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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4
가나안 정복의 약사 / 김진철 목사
오늘은 어제에 이어 두 번째로 가나안 정복의 약사를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조금 전에 봉독하신 본문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동쪽에서 이룩한 업적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요단강을 도하하기 전에 머물렀던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모세 시대에 있었던 전쟁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전공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산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를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보세요. 본문 1절 말씀은 그 다음에 기록된 말씀들이 요단강 동편에서 일어난 일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은 보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거두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첫 번째 본문의 결론은 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고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 땅을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더라"
이 말씀은 첫 번째 본문인 1절부터 6절까지의 업적이 다름 아닌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요단 동편의 땅을 정복하였고, 그 땅을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7절부터 마지막 절인 2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먼저 7절과 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두 번째 본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이 부분이 기록되었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편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산까지에서 쳐서 멸한 왕들은 이러하니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구별을 따라 그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 곧 산지와 평지와 아라바와 경사지와 광야와 남방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이라)"
유념해서 보세요. 두 번째 본문에 기록된 지역은 어디입니까? 이번에는 요단강 서편입니다. 따라서 7절 이하의 말씀은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넌 이후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본문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그 주인공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우리가 지난 두 이레 동안 말씀을 통해 만나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졌던 여호수아가 두 번째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오늘까지 우리가 기도의 행진과 더불어 상고했던 여호수아의 전쟁기에 나오는 많은 왕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동안 점령한 지역과 그 왕들이 차례차례 열거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본문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본문을 구분해서 살펴보고 나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본문은 분명 여호수아서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여호수아에 관한 이야기, 그의 업적, 그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요, 여기에 갑자기 모세의 업적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시작부분에서가 아니라 거의 중간지점에서 갑자기 모세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죽은 모세가 왜 여기서 등장해야 하는지 우리는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본문을 대하면서 왜 여기서 모세가 등장해야 하는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본문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이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이제부터 그것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여기서 모세와 여호수아가 함께 등장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본문을 떠나서 여호수아 1장으로 가보아야 합니다. 제가 새벽기도의 행진 첫 시간에 전했던 말씀입니다. 그 날을 기억하시고 여호수아 1장 5절과 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할렐루야! 이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첫 날 저는 여호수아 강해를 시작하면서 여호수아의 심경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동안 40여 년의 광야생활을 하면서 모세를 바로 곁에서 섬겨온 여호수아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세가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 자신에게 맡겨졌습니다. 이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기 전에 극복해야 할 몇 가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바로 '모세'라고 하는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에 대한 향수에 빠져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역사의 주역으로 앞장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지만 이제는 여호수아, 바로 네가 그 일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금 금방 이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약속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은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약속입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예측하고 약속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역시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해야 약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이 여호수아의 업적만을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전에 모세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궁극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본문은 기록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여호수아가 결국 '모세'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뚜렷한 역사의 주체로 세워졌음을 뜻합니다.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모세'의 한계를 극복함으로 하나님의 역사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선봉에 세워지는 믿음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자리에서 새벽을 깨우는 우리 성도님들, 그리고 청년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믿음의 자리에 굳건하게 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 이 일이 여호수아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사로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하거나 올려다 볼 수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확실한 하나님의 응원과 도우심 가운데 결국 모세와 같이 쓰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당장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에 이 일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일 것 같으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서도 역사하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새벽 기도하는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확연하게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이 약속은 이제 우리를 향한 약속입니다. 여호수아가 그의 삶 속에서 이 약속을 이룸으로 여호수아 12장 7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 것처럼 이제는 우리들이 오늘 이 시대의 새로운 여호수아 12장 7절 이하의 기록을 남기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로 본문에서 모세에 관한 기록과 여호수아의 업적이 함께 열거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들을 회상하기 위함입니다. 12장 전체의 내용은 분명 지난날들에 대한 회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장점이자 단점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망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이상의 일들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망각'입니다. 이러한 '망각'이 장점인 경우는 때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기억들을 잊어줄 때입니다.
만일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당했던 가슴아픈 사연들을 우리의 머리가 낱낱이 다 기억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아마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갖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 '망각'은 큰 장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반면 '망각'이 단점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롭고 소중한 일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매우 큰 약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일들을 잊어버립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을 잊어버립니다. 내가 경험해 놓은 것마저 잊어버리고 말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망각'이 큰 단점이 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어느 정도 가나안 땅의 정복을 완수해가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가나안 땅 북부지역을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전쟁은 치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일은 지파별로 분배된 지역 안에서 행할 국지전뿐입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동안 자신들과 동행해주셨던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회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은 저들에게 매우 큰 유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회상하는 것은 앞으로 아직 우리가 밟아보지 못한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굳게 믿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회상의 유익이요, 오늘의 본문이 이곳에 기록된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은 회상의 유익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출애굽기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여기서 잠시 출애굽기 16장으로 가보겠습니다(p. 106). 출애굽기 14장과 15장은 홍해의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살기 등등한 애굽 군대의 추격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발을 동동 구르며 홍해바다를 원망하고 서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모세의 지팡이를 홍해로 내밀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요? 홍해 바다가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바다의 바닥이 드러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너가자 홍해는 다시 전처럼 넘실거리는 바다로 변했습니다. 애굽의 군대들은 그 물결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직후의 기록이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이제 출애굽기 16장 1절부터 3절을 함께 봉독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왠지 아십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저는 조금 전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직후의 상황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저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노예 생활이었지만 고기와 떡을 먹던 애굽에서의 생활을 동경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조금 전 저들이 경험한 홍해의 기적이 무슨 이웃 동네에서 일어나는 예사 일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아니 대단하다는 말로도 설명될 수 없는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자신들의 눈으로 보았고, 자신들의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럼 이제 그까짓 고기와 떡에 관한 것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홍해의 기적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홍해를 갈라지게 하신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그 분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언제나 일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고 필요한 것을 구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심지어 노예살이로 치가 떨릴 애굽을 그리워합니다. 이러한 일은 출애굽기 전체에 걸쳐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망각'이 문제입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의 역사를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불평과 원망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회상은 대단히 유익한 것입니다. 특히 믿음생활 중에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응답을 회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욱 능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가나안 정복의 약사, 두 번째 시간을 맞아 본문을 상고했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세요.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일들을 다 이루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구체적으로 구하시는 이 새벽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 개개인이 하나님의 역사의 주역으로 쓰임 받기를 위해서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의 기적을 잊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나약하고,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날 내게, 우리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회상하세요. 이 회상의 유익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이 새벽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