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구의 묘는 예산군 대흥면 대율리 산18-1번지에 있다.할아버지는 형조판서를 지낸 조계원이고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조사석이다. 본인은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사촌 조태채와 조태억은 각각 좌의정을 지냈으니 그야말로 양주조씨의 전성기라 할만하다. 하지만 인생사는 전성기가 있으면 기우는 때도 있으니 그가 죽은후 그의 집안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만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의 뒤를 받치던 그였으나, 영조가 즉위한후 그의 처와 딸 며느리는 모두 관노가 되고 그의 자식과 손자는 모진 고문끝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참으로 비정한 것이 정치라지만 그의 가문은 한마디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만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라 잔뜩 기대하고 갔다. 그런데 여러가지면에서 실망스러웠다. 주산은 문필봉으로 아름답고 안산은 일자문성이니 그야말로 아름답다. 겉모습은 그럴싸하였으나 혈을 맺지 못하였으니 그야말로 속빈강정 즉 허화(虛花)라는 것이다. 용진처에 혈을 맺는 법인데, 앞쪽에 용맥이 길게 뻗어 있어 용이 멈춘 흔적이 없다. 그렇다고 기룡혈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바로 과룡처에 자리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한편으로 역시 풍수는 무섭도록 정확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내재된 정치상황이 터지면서 나타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해석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풍수 때문이라기 보다는 정치상황이 한 집안을 몰락시켰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맘이 크다.
첫댓글 지난 세월이지만 안타까운 정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