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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1편 11절-42편 2절.
41편 11절-13절: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제 2권.
42편. 고라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1절-2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41편 11절-12절: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진리성도 다윗은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분도 다윗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잘 안다는 게 뭐냐? 서로가 마음을 잘 안다는 게 뭐냐? 성격이나 성질이나 소원이나 목적이 같다 그 말이다.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똑같구나.
다윗은 완전한 분을 닮으려는 소원 목적을 가지고 이를 위해 힘을 쓰고 애를 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마음을 잘 아신다. 다윗은 자신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다고 하는 신앙의 승리감을 가지고 있다. 즉 다윗은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자신을 염두에 두고 현재를 이겨나가는 신앙이다.
현재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미래를 모르면, 장래를 모르면 현재를 이길 수 없다. 현재에 어떻게 살면 미래가 어떻게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현재를 이길 수 있다. 일반적으로도 미래의 어떤 소망이 있으면 현재의 고통을 이겨나간다. 현재를 이겨나가려면 미래가 밝아야 한다. 밝은 미래를 놓고 현재의 고통을 이겨나가는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자기의 미래가 밝으냐, 어두우냐? 안 그러면 그도 저도 모르겠느냐? 우리가 자기에게 부딪힐 일을 구체적으로 모를지라도 미래의 그 날을 바라보면서 현재를 능히 이겨나간다면 밝은 미래가 있게 된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갈 때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진리신앙의 노선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미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현재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미래의 영광을 위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훈련을 시키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높이 올리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신다. 그러니 예수 괜히 믿었느냐? 예수 믿으면 날마다 만사형통하고, 평안하고,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고, 살도 안 찌고, 가만히 놀아도 돈이 들어오고, 공부를 안 해도 대학교에 붙고, 아무 것도 몰라도 대통령 좀 해 달라고 하고 이런 거냐?
우리는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 날이 없으면 현재를 이길 수 없다. ‘에이, 그냥 하루하루 살자’ 이건 있을 수 없다. 사는 것은 그 날 그 날 산다고 해도 자기 속에서는 ‘그 날이’ 있어야 한다. 그 날에 주님 앞에서의 승리는 현재를 이기는 승리와 직결이 되어있다.
현재에서 늘 넘어지고, 코도 다치고, 무릎이 까이고 하면서 현재를 이기는 이김이 있어야 그 날에 승리를 보게 되는 거다. 축구에서 24강에서 16강으로, 16강에서 8강으로, 8강에서 4강으로, 4강에서 결승에까지 올라가야 1등을 위해 겨룰 수 있듯이 신앙성장도 1차에서 이기지 못하면 2차로 못 올라간다. 현재의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 이겨나가는 그 이김성과, 마지막 그 날의 승리와는 죽 연결이 되어있다. 그래서 11절에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원수는 망하고 다윗은 이기고, 그리고 이긴 기쁨을 누가 안다? 주 하나님이 아신다. 그리고 그것을 다윗 자신도 안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도 현재에서 모든 원수를 다 이기고 그 날에 승리를 하는 다윗처럼 승리를 한다면 승리를 한 자기를 하나님이 알고 계실까, 모르실까? 매일마다의 생활 속에서 별 것도 아닌 것에 넘어지고, 별 것도 아닌 것에 넘어지고 한다면 마지막 그 날에 면류관이 아니라 개털 모자를 쓸 나를 하나님께서 아실까, 모르실까? 현재적 자기의 신앙을 가만히 생각을 해 봐라. 하나님께서 왜 모르시겠느냐?
‘네가 이렇게 이렇게 가다가는 어떻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음으로 들을 수 있느냐? 이게 인격적 관계성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을 할까?’ 이건 인간기준에서 인격적으로 생각하는 거고, ‘내가 이렇게 믿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을 하실까?’ 하며 하나님의 속마음을 타진하는 이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으로 생각을 하는 거다.
우리교회를 보면 이유야 어떻든 오래 전부터 나오던 교인들은 하나 둘 빠지는 것 같고, 다른 교인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이가 많아서 못 나오는 분도 있고, 몸이 아파서 못 나오는 분도 있고, 나오기 싫어서 안 나오는 분도 있고, 이유가 있어서 안 나오는 분도 있고. 어쨌든 하루 이틀 다닌 교인도 아닌데 이상하게 슬슬 멀어지는 걸 보면 씁쓸하다. 다른 분들은 이런 저런 것들을 이기며 신앙이 올라가고 있는데 왜 정상봉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질까? 성격과 성질이 못 돼서 못 이기고, 이런 저런 이유로 못 이겨서 툭툭 떨어진다면 앞으로 보다 더 큰 환난이 오면 이길 재간이 없는 거다. 현재에서 지는데 어떻게 미래에 이길 수 있겠느냐?
군인이 현재 계급이 안 올라가는데 마지막 그 날에 가서 계급이 확 뛰는 거냐? 군인이 몇 계급으로 확 올라가는 경우가 있기는 한데, 전쟁에서 크게 승리를 해야 한다. 적의 대장을 죽이면 확 올라간다. 신앙 면에서 현재 별 것 아닌 것에 넘어지는데 미래에 가서 어떻게 환난을 이길 수 있겠느냐? 환난이 아닌 것에도 제 성격 제 성질에 넘어가는데 육에 환난이 오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 이길 수 없는 거다.
13절: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왜 찬송을 하느냐? 10절부터 12절까지를 보면 성도가 신앙 면의 보복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원수가 자기를 집어삼키고 깔고 뭉갠다. 내가 가만히 있다고 해서 남이 나를 안 건드리는 게 아니다. 그러면 이런 원수에게 보복을 하려는 게 사람인데, 보복에는 원수를 죽여 버리는 보복성도 있을 수 있고, 또 원수보다 실력이 확 높아지는 보복도 있고, 또 원수를 자기의 노예로 삼는 보복도 있다. 이 중에 어느 것이 멋있느냐? 세 번째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우리의 구원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설정이 된 것인데, 그 내용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수를 보복하고 하나님 앞에 존영자가 되는 것이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설정이 되고 예정이 된 이 프로그램은 인간 자기가 부정을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 자기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프로그램대로 가는 거다. 이 예정은 ‘너는 일층에서 살아라. 너는 이층에서 살아라’ 하는 식으로 아예 그렇게 정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실력대로 존영자가 되는 것이 정해진 거다. 그래서 미래의 그 날을 바라보며 현재에서 이기고 나가면 그 날에 영광으로 갚아주심의 그 사역에 아멘이고, 그 목적에 아멘이 되는 거다. 영원 전에 설정된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 들어간다는 면에서 아멘이다.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을 하는데, 말로만 ‘아멘’ 해놓고 힘쓰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그 날에 존귀 영광의 자리에 서겠다는 결심으로 ‘아멘’을 해야 되느냐? 결심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적으로 흐르는 교회에서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 라고 하면 교인들이 ‘아멘, 아멘’ 하는데, 아멘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그렇게 세상의 복을 받기를 바라서 아멘이냐, 안 되기를 바라서 아멘이냐, 아니면 그냥 듣기 좋으라고 아멘을 하는 거냐? 자기가 그렇게 되기를 소원해서 아멘을 하는 거다.
‘아멘’의 뜻이 뭐냐? ‘동감입니다’ 라는 뜻이다. ‘내 마음이 당신의 마음과 같습니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기도를 듣거나 설교를 들을 때 듣는 사람이 기도를 하는 사람이나 설교를 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 ‘아멘’을 할 게 아니라 ‘그 기도나 설교가 하나님 기준에 맞는 소원 목적이냐?’ 여기에 따라 ‘아멘’을 하던, 안 하던 해야 하는 거다. 하나님의 기준에 안 맞으면 아멘을 못하는 거다. 그런데 보면 버릇이 되어서 그냥 ‘아멘’ 해 버린다.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을 내용이던, 썩어지고 불타질 것을 구했던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면 교인들은 ‘내가 아멘을 함으로 이 기도가 끝나는구나’ 라고 하면서 ‘기도 끝’이라는 의미에서 ‘아멘’을 해버린다. 이런 사고방식의 아멘이 얼마나 많으냐?
42편. 고라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고라자손은 레위족속의 한 분파로서 성가대를 담당했다(대상1:35). ‘마스길’은 ‘교훈’ 또는 ‘생각하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것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성령의 인도로 부른 찬송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성가대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의 성가대는 어떤 마음으로 불렀던 노래만 잘 하면, 찬송만 잘 하면 된다는 식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성가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어떻게 영감의 찬송이 나오겠느냐? 성령의 영감을 받고 나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성가대라 그 말이다. 교회에서 성가대원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야 한다. 그런데 이게 아닌 학교에서 노래를 잘 부르던 사람이 오늘 교회에 처음 나왔는데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서 성가대에 앉혀서 찬송을 부르게 한다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찬송을 부르겠느냐? 세상정신이 가득 들어있는 마음으로 찬송을 하게 된다. 속에 든 대로 나오는 거다. 속에 든 것은 못 속인다.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도 자기가 현재 피아노 학원도 하고 있고, 전국대회에 나가서 일등을 했는데도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자기를 피아노를 치게 안 해 줘서 뾰로통해 있는 차에 다른 교회 사람이 ‘우리교회에 와서 피아노 좀 쳐 주십시오’ 라고 하면 얼른 그리로 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찬양을 하려고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북 치고 장구 치고 나팔 불려고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다. 이게 성령의 영감으로 된 거냐? 아니다.
평소 때나 기분이 좋을 때는 잘 모르는데 자기가 어떤 환난과 핍박을 만나서 많은 슬픔과 고통과 고뇌가 있은 후에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이를테면 ‘멀리 멀리 갔더니’ 하는 찬송을 부른다면 눈물이 안 나올까? 나온다. 이게 성령의 감화를 받은 거다. 하나님 앞에 영감을 받아서 나오는 찬송이다. 인격적 깨달음으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다는 것을 자기의 신앙에 붙여서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감동 감화로 되는 거다.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말하는 건데, 사슴이 사냥꾼들에게 쫓기고 사냥개들에게 쫓긴다면 헐떡이며 달아날 때 땀이 솟고, 기운이 빠지며 그 목이 얼마나 타겠느냐? 이럴 때 시냇물을 찾아서 그 물을 마시면 기운을 얻게 되고, 얼마나 시원하겠느냐?
사람의 경우에 어느 때가 제일 갈급하냐? 날씨가 더우면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목이 탄다. 또 땀을 많이 흘렸을 때 목이 마르고, 높은 산에 올라갈 때 목이 말라서 물을 찾는다. 그리고 여러 날을 먹지 못했을 때, 또 밤에 입을 벌리고 자면 입안이 타버린다. 그런데 우리 기독자들은 이런 육신에 대한 갈급성보다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영혼에 대한 갈급성이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것만은 꼭 이뤄놓아야 할 텐데’ 라고 하는 갈급성, 이런 애탐성이 있다.
이방 세상 사람들의 갈급성과 애탐성은 세상에서 성공 출세하는 것, 편하게 살다 가는 것에 있다. 그러면 우리교회 성도들은 갈급성 애탐성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신앙 면에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 되겠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세상에게, 사람에게, 물질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으니 나를 여기에서 자유하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게 있느냐? 우리가 적으나마 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끌려가면서도 안 끌려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거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약해서 끌려가고 있을 때 그 마음에 울부짖음이 있는 거다.
하나님 앞에 실력 있는 멋있는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가고자 하는 애탐이 있지 않느냐? 이럴 때 간단히 말하면 주님을 만나면 영혼의 갈급성이 다 해결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만날까? 이미 부활 승천을 하셨는데 이 주님을 어떻게 만날까? 꿈에 만날까? 기도하다 만날까? 환상으로 만날까? 이러면 마귀를 만나기 쉽다. 마귀가 나타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말씀 깨달음으로 만나는 거다. 이게 인격적으로 만나는 거다. 이렇게 해서 ‘아하, 신앙이라는 게 바로 이거였구나’ 하고 깨닫고, 이 깨달음을 신앙 사상적으로 붙잡고 살아나가는 거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거다.
현재 직장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느냐?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라.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만족하게 받으며 살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라. 사람과의 관계성이 막혀져 있느냐? ‘하나님 아버지, 사람과의 관계성이 잘 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라. ‘직장에 대한 지혜를 주옵소서. 사람에 대한 지혜를 주옵소서. 이건지 저건지 선택이 잘 안 됩니다. 바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게 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다.
주님을 만나면 뭐가 부족하겠느냐? 세상 것도 주님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고, 신령천국도 주님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데 우리가 주님에게 잘 보이면 무엇인들 안 주시겠느냐? 이 하나님이 믿어지느냐?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을 누구 주려고 만든 거냐? 누구보고 다스리라고 만든 거냐? 인간 나보고 지키고 다스리라고 했다. ‘신령천국은 내가 너를 위해서 다스릴 테니 에덴동산, 즉 세상은 네가 한 번 다스려 봐라. 그러면서 구원을 잘 이뤄라. 이 땅에 살면서 신령천국을 다스리는 영능의 실력을 잘 쌓은 후에 신령천국에 올라오면 너에게 신령천국을 상속으로 주겠다’ 하는 이게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인데,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이 주님을 만난다면 뭐가 부럽고, 뭐가 그립고, 뭐가 아쉽겠느냐?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기쁘고, 즐겁고, 만족하고, 힘이 솟고, 강건하고, 성장하고, 능력이 있고, 담대해지고, 존귀해지고, 영광스러워진다. 그러나 신앙 믿음이 죽고 썩어있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서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먹고자 하는 영혼의 갈급성 애탐성이 없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항상 세상의 것, 썩어지고 불타질 것에 집착이 되어있다. 백이면 백 명이 다 그렇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은 안 가느냐? 몸은 마음을 따라 가게 되어있다. 그런데 마음은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몸이 가는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하면서 끌려가야 하느냐? 이럴 때는 ‘하나님 아버지, 여기서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애타는 마음, 비진리가 사방에서 득세할 때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이런 마음들은 전부가 주를 찾는 갈급한 마음들이다. 이 영혼의 갈급성은 생존하시는 하나님과 직결이 되는 성질이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자기는 어떤 면에 영혼의 갈급성이 있느냐?
영혼의 갈급성은 하나님과 직결이 된다. 그러나 세상과 세상의 것을 가지고자 한다면 이것은 영혼의 갈급성과는 상관이 없는 거다. ‘나에게 예언 방언을 하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하면서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한다면 이것이 영혼의 갈급성이며, 하나님과 직결이 돼 있는 거냐? 누구와 직결이 돼 있는 거냐? 마귀와 직결이 되어있다. 예언 방언을 해서 뭘 하려는 거냐? 주면 그것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거냐? 그런 것을 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그 의욕성이 육에서 나오는 거다. 옛사람 부패성에서 나오는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생각을 못한다.
내가 어디서 보니까 방언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소리를 들어보니까 같은 말로 계속 반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서 그걸 통역한다고 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이라고 했다. 아니, 똑같은 말로 반복을 하는데 그게 어째서 그 말이 되는 거냐? 그러니 얼마나 엉터리냐?
2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하나님을 갈망하며 본향을 그리워하는 애탐성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뵙는 거냐? 하나님을 갈망하는 신앙,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어느 때에 참 진리를 발견할꼬?’ 하며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다.
신앙적으로 말을 하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으니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발견하면 이것이 주님을 발견하고 만난 거다. ‘내가 어느 때에 진리 깨달음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을꼬? 내가 어느 때에 하나님의 성품이 온전히 입혀질꼬? 내가 언제쯤 이 못된 버릇이 고쳐질꼬?’ 하는 애탐성의 마음을 가진 것이 ‘내가 어느 때에 하나님을 뵈올꼬?’ 하는 소원과 같은 거다. 바른 진리를 찾아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자기의 인격화 시키며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성도다. 이 마음이 아닌 것은 세상을 갈망하는 거다.
세상 육적인 교회는 자기의 어떤 일이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 자기의 일을 해결해 달라고. 그런데 그 일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요구를 한다. 그러니까 요구가 끝이 없다. 이게 이루어졌느냐? 그러면 ‘또 다른 이걸 이루어 주옵소서’ 라고 하고, 이게 이루어지면 ‘또 다른 이걸 좀 이루어 주옵소서’ 라고 한다.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 세상물질을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신비한 능력을 달라고 밤낮으로 하나님을 보채는 사람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못할 정도로 밤낮으로 보채면 하나님도 잠을 자야 되기 때문에 주시는 거냐? 이런 것들은 일반은총, 일반은혜에 관한 거다. 우리는 현재 진리신앙을 붙잡고 살고자 하는 영혼의 갈급성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언제나 뵈올꼬?’ 하는 영혼의 갈급성이 있어야 한다. 사람마다 다 갈급성이 있는 건데, 예수 믿는 우리는 어느 쪽 갈급성이 더 많으냐? 어느 쪽의 갈급성이 더 진하고 크냐? 이걸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