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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속에서 과거를 구출하기
---김새하의 [도망칠 수 없다면,]의 시세계
임지훈
먼 옛날 사람들은 세계가 완전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 세계가 이루는 절묘한 균형 상태를 ‘조화’라고 부르며, 완전성의 근거로 삼았다. 세계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해석이다. 우리가 살아온 이 세계에서, 대개의 신화는 이와 같은 완전성을 배경으로 만들어진다. 질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혼돈의 바다로 은유되는 무질서의 현실로부터 강력한 일자가 필연적으로 출현하고, 그 일자를 중심으로 세계는 고유한 질서에 기반을 둔 균형성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 신화들의 주된 골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와 같은 신화들이 대개의 경우 그 균형성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그리하여 세계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불안한 형세가 되었는가를 서술하며 끝이 난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개의 신화들은 최종장에서 어째서 그와 같은 강력한 일자가 현실 세계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왜 인간은 그토록 안온했던 균형 잡힌 질서의 세계로부터 지금과 같은 불안하고 피투성이의 현실로 추락하게 되었는지, 조화의 시대가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신화들은 이 세계가 질서와 균형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세계라는 것을 설명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효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이 세계가 질서와 균형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것임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우리는 현실의 불완전함을 목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신화의 효과는 명백하다. 그것은 질서와 균형이 모두 과거에 불과해져 버렸으며, 우리는 더 이상 그와 같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이 조화를 잃어버린 불안한 세계 속에 내던져졌다는 사실이다.
세계가 완전하다는 믿음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가 현실의 피할 수 없는 불완전성을 직면하게 만드는 이 역설적인 효과.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완전함의 내부도 아니고, 불완전함의 내부도 아니다. 완전함에 대한 믿음과 그리움이 내재된 불완전한 대지, 그것이 바로 오늘날 모든 인간이 선 지평이다. 때문에 모든 시인은 두 눈으로 서로 다른 풍경을 바라본다. 완전성이 손짓하는 그리운 과거와 불완전함에 내맡겨진 불안한 현재. 우리가 김새하의 시를 읽으면서 모종의 불안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에 따른 회고의 정서를 맛보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민들레 홀씨를 날려 보내는 요정이 꽃잎을 떼어먹는 요정에게 이야기한다 언젠가 흰 동백꽃 속에 사는 사슴을 만나러 갈 거라고. 그곳에 앉아 나비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날개를 비비면 물고기가 날아올라 비늘로 별을 만들 거라고. 내가 혹시 돌아오는 길을 잃어도 몇 년 전에 심어놓은 재스민 향기를 따라 돌아올 수 있을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우린 다시 만날 수밖에 없기에 나는 말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민들레 홀씨를 불고 나무가 자라는 소리를 자장가 삼을 수 있었다고. 아기코끼리가 어른 코끼리가 되는 정도는 엄마 기린이 아기 기린을 돌아보는 정도의 짧은 시간이라고. 눈은 녹지 않아 노을에 계속 물들 수 있으니까 나는 외롭지 않다고
하늘을 가장 크게 한 바퀴 도느라 늦어지는 너를 기다리며 풀밭에 엎드린 나는 홀씨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고. 아침에는 아침에 피는 꽃의 소리를 귀에 걸고 저녁에는 저녁에 피는 꽃의 소리를 귀에 걸고 너를 기다리는 일은 나에게 아주 쉬운 일이라고
태양이 다가오면 휘어지는 나무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바람이 흘려놓은 그림자를 어디에서 주워야 하는지 알 수 있어서 가끔 그곳에 너의 흔적이 편지처럼 적혀 있기도 하다고. 가끔은 달이 먼저 너를 보았다는 거짓말을 적어 놔서 내 날개 안으로 들어가 울기도 하지만 나의 울음소리에 급하게 돌아오는 바람을 따라 비가 내리기도 해서 네가 젖을까 봐 울 수가 없다고
- 「요정의 이야기」, 전문
「요정의 이야기」라 이름 지어진 이 시에서 시인은 하나의 신화적 세계를 구성한다. 그곳은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요정들의 세계이고, 이 세계는 요정들의 의지와 바람으로 이루어진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요정들의 삶은 겉보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혹은 잃어버린 하나의 유토피아적 세계관에 대한 상상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지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시가 사실에 대한 명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요정들의 바람과 당부, 위안 섞인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민들레 홀씨를 날려 보내고 꽃잎을 떼어먹고, 때로는 사슴을 만나러 가기도 하고 별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이 요정들의 우화는 그래서 겉보기엔 어떤 평안과 조화로운 심상을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심상이 아름답게 느껴질수록 그것을 읽어내는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 또한 느끼게 된다. 여기에 새겨진 말들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사정은 더욱 더 명확해진다. 이 시는 총 3개의 층위로 구성되는 데, 하나는 일어난 사실에 대해 회고하는 과거에 대한 말들이다. 예컨대 “하늘을 가장 크게 한 바퀴 도느라 늦어지는 너를 기다리며 풀밭에 엎드린 나는 홀씨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와 같은 부분들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이 시적 진술이 이루어지는 현재의 시간대인데, 이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두 요정의 양태를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그것은 미래에 대한 것이면서 동시에 의지와 약속의 말들이다. 가령 “내가 혹시 돌아오는 길을 잃어도 몇 년 전에 심어놓은 재스민 향기를 따라 돌아올 수 있을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나 “눈은 녹지 않아 노을에 계속 물들 수 있으니까 나는 외롭지 않다고”, 혹은 “아침에는 아침에 피는 꽃의 소리를 귀에 걸고 저녁에는 저녁에 피는 꽃의 소리를 귀에 걸고 너를 기다리는 일은 나에게 아주 쉬운 일이라고”와 같은 말들. 아이러니한 것은 이와 같은 말들이 과거의 말들이 구성해내는 신화적이며 조화의 경험에 기반한 말들임에도, 실제 발화된 말의 효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산출해낸다는 사실이다. 마치 그것은, ‘요정’으로 통칭되는 이 세계 속 존재의 미래가 결코 그렇게 이루어지지는 않으리라는 불안이다. 예컨대, 이 신화적 세계에 대한 시인의 누설에는 그것이 깨어지고 흐트러지는, 불완전함이 엄습해오는 순간이 곧 다가오게 되리라는 불안이 곁들어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시가 만들어내는 효과란 생각보다 복잡하다. 단지 이상적인 공간에 대해 말하고 있을 따름인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요정’이 하는 말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이 세계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한정적인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즉, 우리는 영원히 이 조화로운 완전성의 세계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안한 예감은 한편으로 「아힘사」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에서 변주되며 독특한 미감을 구성해낸다.
서로 생리대를 빌려주고
연애편지 보여주던 날이 옅어지기 시작한다
활을 누가 먼저 들었든가
화살이 떠난 활엔 상처가 남지 않는다
상처는 온전히 과녁의 몫
활은 과녁의 상처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도 연고가 되지 못할 때가 있으니 넣어두렴"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흉터를 지우라는 재촉
더 깊이 후벼 파면서 넌 어딜 보고 있니
눈치 빠른 아이야
네가 볼 수 없는 네 눈동자를 내가 보고 있단다
비명만큼 작아진 공명의 속삭임
비워진 주전자에서 흐르는 빗소리
목 조를 손을 준비하는 작곡이 시작된 것을 숨긴 우리
감아버린 눈이 철길을 걷는 동안
잃어버린 거짓말을 찾으러 간다
거기 네가 쪼그리고 있을까
- 「아힘사」, 전문
위에서 설명한 구도와 유사하게, 「아힘사」 역시 평화로운 과거에 대한 진술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 시는 위의 「요정 이야기」와 달리 보다 직접적으로 현재에 대해 묘사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진다. 예컨대 「요정 이야기」가 조화로운 과거로부터 곧 다가올 불안한 미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아힘사」는 조화로웠던 시절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 속에는 “서로 생리대를 빌려주고/연애편지 보여주던 날들”로 비유되는 경험적인 상호적 시간이 있고, 그로부터 역설적으로 펼쳐진 상처의 시간이 현재에 놓여있다. 이제 존재의 상호적이며 조화로운 시간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고, 그 뒤에 놓여진 ‘나’의 시간이란 서로가 서로를 겨누고 상처 입히는 무질서한 시간이다.
여기에 대해 시인은 「아힘사」란 제목을 지어둔 것에 유의하자. 그것은 “생물에 대한 비폭력·불살생·동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밝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의 내용이 그와 같은 태도가 실현될 수 없는 현실을 다루고 있음을 알고 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제목은 이중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데, 그것은 「아힘사」가 불가능한 현실의 비극성을 강화하는 것과 반대로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도 「아힘사」를 실천하겠다는 불가해한 의지가 그것이다. 예컨대, 서로가 서로를 겨누고 목을 조르는 비정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거짓말을 찾으러”, 그리하여 “거기 네가 쪼그리고 있을까” 물으며 겁에 질린 ‘너’를 찾으러 가는 화자의 의지가 바로 그것이다.
세면장에서 비누를 질기게 갉아먹는 생쥐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떼
가르랑 거리는 소리는
화장대를 딛고 쌓아 놓은 빈 상자를 지나
창틀을 딛고 선다
어느 날의 밤까지만 해도 J는 쾅쾅거리는 소리에
머리가 아프다고 집 안을 서성였었다
숲 속처럼 고요한 내 눈 속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눈빛을 맞췄었다
J는 물속으로 꽃잎 속으로
아니면 단지 아주 먼 곳으로
부드러운 가슴털에 손을 묻으면
새소리와 눈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었다 그렇게 사라진 J
하늘과 지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창틀에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
위자료로 받은 도시 풍경을 함께 볼
필요나 이유가 없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으로
밤낮을 채운다
지루한 털은 고양이가 되어 여기와 저기로 떠돈다
무엇에 매달려야 할까
- 「창문에 서는 이유」, 전문.
김새하의 이번 시집에서 ‘너’라는 존재는 자주 화자에 의해 호출되어 시적 무대 위에 놓인다. 대개의 경우 ‘너’는 이미 사라진 상태이며, ‘나’는 그런 ‘너’를 향한 그리움을 여러 오브제를 통해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위의 시도 마찬가지인데, 거기에는 현실의 일상적 피로를 토로하며 “도망가고 싶다고 눈빛을” 맞추던 연약한 존재로서의 ‘너’가 등장한다. ‘나’는 그런 ‘너’를 현실로부터 지키지 못했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렇기에 돌아올 수 없게 된 존재 ‘너’를 끝없이 기다리며 “밤낮을 채운다”. 이 속에서 ‘나’가 느끼는 것은 고양이의 존재 양태로 비유되어진 “무엇에 매달려야 할까”라는 불안의 정서이다.
얼핏 보기에 이 시는 단지 상실한 대상에 대한 우울감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자는 ‘너’인 “J”가 “물속으로 꽃잎 속으로/아니면 단지 아주 먼 곳으로” 사라졌다고 기술하고 있으면서 기약 없이 ‘너’를 기다리는 것으로 자신의 하루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처럼 기다림으로 채워진 ‘나’의 삶은 한편으로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여기에서도 김새하의 시는 전혀 역설적인 효과 또한 이끌어낸다. 그것은 이와 같은 기다림이 시적 무대 위에 이미 사라진 존재인 ‘너’를 존재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즉, 현실에서 사라진 ‘너’는 이와 같은 ‘나’의 기다림과 시적 호명 속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기다림을 과연 마냥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코 타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 기다림과 수동성이란 의지적인 것으로서 현실 속에서 사라진 ‘너’를 과거로부터 구출해 현재에 존재하게 만드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김새하가 쓰는 시의 독특한 미감과 개성이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전함에 대한 믿음과 그리움이 내재된 불완전한 대지에 놓여 있으며, 그렇기에 시인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두 풍경을 눈에 새긴 채 살아간다. 이것을 시인의 보편성이라 말할 수 있을텐데, 때문에 대개의 시인은 완전성이 손짓하는 그리운 과거와 불완전함에 내맡겨진 불안한 현재 속에서, 과거에 무한한 지위를 부여하여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적 태도를 견지하곤 한다. 물론 그와 같은 태도를 좋다/나쁘다와 같은 이분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에 대한 관점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면, 그것이 결코 참신성을 내포하고 있다 말하기엔 저어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보자면, 김새하가 이와 같은 시편들을 통해 산출해내는 이중적인 효과는 조금 더 주목을 요한다. 예컨대, 그 또한 과거에 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하면서 현실의 비정함에 대해 말하고 있기는 하나, 그로부터 역설적으로 미래를 향한 의지를 강력하게 피워올린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김새하의 진술법이란 과거를 회고하며 돌아가자 손짓하는 일련의 서정시인들과는 달리, 비참하고 잔인한 현재 속에서 과거를 구출해내고자 시도하고 있다고 평해볼 만하다. 즉, 조화로웠던 나날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라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며, 그러니 과거로 돌아가자는 회고주의적 성격을 띄는 것도 아닌, 현재 속에서 쪼그라진 과거를 미래의 지점으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정 이야기」에서 시적 화자가 드러낸 의지적인 어투이며 내용과 배치되는 「아힘사」라는 제목이 만들어내는 효과이자 「창문에 서는 이유」의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조그만 섬이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공문서 받았다
외롭게 떠 있는 섬이 아니게 되고
바라만 보던 입장을 변경하고
기다림의 끝이 있을 줄 몰랐지만
짐작 못 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일 년에 두어 번 오는 태풍보다 설렌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를 잡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 잡고 있는 일
운동화를 걱정하면서 파도 가까이 발을 옮기는 일
섬에서 차 빼달라는 전화를 받는 일
바지락이 띄엄띄엄 박혀있다
하나 또 하나 둘 셋
갈매기의 눈을 꿴 가로등이 빛을 흘릴 때
귀를 막은 이어폰
호주머니에 찌른 손
까딱거리는 머리
흔들리는 어깨
걸음만큼 멀어지는
노래처럼 흩어지는
끊임없이 잊어야 하는 그런 일들
밤바다 사진 속 네 개의 불빛
비슷한 위치에 비슷한 크기지만
둘은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하고
둘은 새벽만 기다린다
둘은 배를 기다리고
둘은 길을 비춘다
바다 건너 바다로
기다림에 끝이 있다는 소식이 온다
- 「학림도」, 전문.
과거를 구출하여 미래의 지점으로 전환시키는 것.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손쉬운 일이라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수반되는 기다림이란 존재에게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예컨대 기다림이란 과거가 되어버린 존재를 미래에 다가올 사건으로 재구성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기다리는 자의 현재를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위해 온전히 걸어야 한다는 대가를 요구한다. 이것은 단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층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기다림이란 단지 내가 여기에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소망하는 대상이 언제고 이곳에 다가올 수 있도록 그를 위한 빈자리를 마련하는 진행형의 과제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자는 그를 위해 늘 빈자리를 마련해둔다. 이와 같은 빈자리는 그 자체만으로 ‘나’에게 유구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한편, 그 대가로 상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그로인한 통증을 발생시킨다. 그러니 기다림이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상실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능동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김새하의 시 「학림도」의 마지막 구절 “바다 건너 바다로/기다림에 끝이 있다는 소식이 온다”는 것은 이와 같은 유구한 기다림이 전제될 때 비로소 들려오는 아스라한 사건의 예감이다. 그것을 위해 김새하의 시적 화자는 늘 현실을 걸고 과거를 구출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러니 이 시집에서 우리는 조화로운 과거로 말미암은 슬픔을 느끼며, 비정한 현실이 배태한 잔혹성에 슬퍼하면서도, 다만 그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의해 구출되는 과거를 비로소 목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김새하가 거듭 시를 써나갈 수 있는, 잔인하고 비정한 현재의 시간과 겨뤄나갈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즉, 과거를 다만 과거인 채로 내버려두지 않고 언제고 다시 다가올 미래의 사건으로서 구출해내고 말겠다는 의지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며 다만 언제고 이 기다림이 끝나리라는 것에만 주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는 늘 현실적 존재의 희생과 통증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만 과거는 다시 구출되어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현재 속에서 과거를 구출하는 방법이며, 우리의 미래가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님을 예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