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욥9:11~24
11.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13.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14.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17.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19.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20.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21.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22.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24.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설교>
욥은 그 행위에 있어서는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그래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면 악에 떠난 자라는 평가로 욥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지금의 기독교의 시각과 기준에서 보자면 욥이야 말로 복을 받아야 할 신자입니다. 하지만 욥이 완전 다음에 다가온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엄청난 재앙입니다.
이 같은 욥의 인생을 보면서 반드시 바뀌어져야 할 신앙의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아무리 완전할 것 같은 신앙 행위라 헤도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성공적인 인생을 약속하고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욥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욥 이야기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시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처음부터 갑절이나 주셨다는 것에 초점을 둠으로써 욥이 겪은 모든 일이 갑절의 복을 주시기 위한 것으로 결론 내리면서 욥이 잘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욥처럼 하면 복 받는다’는 신앙과 무관한 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욥이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이 찾아오시기까지의 내용을 보면 잘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과 인생에서 겪는 재앙이라는 문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지만 욥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하나님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욥에게 갑절로 주신 것은 욥의 행위와 무관한 것이며, 이것은 모든 것을 잃고 재앙을 겪는 것 또한 욥의 행위와는 무관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잘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에 의해 발산되는 막연한 기대이고 헛된 환상일 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빌닷의 말을 들은 욥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욥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은 인간은 낮추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는 말로 시작해서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12절)고 말하는 것이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19절)는 말들에서 하나님의 강하심과 함께 인간은 나약한 존재일 뿐임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욥의 말은 당연한 것이고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욥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재앙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말하면서 인간으로서 감히 대항할 수 없으며 빼앗으시면 빼앗길 수밖에 없는 자기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보면 욥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기대조차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욥은 자신의 실상에 대해 막막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상황이 죄 때문이라는 친구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욥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욥의 처지가 된다 해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게 되지만 단 한 번도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히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면 어려움이 있을 때 분명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답답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의 힘든 상황에 지속이 되면 절망에 붙들려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오해하는 것은 인생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답답함에서 벗어나서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문제들에게 부딪히게 하시면서도 그 이유를 말씀해주지 않습니다. 또한 설령 이유를 안다 해도 모든 극복해 나가게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힘든 문제가 있으면 대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마음에 두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되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힘든 일이 있게 하신 이유가 더 좋은 것, 큰 복을 주시기 위한 것이 되기를 기대하는 막연한 희망을 담은 기도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물을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말하지만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에 대해서는 불만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뭔가 이해하고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재난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일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일이 잘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고 불만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을 믿는 내가 가난하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보다는 가난한 나에게 돈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자기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나의 주인이시다고 말하면서도 내 입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욥 38:26,27절에 보면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보면 비가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곡식이 자라는 곳에 비가 풍족하게 내려야 합니다. 가뭄이 있는 곳에서 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곡식이 있고 가뭄이 지속되는 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사람 없는 땅, 황무한 땅에 비가 내릴 때도 있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입장에 있다면 하늘을 향해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따라 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기준을 따라 일하신다면 욥은 재앙을 겪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행위가 완벽했던 욥에게 재앙이 내림으로써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으로는 알 수 없는 분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가뭄이 있는 곳에 비가 내리지 않고 황폐한 땅에 내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인간은 가뭄으로든 무엇으로든 망해야 하는 존재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황폐한 땅에 비가 내린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욥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인생이 망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온전함을 붙들고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20,21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는다 해도 그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부딪히는 문제에 대해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보면서 우리 안에 굳어지는 것은 우리는 행위와 상관없이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존재가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 자체가 반칙입니다. 그렇게 반칙을 행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조금씩 더듬어 간다면 위로는 하나님으로 온다는 것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