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 : 1. 산에 올라가심 5 : 2. 가르쳐 이르시되 5 : 3. 심령이 가난한 자(상)
제 5 장 : 완전한 의의 삶
1. 복이 있는 사람 ( 5 : 1 – 12. 눅 6: 20-23 )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 : 1. 산에 올라가심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을 구별하였다.
‘무리’는 이런 저런 동기로 예수께 나온 자들이라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교훈을 실행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온 사람 중에도 이처럼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무리들'은 4: 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이들은 아침 안개와 같은 사람을 의미한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다.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 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 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2] 산에 올라가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는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에 의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 17 주석, 강해 참조).
* 눅 6: 17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산'(*, 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 있다.
'평지'가 산 아래 평원(平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전승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고 있다. 갈릴리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으며 그것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 '신약의 시내 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다.
3] 앉으시니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
예수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 있는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 마 13: 2 -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 마 23: 2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마 24: 3 –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눅 4: 20 -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4] 제자들이(*, 호이 마데타이).
선택받은 열두 제자들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 1 이전까지는 십이 사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11: 2).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4: 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를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5] 나아온지라.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시내 산'에서와 같이 백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 출 19: 12 -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 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모든 사람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마 5 : 2. 가르쳐 이르시되 -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그가 산 위에서 가르치신 보배로운 교훈이라고 하여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부른다. 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여덟 부류의 복된 자들을 언급하셨다. 흔히 ‘팔복(八福)’이라고 불린다. 처음 네 가지 복은 구원을 위한 준비이고, 나머지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본다.
1]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 마 13: 35 -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시 78: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 행 8:35 -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 행 10: 34 -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
* 욥 3: 1 -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 욥 33: 2 -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
* 단 10: 16 -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서 있는 자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이 환상으로 말미암아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이 표현은 주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 4).
2] 가르쳐(*, 에디다스켄) 이르시대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탄생하신 이후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라는 뜻이다.
예수의 사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다(4: 23).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 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 복음'(*, 유앙겔리온. 4: 23)이었으며,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이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소위 ‘산상보훈’(山上寶訓)은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3절부터 나오는 팔복(八福)은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처음 네 가지 복은 구원을 위한 준비, 혹은 구원받는 자의 상태라고 생각되고, 나머지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볼 수 있다.
마 5 : 3. 심령이 가난한 자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신에게 지혜와 지식, 의와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지혜와 지식, 의와 힘이 부족하거나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찾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겸손한 자를 의미한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교만과 병행하여 나타난다. 교만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과, 또 자기가 의뢰하는 돈이나 권력, 지위나 권세 같은 세상의 것들은 환난 날에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며 영생을 보장하지 못하며 지옥에서 자기를 구원하지도 못한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는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서부터 시작된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무도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심령의 가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6: 2에서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돌아보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의 소유가 될 것이다. 성경에 증언된 대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우선 자신의 빈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기 자신이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고 의가 없고 힘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물론,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무능력을 늘 인식하고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늘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 약 4: 6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벧전 5: 5 -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 눅 6: 20 -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런 차이에 대해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 가난한)와 같은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아나임'(*, 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 시 37: 14 -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 시 40: 17 -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 시 69: 29 -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 잠 16: 19 -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가난한 자'란 말은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
* 사 57: 15 -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 사 61: 1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 사 66: 2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사 61: 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눅 4: 18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여기 가난은 물질적 가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가난, 심령의 가난을 의미한다. 대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 중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많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들 중에 심령이 부유한 자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반드시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며,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반드시 심령이 부요한 것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요, 심령이 부유한 것이 화이다.
마음의 부유와 가난이란 지식과 깨달음의 면을 말한다. 마음이 부요한 자는 자신의 가난하고 가련한 실상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무지와, 부도덕, 불의, 종교적, 도덕적 무능력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평가하며, 주의 은혜와 주의 의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항상 교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불신앙과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 대신 자신을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이, 자기가 의뢰하는 돈(재물)이나 세상의 것들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그것들이 환란 날에 자기를 구원할 것인가? 그것들이 지옥 심판의 불에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가? 그것들이 영원한 행복을 약속할 것인가? 아니, 아니, 아니다!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된다. 항상 겸비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구원의 길에 들어선 모든 성도의 모습이다.
누구든지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의 은혜요,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을 솔직히 시인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
* 시 69: 29 -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 시 70: 5 -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 시 74: 21 -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 사 61: 1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 습 3: 12 -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된다.
* 시 37: 14 -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 시 86: 14 -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자신의 죄를 통회(痛悔)하며 회개하는 것이다.
* 시 34: 6, 18 –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 시 51: 17 -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 이다.
* 사 66: 2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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