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생각 없이 살아갈 때 악은 다가온다
◇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1906-1975)
악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식해 ‘악의 평범성’에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악의 평범성’은 독일 태생 유대인이자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개념이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 교수가 된 그녀는 나치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한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아이 히만이 괴물이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가정적인 지극히 평범한 사 람이라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악의 평범성’은 겉보기에 악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 집단에 동조해 아무 생각 없이 사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자신은 그냥 시키는 대로 또는 남들을 따라 했을 뿐이라고 무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즉 스스로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생각 없이 살면서 책임을 피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렌트는 최종적으로 악의 근원이 사유(思惟)하지 않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선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 다들 모른 척할 때 외면하지 않고 나설 줄 아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때로는 좋지 않은 기미를 미리 알아차리기 때문에 까다롭거나 예민한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다.
쓸데없이 나서서 손해 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소한 일에 옳고 그름을 따지고 집착하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다들 모른 척하기에 나서는 것이다.
현실은 선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닐 수 있으나 선을 지향하는 삶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융은 선과 악 중에 어느 것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고 하면서 선이 더 적절해 보이기 때문에 선이 지배해 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심각한 문제가 불 보듯 뻔하다는 전문가들의 우려에도 고위직 공무원 J는 개정된 법안의 시행을 고집한다. 개정안은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본인은 결과에 책임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역할은 개정안에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통과된 개정안을 시행하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결국 개정안 시행으로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전문가들이 경고한 문제점이 원인으로 지적되나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J의 경우가 악의 평범성의 한 예가 될 수 있다. J는 아무 생각 없이 늘 하던 대로 행동한 것뿐이다. 실제 문제가 발생해도 적당히 땜질하고 드러나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근본 문제를 해결 하는 일은 너무 번거롭고 복잡한 일이라 골치 아프게 자처할 이유가 없다.
J의 말 대로 본인이 혼자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진실을 파악하고 알릴 의무는 있다. 젊은 시절 미셸 푸코에 심취해 철학을 공부하고 사회 정의를 외쳤다고 자랑하는 J의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겸손하고 온화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던 S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기업체의 장(長)이 되었다. 조직을 운영하는데 옳고 그름의 원칙이나 규정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수 의견이 중요하고,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다수 의견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 의견이라는 점이다. 결국 다수 의견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가 판단의 기준인 셈이다.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나 매우 자의적이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원칙이나 규정을 따지면, 잘난 척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우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멀리한다. 조직에서는 무능해도 무조건 S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이 득세한다. 그간 겸손한 S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둘 멀어지지만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S의 사례와 같이 권력을 쥐게 되면 숨겨진 문제(그림자, 열등한 부분)를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S의 겸손하고 온화한 이면에는 열등감 또는 부적합한 느낌이 숨겨져 있다.
어쩌다 장이 되었으나 스스로도 자신이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인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 러나 S는 오히려 확신에 찬 사람처럼 행동하며 조언을 하거나 비판적 의견을 내세우며 자신의 의구심을 건드리는 사람을 견디지 못한다.
높은 자리에 오르자 위원회를 방패막이로 삼아 더 이상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사회적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무엇이 소중한지 가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의 무능을 감추고, 가치 판단을 제대로 못 하는 리더는 결국 조직에 피해를 주게 된다. 조직 구성원에게 원칙이 없는 인사 문제는 작은 일 같지만 누적되면 큰일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리더가 되기 전에는 그의 무능이 드러나지 않는데 있다. 겉보기에 겸손하고 온화한 사람의 무능은 권력을 쥐면 악이 될 수 있다. <계속>
글 | 김창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