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식성이다.
동물 대부분은 뭔가를 먹었을 때 쓰거나 매우면 뱉어내고 다시는 먹지 않는다. 사람 역시 처음엔 거부 반응을 보이지만 몸에 별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몇 차례 경험하다 보면 거꾸로 이런 맛을 찾기에 이르기도 한다.
커피(쓴 맛)와 낙지볶음(매운 맛)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중국과학원 연구자들은 남중국을 포함한 동남아 일대에 서식하는 작은 포유류인 나무두더지 한 종(학명 Tupaia belangeri chinensis)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우연히 고추를 줘봤는데 한 번 맛보고 피하는 대신 맛있게 먹었던 것이다.
나무두더지가 사람처럼 본능을 극복하고 매운 맛에 매료된 건 아닐 텐데 어찌 된 영문일까.
나무두더지는 영장류에 가까운 포유류로 약 9000만 년 공동조상에서 갈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동남아 넓은 지역에 서식하는 나무두더지 한 종(사진. 학명 Tupaia belangeri chinensis)이 매운맛에 둔감한 이유가 밝혀졌다. ⓒ MA XIAOFENG
새들은 매운 맛에 둔감
매운 맛은 TRPV1이라는 수용체 분자가 감지한다. 원래 이 수용체는 열과 통증을 감지하는게 본업이다.
즉 주위 온도가 42도를 넘어서면 TRPV1의 구조가 바뀌면서 ‘뜨겁다’는 신호가 뇌로 전달된다. 동시에 통증 신호도 가므로 불쾌함을 느낀다.
그런데 고추에 들어있는 캅사이신(capsaicin)이라는 분자가 TRPV1에 달라붙어 구조를 바꿔 신호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낙지볶음이나 짬뽕을 먹을 때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는 이유다. 우리는 입안에서 불이 나고 얼얼한 상태를 ‘맵다’라고 표현한다.
흥미롭게도 새의 TRPV1에는 캅사이신이 잘 달라붙지 않는다. 따라서 새는 고추처럼 매운 열매도 잘 먹는다. 이런 차이는 포유류와 조류의 TRPV1 구조가 꽤 다르기 때문이다. 새는 체온이 포유류보다 4도 정도 높은 40~44도이기 때문에 TRPV1이 활성화되는 온도도 46~48도로 그만큼 더 높다. 즉 세팅 온도의 차이는 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고추가 포유류의 TRPV1에만 달라붙는 캅사이신을 만든 이유가 포유류는 쫓아내고 조류를 선택해 씨를 퍼뜨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추씨가 포유류의 장을 통과할 경우 손상돼 싹이 나지 못하는 반면 조류의 배설물에 섞여 땅에 떨어지면 발아가 잘 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나무두더지의 경우 TRPV1의 세팅 온도가 다른 포유류와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왜 캅사이신에는 둔감할까.
연구자들은 나무두더지의 TRPV1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분석해 지금까지 알려진 TRPV1의 아미노산 서열과 비교해 차이를 살펴봤다.
위는 생쥐의 TRPV1에 캅사이신이 달라붙은 부분을 클로즈업한 이미지다. 캅사이신 분자(가운데)가 551번째 아미노산인 트레오닌(T551)과 수소결합(빨간 점선)을 이뤄 안정한 상태로 있다. 아래는 나무두더지의 TRPV1에 캅사이신이 위치하는 경우로 생쥐의 T551에 해당하는 579번째 아미노산이 메티오닌(M579)이라 수소결합을 만들 수 없고 따라서 쉽게 떨어진다. ⓒ 플로스 생물학
그 결과 나무두더지는 캅사이신이 달라붙는 자리에 위치한 579번째 아미노산이 메티오닌(M)인 반면, 비교한 포유류 22종은 모두 트레오닌(T)이었다.
연구자들은 이 차이가 캅사이신 결합력의 차이를 낳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세포 실험으로 결합력을 조사했다.
그 결과 TRPV1 절반이 활성화되는 시점의 캅사이신 농도가 5.2마이크로몰농도(μM)로 생쥐 TRPV1의 0.2μM보다 26배나 더 높았다. 그만큼 둔감하다는 얘기다.
연구자들은 민감도 차이가 정말 579번째 아미노산의 차이 때문이지 알아봤다.
즉 이 부분의 아미노산 서열을 M에서 T로 바꾼 나무두더지 TRPV1 단백질을 만들어 결합력을 조사했다.
그 결과 생쥐의 TRPV1보다도 캅사이신이 더 잘 달라붙었다(0.1μM).
반면 생쥐의 TRPV1 단백질에서 이 부분에 해당하는 551번째 아미노산을 T에서 M으로 바꿀 경우 캅사이신의 결합력이 뚝 떨어졌다(2.1μM).
즉 나무두더지는 사람처럼 취향이 본능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새들처럼 매운맛을 잘 못 느끼기 때문에 고추를 먹은 것이다.
그런데 고추가 동남아시아에 소개된 건 300여 년에 불과하다.
한편 동남아 다섯 지역에서 생체시료를 채취한 야생 나무두더지 155마리 모두 TRPV1위 579번째 아미노산이 메티오닌이었다.
즉 이 변이가 나무두더지 종에 고정된 상태로 수십만 년 이상 걸리는 과정일 것이다. 고추에 적응하도록 진화한 결과는 아니라는 말이다.
서식지 식물 열매 먹을 수 있게 진화
그런데 사실 캅사이신만 TRPV1에 달라붙는 게 아니다. 후추의 피페린(piperine), 생강의 진저롤(gingerol)과 쇼가올(shogaol)도 TRPV1에 결합해 뜨거운 고통을 안겨준다. 따라서 포유류 동물들은 고추뿐 아니라 후추와 생강도 피한다. 연구자들은 나무두더지와 서식지가 겹치는 후추속(屬) 식물 한 종(학명 Piper boehmeriaefolium)에 주목했다. 열매가 상당히 매운데도 불구하고 나무두더지가 즐겨 먹기 때문이다. 열매의 성분을 분석하자 캅사이신과 구조가 비슷한 분자가 발견됐고 이를 캅2(Cap2)라고 이름 지었다. 캅2가 TRPV1 절반을 활성화시키는 시점의 농도를 조사하자 나무두더지는 1.9밀리몰농도(mM)로 생쥐의 0.74μM보다 무려 2500배 가까이 더 높았다. 사실상 이 열매에서 매운맛을 못 느낀다는 말이다. 아미노산을 바꿔치기하자 나무두더지는 2.3μM로 1000분의 1 수준으로 뚝 떨어졌고 생쥐는 151μM로 200배 더 높아져 민감도가 완전히 역전됐다.
A. 동남아시아에 자생하는 후추속 식물 한 종(학명 Piper boehmeriaefolium. 이하 pb)의 모습이다. B. pb(가로선)와 나무두더지(T. belangen. 빨간색)는 분포지역이 겹친다. C. 나무두더지(tree shrew)는 유독 이 식물(piper)을 좋아하고 고추(chilli pepper)도 좀 먹지만 생쥐(mouse)는 둘 다 피한다. 한편 마늘(garlic)과 생강(ginger)은 둘 다 피한다. D. pb에는 캅사이신과 비슷한 분자(캅2)가 들어있다. 나무두더지는 캅2의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게 진화해 pb을 먹이로 삼는 데 성공했다. ⓒ 플로스 생물학
이를 바탕으로 나무두더지 TRPV1의 진화를 재구성해보자.
수십만 년 전 어쩌면 수백만 년 전 유전자 돌연변이로 TRPV1의 579번째 아미노산이 트레오닌에서 메티오닌으로 바뀐 변이 단백질이 나왔고 우연히 부모 양쪽에서 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은 개체가 태어났을 것이다.
이 개체는 캅2에 대해 1000배나 둔감해졌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이 식물의 열매를 마음껏 먹었고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 결과 어느 순간 종 전체에서 유전자가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추의 캅사이신은 캅2와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1000배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50배 정도 둔감해 나무두더지가 고추를 먹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나무두더지가 사람처럼 본능을 극복하고 매운 고추에 대해 취향을 갖게 된 것으로 밝혀졌으면 정말 충격적인 연구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