들은 이런 미신을 믿지 않았다.
이때 역사에서 법칙을 찾는 합리적 연구가 시작된다. 하지만 합리적인 건 원래 재미가 없는 법이다.
자본주의의 산문성에 하품을 하던 낭만주의자들 은 역사를 다시 시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역사법칙’이 서사시의 주인공 될 수는 없잖은가? 그래서 영웅이 부활해야 했다.
이인화와 정진홍의 좋아하는 칼라일에 따르면 “세계는 신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데 신의 의지를 대행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자가
영웅”이라고 한다. 고대 영웅사관과 중세 기독교사관의 복합니다. 여기서 역사는 다시 위인전이 된다. 이 ‘반동적 낭만주의’.
위대한 영웅시대 히틀러와 스탈린 독재를 경험한 오늘날 제정신 갖고 이런 결과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상’ 편집부도 이를 안다.
편집부는 칼라일의 ‘역사상의 영웅과 영웅숭배 및 영웅정신’이 이미 “당대는 물론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주의하라. 여기서 카라일이 받은 건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다. ‘비난’은 뭔가 부당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
의 ‘역사상의 영웅과 영웅숭배 및 영웅정신’에는 “칼라일의 눈치 보지 않는 역사관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칼라일은 부당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지켰다는 거다.
여기서 옳고 그름의 인식론적 문제는 소신을 지키는 지사적 도덕의 문제가 된다. 하만 “눈치를 보지 않”고 “솔직”했다는 사실에서
그가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 아니다. 이 ‘범주오류’.
‘힘’에 붙인 따옴표는 이 권위를 강조한다.
하지만 플라톤의 ‘국가론’이 2천년이상 읽히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그게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 아니다.
이 얄팍한 ‘권위에 의한 논증의 오류’, 또 “백오십년”이라는 표현 왠지 더 유구하다는 느낌을 준다.
칼라일의 영향사를 ‘인상’주의적으로 늘리려는 편법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칼라일이 후의 등장한 수많은 사학자들 중에 제 편이 오죽 없었으면 장장 “백오십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까? 이 처절한 닮은 발가락 찾기.
박정희와 근대
이게 이인화의 세계관이다. 이 황당한 논리를 가지고 그는 이제 한국 근대사를 설명한다.
박정희는 한국에 근대를 도입한 “영웅”이다. 이 영웅을 만들어낸 것은 “시대”이다.
물론 이 의인법의 배후엔 사람이 즉 영웅을 만든 숨은 공로자들이 있다:
“영남 남인.” “영남 남인의 지역적 기반”이 영웅을 만들고, 이 영웅이 한국의 근대화를 만들었다.
여기서 한국 근대사는 영남 남인 종친 회사가 되고 한국 정치의 고질병은 숭고한 영웅서사시로 변용된다. 압권이다.
영남 남인 양반님네들 다음에 영웅을 또 하나 만들거든 그땐 향우회장을 시킬 일이다.
내가 다른 지역출신이라 하는 얘기가 아니다. 지역에도 월매가 헐 일이 많은디…….
어쨌든 박정희는 “우리사회의 봉건적 잔재를 격퇴”시키고 한국에 근대를 도입했다고 한다. 과장이다.
최초로 근대를 도입한 것은 갑오개혁이고, 국사학에서도 이를 기점으로 세대를 구분한다. 또 한국에 자본주의를 도입한 건 일본이다.
일본의 극우파들이 이걸 얼마나 자랑스 럽게 여기는데, 철학사전에 안 나오는 박정희 철학도 일본 메이지 유신을 베낀거다.
즉 그의 “천분”이 실은 후천적 획득형질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인화의 애국심은 진보의 역할을 빼앗기는 걸 허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경제적 잉여의 지주적 기원”을 없앤 게 (토지개혁이) 박정희의 작품이었던가,
이런 왜곡과 과장을 통해 박정희를 근대성이 ‘유일한’ 담지자로 만들어 놓으면 그는 이제 위대한 부르주아 혁명가 나폴레옹이 된다.
어떤 저능아가 이런 논리로 박정희를 옹호할 수 있단 말인가? 먼저 박정희는 나폴레옹이 아니다.
박정희가 나폴레옹이라면 이디 아민은 알렉산더다
둘째로 나폴레옹 안가를 차려놓고 여자 불러다 술 먹었다는 얘긴 들은 적 없다. “우리 사회의 봉건적 잔재를 완전히 청산한” “위인”이 즐긴 ‘봉건적’ 기생문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했던 그 “융통성 없는 위인”이 국민의 밀가루 막걸리 마시며 힘들게 버어들인 외화로
‘때로’ 양주를 사 마시는 “융통성”은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금욕과 절약을 규율”했다던 그 “위인”이 말이다.
셋째로 나폴레옹은 왜 비난하면 안 되는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순간 베토벤은 영웅의 원고를 찢어 버렸다.
‘저능아’였을까? 나폴레옹을 지지한 고야도 그의 만행은 가차 없이 고발했다. ‘저능아’?
영웅의 윤리학
설사 박정희가 “위인”이라 믿어도 그가 저지른 범죄만은 비판할 수 없을까? 그럴 수 없다.
이인화는 베토벤 같은 저능아가 아니므로 영웅은 비난할 수 없단다. 영웅은 선악의 피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인화의 영웅윤리학이 시작된다.
“수단과 목적이란 …… 하나는 정당화되고 다른 하나는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분리될 수 없다.”
가령 내가 친구를 돕기 위해 은행을 턴다면 이때 정당화되나 다른 하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렇게 양자가 분명하게 분리될 수 있다. 이건 상식이다.
이인화는 해괴한 논증으로 이 상식을 뒤엎는다. “우리는 ‘집’이라는 수단을 통해 ‘거주’라는 목적을 실현한다.
인간행위의 목적은 인간의 충동이 야기하는 인과적 필연성 때문에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 횡설수설이다. 거주를 실현케 하는 집은 정당하다?
원래 ‘집’이라는 단어엔 ‘정당하다’라는 술어를 붙이지 않는 게 일상 언어의 문법이다.
일을 해서 집을 샀건, 사기를 쳐서 집을 빼앗았건 모두 거주라는 목적을 실현시킨다. 그렇다고 둘 다 정당한건 아니다.
그가 이 상식을 무시하는 건 얼렁뚱땅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날아가고픈 이데올로기적 강박관념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정희의 ‘잘살아보세’ 철학이 실절한 목적이 일정하게 실현되었다면 우리는 그가 선택한 수단에도 상당한 합목적성이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걸 ‘논증’이라고 하고 있다.
거주라는 목적이 일정하게 실현되었다면 내가 선택한 모든 수단 가령 사기에도 상당한 정당성이 있었다?
여기서 이인화는 ‘정당성’과 ‘합복성’을 혼동한다.
이인화는 말한다.
“우리는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때로 도덕적으로 의심스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과 실제로 악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태에 대해 개인주의적 윤리는 어떤 해답도 주지 못한다.”
이 자신감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개인주의적 윤리”를 가진 내가 그 “해답”을 주겠다. ‘그러면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때로 도덕적으로 의심스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치 의사들의 멘탈리티를 본다.
가령 스피노자를 왜곡 인용했을 때 이인화는 자기가 생각하는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 도덕적으로 의심스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독자에게 그 결과로 발생하는 “악을 감수”하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 그러면 안 된다.
법치국가의 포기
이인화에 따르면 “최초로 대의를 위한 동기가 있었고 그것의 실질적인 결과가 대의에 합당 했다면 그 범죄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대의인지를 ‘누가’ 정의하고 또 그 실질적 결과가 대의에 합당했는지 ‘누가’ 판단하는가?
민주적 토론이 없는 상황에선 당연히 독재자와 그 일당이 유일한 판단주체가 된다.
저지르는 주체도 그들이고 판단도 그 들이 하고 정당화도 그들이 한다.
가령 이렇게: “그 범죄가 설사 헌법을 파괴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도의 인간적인 도덕성의 표출일수가 있다.”
최고의 범죄도 이렇게 간단하게 정당화 되는데 납치나 고문 인권탄압 같은 시시한 범죄는 닐러 무삼하리요.
압권은 이 끔찍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논증이다:
이인화는 “선과 악, 범죄와 위업은 고정된 진리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유신을 유일한 진리의 수호자라고 자처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의견이 다르면 서로 토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없다는 그 권리를 이상하게도 박정희는 갖고 있었다.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의 개발독재가 행사되었다.”
일상 언어의 문법은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독재”를 행사하는 걸 “토론”이라 부르는 걸 금한다.
이인화는 박정희 비판을 가르켜 “토론 자체를 거부하는 반지성적인 파시스트의 논리”라 부른다.
그 “반지성적이 파시스트 논리”를 박정희가 휘둘렀다. 그런데 박정희는 선악과 헌법을 초월한 “영웅”이다.
“박정희는 …… 국가의 절대정신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앞에서는 …… 그 비열함과 천박함,
간악함과 기만을 비판하는 어떤 개인주의 윤리도 무시된다.”
하긴 정당화가 안돼도 상관없다. 이인화는 아직 비장의 카드를 갖고 있으니까. “
그것은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영웅적 확신의 문제이며 의지의 문제이다.”
이렇게 “가치판단의 문제”를 “영웅적인 확신의 문제” 혹인 “의지의 문제”로 대체 하는 것이 바로 파시스트 윤리학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이렇게 옳고 그름의 판단도 하지 않은 채 “영웅적”으로 “확신”부터 하는 것을 일상 언어에서는 ‘광신’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광신자들의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우슈비츠가 증언한다.
여기서 이인화는 사화과학에서 사용하는 ‘필연’의 개념을 곧바로 자연과학적 ‘필연’과 등치한다.
이 무지막지한 ‘환원주의’. 만약 인간의 행동이 정말 낙하법칙과 같은 자연과학적 필연성에 지배된다면 도덕이나 윤리나 정당화 같은 건
필요 없을 게다. 그런데 왜 이인화는 굳이 스피노자를 왜곡해 가면서까지 박정희를 ‘정당화’하는 수고를 하는 걸까?
이인화의 텍스트 읽기
이인화는 이런 몰상식을 뒷받침하려고 애꿎은 철학자들을 괴롭힌다.
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박정희=절대정신’이라는 등식으로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 3부작’을 국가주의의 정당화의 근거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박정희 서사시에 써먹을 오디세우스 신화로 요약한다.
여기서 텍스트를 읽는 그의 수준이 드러난다.
놀랍지만 이게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젊은 교수”님께서 자기 세계관을 구성한 방식이다.
이쯤 되면 지능 아니면 양심의 문제다.
그나마 맥락이 좀 닿게 인용한 게 있다면 헤겔의 ‘법철학’ 정도인데 거기서도 그가 고르고 고른 옥석 같은 구절이 이런 거다:
“공민의 최고 형태”로서 “국가이성의 정점에서서 보편자를 위한 범죄를 수행하는 보편적 신분.”
이 인용구가 실은 철학자들이 헤겔을 욕할 때 즉 그의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경향을 비판할 때 써먹는 구절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군국주의가 ‘욕’이 아니라는 건지.
스피노자에게서 그는 인민을 구가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만들려 했던 민주주의적 자연법 사상을 배웠어야 한다.
마르크스에게서는 ‘국가의 대의’라는 구호가 실은 특정집단의 특수 이익을 보편이익으로 가장한 이데올로기라는 유물론적 관점을
배웠어야 한다. 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서는 박정희 추종자처럼 “물질적 발전”을
곧 “인간이라는 조재가 가진 가능성의 발전”으로 통칭하는 반성 없는 계몽이 결국 파시즘을 낳는다는 경고를 배웠어야 한다.
그리고 헤겔에서는 ‘영웅’도 역사발전으로 통칭하는 반성 없는 계몽이 결국 파시즘을 낳는다고 경고를 배웠어야 한다.
이 상식이 없는 이인화.
불타는 눈초리로 민방위 모자를 굳게 눌러쓰고 가미가제 이인화는 사방에서 논리적 십자포화를 받아 망신창이가 되어도 끝까지
제 비행기를 버리지 않을 게다 나는 그걸 안다. 그는 끝까지 “눈치 보지 않고” “솔직하게” 우길 것이다.
가미가제에게 중요한 건 전사의 장렬함이라는 죽음의 미학뿐이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왜 무엇을 위해 죽는지 묻기 전에 먼저 죽을 준비부터 한다.
옳은지 그른지 따지기 전에 ‘소신’부터 지키는 이인화와 어딘지 닮은 데가 있다.
그래서 그는 “가미가제”의 “심정”에 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마 가미가제 조종사들은 최소한 적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인화의 인문학적 소양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수준도
못된다. 그는 좌파의 도서목록으로 무장한 채 거꾸로 우군의 “항공모함으로 돌진한다.” 제 정신이 아니다.
지도자 숭배
스피노자와 마르크스 심지어 아도르노까지 써먹는 이인화가 정작 우익의 바이블을 인용하지 않은 건 왜일까? 모르는 걸까?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을 비판하며 지도자 숭배를 정초 했던 칼 슈미트 전체주의를 이론화했던 이 유명한 파시스트 이데올로그. 만약
이인화가 그를 읽었더라면 이렇게 억지를 부려가며 애꿎은 철학자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인화는 따옴표 붙은 ‘힘’을 좋아하지 않는가. 칼 슈미트의 저서로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철학이나 정치학에서
“반드시 읽어야할 도서로 분류되는 ‘힘’을 과시하고 있”다.
한번 꼭 읽어 보시고 기회가 있으면 칼라일의 책처럼 ‘상상’에 한 번 소개하기를.
독일 파시스트들의 저서에서 이인화가 하고 싶어 하는 얘기가 고스란히 다 들어 있다.
지도자에게 무시로 헌정을 파괴할 권리를 주는 것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우기는 것
국가적 목적 앞에 개인주의를 무시 하는 것 그리고 특히 지도자 숭배…….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참으로 꿰뚫어 보는 거지, 만난을 무릅쓰고 이 시대를 그것으로 인도할 용기를 지닌 지도자……”
이게 인문학의 언어일까? 위대하시며 영명하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불러도 불러도 그 이름 길이 빛나실 분이라는 거다.
“그의 영웅적 천분을 알아보고 깊고 크고 참된 성실성으로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한 국민들은 상상을 초월한 경제적 발전을 하게
된다.” 천분인식의 법칙 내년 노벨경제학상은 따논 당상이다. 세계의 경제학자들은 왜 이해법을 모르는 걸까?
하긴 지도자를 알아보았던 독일 국민들을 보라 단번에 인프라를 구축하고 실업자를 없애고 마이카 시대를 열지 않았던가.
“이러한 경제의 발전은 단순한 물질적 부의 증대가 아니라 인간적인 힘의 발전이며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가능성의 발전이다.”
‘철학적 인간학’?! 꼴에 갖출 건 다 갖추었다.
바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들은 줄지어 파시스트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치 독일은 흘러넘치는 그 “인간적인 힘”을 주체할 수 없어 전쟁을 일으켜야 했던 것이다.
이인화는 아마 이 “인간적인 힘”이 동아시아로 세계로 마구 뻗어 나가는 것이 보고 싶을 것이다.
그치?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이 “인간적인 힘”이 차고 넘쳐 근질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인화는 ‘반지성적인 파시스트 논리’가 나쁘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면 서도 정작 자기가 구사하는 그 끔직한 노리가 실은 반지성적 파시스트 논리라는 건 모른다. 제 정신이 아니다. ‘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 자를 못 만난 모양이다. 그걸 꼭 남이 말해 주어야 하는가? 당신은 파시스트다.
고독와 우수의 마키아벨리즘
“고독와 우수의 마키아벨리즘”.
이인화는 마키아벨리의 위대성이 ‘군주는 제멋대로 법을 이용해도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 믿는 모양이다.
여기서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또 한번 드러난다
. ‘군주론’이 고전이 된 것은 바로 이 책에서 정치학이 비로소 도덕론의 수준을 넘어 근대적 과학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인화가 마키아벨리를 제대로 읽었다면 거기서 그는 입으로 ‘군주의 덕’을 떠들던 당시의 군주들이 ‘실제로’ 저지른 추악함을
냉정하게 묘사한 사실주의 정신을 배웠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신으로 위대한 영웅시대 3공화국 시절에 ‘실제로’ 저질러진 추악상을 가차 없이 폭로했어야 한다.
하지만 가마가제에게 이런 분별력이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정치학을 군주의 덕을 나열하는 수준에서 과학으로 끌어올린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이인화는 거꾸로 과학이 된 정치를
다시 “지도자의 천분”에 관한 중세적 자질론의 수준으로 끌어 내린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참으로 꿰뚫어보는 예지 만난을 무릅쓰고 시대를 그것으로 인도할 용기.”
그러면서도 ‘군주론’를 읽었던 수백 년 전의 군주들과 달리 창피한 줄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독일말로 된 거창한 해석적인 명제를 내걸고 이인화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마키아벨리를 곡해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거나 ‘지도자는 법을 무시할 권리가 있다’는 결론을 끄집어내는 이 천박한 독해법,
이것도 실은 이미 나치들이 써 먹었던 거다.
원전에 가하는 이 무지막지한 난도질 이게 파시스트 해석학의 증상이다.
이렇게 얼렁뚱땅 만들어낸 이 황당한 세계관에는 물론 여기저기 보기 싫은 땜질자국이 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흉측한 물건엔 미학적 포장이 필요하다. 이렇게: “우수와 고독의 마키아벨리즘” 물론 ‘멜랑콜리’가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낭만주의적 천재의 심리적 특징이니까 주제에 갖출 건 찾아서 다 갖춘다. 그대여 아는가, 지도자가 얼마나 고독한지를…….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
“영남 남인” 합창단은 비명을 지른다. ‘하모 억쑤로 고독하제’ 이렇게 박정희 신화를 낭만주의 미학으로 포장하는 것은 콤비 플레이어
진형준의 몫이다.
“따라서 그 아름다움은 선악을 넘어서 있고 어떤 면에서는 차리라 악마적 아름다움에 가깝다.
선악의 구분을 넘어선 미학의 가능성”! 여기서 박정희가 저지른 악은 “아름다움”이 된다.
진형준은 이렇게 허정훈(박정희)을 19세기 ‘낭만주의 악마’로 보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이게 좀 억지다.
극단적 개인주의자인 낭만주의적 악마의 감성과 “국가의 생존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 국가의 이데올로그”의 감성은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인화의 자평에 따르면 허정훈은 “동성연애, 마약, 알코올” “정신이상자, 방탕자, 절망자들”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여성숭배”와
같은 “낭만주의는…… 국가에 의해 달성될 인륜적인 자유를 방해”한다고 믿는 국가주의자다.
그러므로 박정희 신화에 어울리는 것은 19세기 낭만주의가 아니라 20세기에 주책없이 등장한 국가주의적 낭만주의
즉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일 게다.
나치 역시 “국가에 이해 달성될 인륜적인 자유를 방해”하는, 쉽게 말하면 국가에 돈이 안 되는 “동성연애자, 정신이상자, 방탕자,
절망자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내고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여성숭배” 대신 현모양처주의 성차별주의 마초도덕을 관철 시켰다.
20세기 유럽의 여성을 남자 말 잘 들어 그 삶이 너무나 행복하고 가치가 있었던 우리네 조선시대 여인들의 처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성배의 기사 히틀러의 영웅서사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했던 지도자는 마침내 역사적 사명을 다한 후에야 여인과 결혼식을
올린 뒤,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을 들으며 영웅적으로 몰락한다.
히틀러는 바그너 오페라를 보며 유럽을 무대로 웅장한 민족 서사를 쓸 구상을 했다
이렇게 가상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게 파시스트들의 인식론적 특징이다.
파시즘은 도대체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족한 지능과 논리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메워야 하다.
파시스트들의 그토록 신화와 영웅서사시를 좋아하는 건 이 때문이다.
리얼리스트 이인화
진형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인간의 길’에 대한 그의 평론은 이렇게 처음부터 뻔뻔한 거짓말로 시작한다.
작가자신 즉 이인화의 자평을 읽어 보면 분명히 ‘인간의 길’은 “박정희의 일대기”이며 “박정희에 대한 회고조의 그리움 영웅적 미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건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부정하면 정성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다.
그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는 정진홍 교수는 실업자가 된다. 그래도 좋단 말인가?
게다가 남들은 부끄러워해도 가미가제 이인화는 이 사실을 결코 부끄러워할 사람이 아니다.
이인화가 자박한 대로 진형준은 그의 소설에 “과분한 평”을 해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길’은 “한 시대가 특히 어려운 시대가 낳을 수 있는 독특한 인간의 전형을 그려 보이고 있다.”
“전형”! 이 리얼리즘의 범주를 그는 엉뚱하게 ‘신화’와 ‘영웅서사시’에 적용시킨다.
평론가라면 적어도 ‘신화’와 ‘영웅서사시’의 본질이 ‘전형화’가 아니라 ‘과장’ ‘상징화’에 있다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헌병대의 총탄이 날아오는 한강 인도교를 건너던 그때 이미 자기 운명의 찻잔을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다 재고 있었다.”
점쟁이도 모른다는 제 운명을 허정훈은 이렇게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미리 “다 재고” 있었다 한다.
중세 기사 문학 속의 영웅들도 이상하게 자시들의 죽을 때를 미리 알고 있다. 이게 어디 개연적인 일인가?
이어 이인화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길을 걸 어 갔다.”
바로 이것이 “시대가 낳을 수 있는 인간의 전형”을 그리는 위대한 리얼리스트가 국민을 탄압하기 위해 제가 만들었던 그 기관의
장에게 총을 맞아 죽어야 했던 한 독재자의 어리석은 “운명”을 “서사적”으로 “해명”하는 방식이다.
왜 인화는 허정훈이 제 운명을 미리 “재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물론 비극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다.
역사 비극의 플롯은 한 인물이 자기가 대변하는 이념을 살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제 목숨을 버리는 데에 있다.
이 때문에 이인화는 박정희가 가수 불러다 술 먹다 총 맞아 죽으리라는 걸 “미리” “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고 ‘서사적’으로 우기는 거다.
‘상상’의 책읽기
진형준이 인정하는 대로 “고대의 설화 신화들은 소설의 재미를 다하기 위한 단순한 장치들” 이 아니다.
이 장치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 이인화를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할 촌스러운 “근대”적 의무에서 해방시키는 혁명적 기능을 한다.
이런 류의 만화가 “영웅담의 시대가 지났음을 자각하게 못하”고 “신화가…… 언제가 살아 있는 우리의 이야기”라 믿는 몽매한 민중들에
게 어떤 교훈을 주게 될지를 진형준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보여준다.
이 ‘허구’에서 그가 어떤 역사적 결론을 끄집어내는지 보라. 여기서 우리는 파시스트 영웅 서사시의 독자들이 제 역사관을 형성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진형준은 “조선조 지식인의 역사를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관념의 유희의 역사로만 보는 견해에는 어떤 식으로건 동의할 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왜? 그건 “오백년을 …… 몇 가지 자료나 짐작으로 뭉뚱그릴 용기가 없이 때문”이라며 퍽이나 겸손을 떨면서
그는 “몇 가지 자료나 짐작으로 만으로” 조선조 오백년을 “뭉뚱그”리는 사람들을 죄책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공허한 관념의 싸움” 아니면 “치열한 현실적”. 이 사이비 이분법은 더 그럴듯한 제3의 가능성을 슬쩍 지워버린다.
혹시 아는가? 그 “논의”가 당파들 간의 추잡한 이권투쟁이었는지 아니면 세 가지 다였는지 가령 자기 당파의 경제적 이익과 정권욕에
눈이 어두워 저마다 나라를 위한다는 “현실적” 명분을 내걸고 실질적 논의대신에 경전의 자구 해석을 놓고 벌인 “공허한 관념의 싸움”이었을지 ‘바늘에 천사가 몇 명이 내려앉을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중세의 논제도 알고 보면 다 심오한 뜻이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최소한 이인화의 존재구속성 그의 의식의 ‘종친회 결정성’, 즉 그의 역사관이 “영남남인”의 “당파”적 입장일 수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쳐야 했다.
또 사색당파 간의 “논의”라는 표현 그 피비린 내 나는 살육의 흔적을 살짝 지워 버린다.
또 한번 “논의”를 통해 국론을 통일하고 전하께 모든 힘을 몰아줌으로써 이번엔 정말로 한번 조국을 초일류국가로 만들자는 것.
이게 바로 “조국재생”을 꿈꾸는 한국의 움베르토 야무진 꿈이다.
에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둘러싼 추리소설의 포맷으로 중세라는 숭고한 시대의 ‘웃음의 적대성’을 비판했다.
이인화는 똑같은 포맷으로 거꾸로 제 조상들 즉 조선시대의 호르케들이 저지른 그 웃기지도 않을 짓거리를 ‘숭고’하게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베낄 때에도 그는 이렇게 거꾸로 베낀다. 이상한 버릇이다.
중세나 포스트모던이냐
압권은 그 다음구절이다.
‘인간의 길’에서는 “‘이성에 의한 탈마법화의 합리화 과정으로서 의 근대’라는 상투적인 관점이 전복되고 근대로부터 벗어나려는
탈근대의 지향이 옹호 된다 ”.
여기서 이인화는 갑자기 포스트 모더니스트로 둔갑한다.
국가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근대” 철학의 최정점에서 있는 헤겔 철학을 동원하여 박정희가 “절대정신”이었다고 주장하는 그 소설이, 또 이 “절대정신 앞에서는” “어떤 개인주의적 윤리도 무시 된다”고 우기는 그 소설이 “탈근대의 지향”을 “옹호”한다는 거다.
사실 세계 철학사를 통틀러 헤겔 철학만큼 “탈근대”의 철학과 대극을 이루는 것도 없으며, 또 그의 철학을 통틀어 “절대정신”이라는
개념만큼 “탈근대”의 시대정신과 대극을 이루는 것도 없을 게다.
이게 바로 “‘상상’의 책읽기”다. 이 해석학적 도착증. 이게 극우파들의 국제적 공통성인 모양이다.
어느 독일 작가가 쓴 연극
어느 날 히틀러의 일기가 발견된다. 네오나치들은 열광한다.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돌아가신 “지도자”의 일기는 성경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일기가 가짜임이 밝혀진다. 일기에 사용했던 종이가 실은 히틀러가 사망한 이후인 50년대산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누간가가 멍청한 네오 나치들을 상대로 사기를 쳤던 것이다.
하지만 세계관의 공백을 ‘신화’로 메우는 “몽매한” 자들의 무궁한 상상력은 바로 이런 난처한 상황 속에서 비로소 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들은 거꾸로 추론을 한다. “그럼, 총통은 아직 살아 계시다!” “신화”는 이런 방식으로 탄생하는 법이다.
왜 극우파들은 이렇게 거꾸로 움직이는 것일까?
진형준의 말대로 아마 “영웅의 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열망” 때문이다.
열망이 너무 크면 이렇게 현실이 눈에 안 보이는 법이다.
또 진형준은 여기서 “사람들”의 열망을 얘기하는데 그건 ‘모든’ “사람들의 열망”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의 열망”이다.
진형준이 예리하게 지적한 대로 “허정훈의 탄생, 성장, 고뇌를 윤색하고 있는 고대의 실화,
신화들은 소설적 재미를 더하기 위한 단순한 정차들이 아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장치들은 진형준이 말하는 그 “살아있는 인간들”을 합리적 논증의 논리적 강제와 객관적 사실의 현실적 강제에서 해방시켜 주는
혁명적(?) 수단이다. 머리가 나쁜 자들은 오직 논리적 강제가 없는 신화의 세계 속에서만 자유로움을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신화에” “청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화”에 “청원”을 하는 것을 ‘상상’ 편집부는 “‘이성에 의한 탈마법화의 합리화 과정으로서의 근대’라는 상투적 관점”의
“전복”이라 이른다.
여기서 그들의 비논리성, 몰상식성, 이성적 판단능력의 결여는 상투적 관점을 전복하는 “탈근대”가 된다.
김이 새겠지만 사실 이런 “신화”적 방식으로 “탈” “근대”를 하는 것도 이미 나치가 한 번 써먹었다.
“탈근대”를 성취한 벅찬 마음으로 이인화는 외친다.
“우리는 7,80년대를 건너온 나룻배를 불태워야 한다.” 이인화. 여기서 딱 한 번 올바른 소리했다.
근데 이번엔 방향이 틀렸다. 우리가 그에게 해야 할 소리를 그는 거꾸로 우리에게 한다. 생각해 보라.
“이야기꾼” 이인화가 우리에게 “겸손하게” “들려주는” 그 “이야기”에는 사실 새로운 게 하나도 없다.
7,80년대에 학교 다닐 때 바른생활과 국민윤리시간에 지겹게 듣고 외워 시험지에 긁어대도록 강요받았던 바로 그 얘기다.
그런데 왜 이인화는 “7,80년대를 건너온” 그 “나룻배를 불태”우지 않는 걸까 이인화가 올바로 지적한 대로
“우리가 7,80년대와 똑같은 시각으로 90년대와 21세계의 역사적 현실을 조망한다는 것은 새로운 진보를 향한 모든 의미 있는 모색의
실천적 부정이 될 것이다.”
이걸 알면서 그는 왜 “7,80년대와 똑같은 시각으로 90년대와 21세기의 역사적 현실을 조망”함으로써
“새로운 진보를 향한 모든 의미 있는 모색”을 “실천적”으로 “부정”하는 걸까?
그것도 장장 “백오십년”이나 뒤로 돌아가서 말이다. “신의 의지를 대행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자가 영웅이고 영웅의 신적인 면을
숭배하는 것이 영웅숭배……”
신의 아들 박정희
박정희를 영웅으로 숭배하든, 도널드 덕을 신으로 섬기든, 그건 개인적 취향의 문제니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문제는 이 박정희 신학이 함축하는 끔찍한 결론이다.
즉 “영웅” 박정희는 “신의 의지”의 “대행”자였고 “인간을 지배”했던 그의 파쇼독재가 결국은 “신의 의지”였다는 것이다.
이인화 목사님은 결국 이 얘기가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은 박정희가 신의 아들임을 어떻게 아셨을까?
물론 “천분을 알아보”는 그 신비한 인식기관을 통해서다.
그럼 그 계시의 능력이 없는 미천한 우리는? 물론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 믿습니까?
신화가 있으면 당연히 신학이 있어야 한다. 파시스트 철학이 신학적 성격을 띠는 것은 결 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조국 대한민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근대를 탈하여 결국 어느 시대로 날아갔는지 잘 드러난다.
상상은 이인화의 반동적 낭만주의가 포스트 모던이라고 야무지게 상상한다.
이건 내 추측인데 아마 움베르토 에코의 포스트 모던이냐 새로운 중세냐를 읽었던 모양이다.
물론 자기들방식으로 말이다.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에코의 전망이다.
숭고한 희극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영웅’에 적합한 미학의 범주는 숭고다 숭고가 크기라는 것쯤은 이인 화도 본능적으로 안다.
박정희를 숭고하게 만들고 싶었던 이인화 그래서 그는 박정희의 사 이즈를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개구리의 항문에 호스를 꽂고 펌퍼질을 하면 개구리의 부피가 좀 늘어나긴 하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개구리를 황소로 만들 수는 없다.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다.
자기 상상력이 만들어낸 우상 앞에서 숭고를 느끼는 건 작가의 자유다
퉁퉁 불어 오른 개구리의 모습에서 ‘희극성’을 느끼는 건 독자들의 자유다.
이렇게 서로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데에 민주주의의 ‘아름다움’이 있고 이 ‘아름다움’을 짓밟았던 데에 박정희 파쇼정권의 ‘추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
리고 이 ‘추함’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데에 20세기 말 느닷없이 등장한 우리 국가주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변태성’이 있다.
갑자기 부상하는 죽은 독재자에 대한 사랑 이 정치적 네크로필리아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칼 마르크스는 어디선가 “역사는 두 번 반복 된다”고 말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는 왜 희극으로 끝나는 걸까?
“과거와 명랑하게 작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세기말에 벌어진 이 소극을 바라보며 과거와 명랑하게 작별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해체적 글쓰기
요약하자. 첫째, 이인화는 제 영웅을 정당화하려는 “열망”에서 일상 언어의 문법을 무시한다.
둘째, 그는 텍스트를 늘 거꾸로 읽는 이상한 도착증을 가지고 상식을 무시한 엉터리 인용을 서슴지 않는다.
셋째, 그가 박정희를 옹호하는데 동원하는 논리는 신학적 형식에 파시스트적 내용이다.
넷째, 박정희 서사시에 어울리는 미학적 개념은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다
이로써 나는 철학적 미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동어반복의 진리를 상기 시켰고 이 공리를 부정할 때
언어소통이 불가능해짐을 시사했다.
그 밖에도 나는 이인화의 몰상식의 원인을 설명하는 두 가지 가설을 제시했고 아직 자기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그의 실존적
고민의 해소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써 나는 이인화가 ‘숭고’하게 부풀린 개구리의 배에 상승기 부르주아의 무기였던 ‘풍자’의 바늘을 지르고 거기서 나오는 김새는 소리를 들으며 독자와 함께 과거의 망령과 명랑하게 작별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원래 나는 여기서 ‘상상’에 실릴 예정이었던 이글이 여기에 실리게 된 경위를 우리 국가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사용하는 도착증적 논리에 따라 얘기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 인격의 성숙함은 ‘상상’ 편집위원회가 애초의 약속을 깨고 내 글을 검열해서 삭제해 버렸다고 해서 이를 대주들에게 공개하는 그런 옹졸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이 아무 납득할 만한 이유도 대지 못하고 공식해명을 요구하는 애 요청을 거부했다는 사실도 그냥 비밀로 접어두련다.
또 이들이 내 원고를 삭제한 실제 이유가 “독자들이 이 글을 읽으면 ‘쟤들 놀고 있네’할 게 아니냐”는 편집위원회의 예리한 판단에 있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그들을 난처하게 할 만큼 내가 남의 처지를 배려 못하는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세상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나의 개인적 윤리관을 국가주의자들에게 까지 권고할 권리는 내게 더더욱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불쾌한 경험을 이 한을 혼자 마음속에 간직한 채 그냥 무덕으로 가져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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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별다른 이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