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부 내포 성지 서짓골 축성 봉헌식이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마리 서짓골에서 거행되었어요.
하부 내포 성지 서짓골 축성 봉헌식에는 천주교 대전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 대전교구 사제단 신부님, 대전교구 천주교 신자, 이시우 보령시장과 관계관, 보령시민 등약 800명이 참석하여 성 루카 위앵 신부, 성 안토니오 디블뤼 안돈이 주교, 성 베드로 오메트로 오 신부, 성요셉 장주기 등의 네 분 성인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서짓골 축성 봉헌식이 성대하게 이루어졌어요.
하부 내포 성지 서짓골 축성 봉헌식이 있기까지의 공이 많은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로 243 만수리 공소의 윤종관 신부님과 이시우 보령시장을 잊을 수 없고. 근거리 성당의 교우님들의 봉사, 대전교구 교우님들의 지원 또한 잊을 수가 없어요.
서짓골에서 병인년에 있었던 일
1866년(병인년) 3월 30일(음력 2월 14일)에 갈매못에서 세 분의 성직자와 두 분의 평신도 지도자가 순교하신다. 그날은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이었다. 그 순교하신 영광의 주인공 다섯 분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당시 조선교구장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님,
젊은 선교사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님과 루카 위앵 신부님,
그리고 교구장 주교님의 비서 역할을 하신 루카 황석두 회장님,
배론 신학교 건물을 제공하시고 신학생들을 돌보시던 요셉 장주기 회장님 이시다.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다섯 분 성인의 머리를 사흘 동안 장깃대에 매달았다가 그 몸과 함께 아무렇게나 모래밭에 군인들이 묻었다. 이에 황석두 성인의 조카이자 양자인 황천일(요한)이 주선하여 황기원(안드레아) 등의 가족들이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거두어 홍산 삽티에 안장하였다.
나머지 네 분 성인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그러자 장주기 성인의 아들 장노첨이 청양 다락골의 신자들에게 가서 협조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하고 ‘서짓골’의 신자들에게 찾아간다. 그때 ‘서짓골’에 살던 이 바오로와 그 아들 이치문(힐라리오)의 형제 가족들이 선뜻 나서서 네 분의 순교자 시신을 갈매못에서 가까운 곳에 1차 은밀히 암장한다.
그러나 그 암장묘를 산짐승들이 해칠 우려 때문에 안전지대로 모시기로 한다. ‘도앙골’에 사는 김순장(요한 금구)을 만나 의논이 되어 그로부터 경비를 충당 받고, 멀리 공주 국실(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에 사는 신 회장과 이치문 가족들의 추렴을 보태서 세낸 선박으로 웅천천 하구까지 이동한 다음에 육로를 통하여 ‘서짓골’의 이 바오로 집 뒤 담배 밭에 안장하게 되었다. 그 이장 작업은 무려 15일 가량을 요하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안장 과정은 순교성인들께서 목숨을 바치신 지 두 달이 지난 그해 4월 8일(양력 5월 21일) 이후의 일이었다. 서짓골의 이 바오로 가족들과 도앙골의 김순장(요한 금구) 등 그들이 목숨을 걸고 비장한 각오 하에 조각배로 험난한 해로를 선택하여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열흘 가량 밤 시간을 이용하여 폭풍으로 침몰의 위험을 모면하면서 노를 저어 웅천천의 완장포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완장포에서부터는 밤 시간을 이용하여 그 순교 성인 네 분의 시신을 들쳐 업고 시오리 산길을 넘어 ‘서짓골’(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모셔 안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47년이 지난 올해 2013년이다.
그 네 분의 순교성인들....
1882년에 그 유골들만 수습 되어 지금은 서울 명동 성당과 절두산에 모셔져 있고....
진토 되어 흙덩어리와 뒤섞인 그분들의 살과 피는....
저 사진의 잡목들 뒤엉킨 이곳에 147년간 그 외치는 소리만 들립니다.
(이글은 윤종관 신부님이 작성한 글입니다.)
하부 내포 성지 서짓골 축성 봉헌식 이모저모를 동영상으로 편집하여 올립니다.
첫댓글 11월 첫날 "순교로 목숨바친,,,"성가도 성스럽고
"榮光爲主治命"글이 가슴에 박히는 아침입니다.
"주님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이렇게 해석되네요.
좋은 그림,글,성가 감사합니다.
이 달 한 달 거룩한 달되세요.
영상편집 잘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사진이 기대에 이르지못했어요, 화창한 날인데 주변 여건이 좋지 않았어요, 역시 순교자 지역이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