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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예수님으로 인해 삶을 결단한 사람(마9장9-13;막 2장14-17)
성경본문:마태복음 9장 9-13절; 마가복음 2장 14-17절)
마태복음 9장 9-13절;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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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14-17절)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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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장 27-35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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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이 있는가?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성도가 목사님을 찾아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왜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와 같은 제자를 선택하셨을까요?”
한참을 생각하던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성도님! 제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가롯 유다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을 왜 하나님이 부르셨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누군가를 부르셨다는 것은 사실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단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르심에 대하여 ‘자격’을 논하거나, 부르심을 받는 ‘장소’를 특별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던 것은 자격도 특별한 장소도 아니었습니다.
부르심에서 특별한 일이 시작되고, 부르심의 사건이 있었던 장소가 특별하게 구별되는 것이죠.
우리가 잘 아는 부르심의 사건이 출애굽기 3장에 있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호렙 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양을 치기 위해 머물고 있었습니다.
요즘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시내 산입니다. 그곳에 새벽부터 올라갑니다. 체력이 안 되는 사람은 낙타를 타고 올라가기도 합니다. 정상에 올라가 감탄하지만, 사실 시내 산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사진을 찍고, 기도하고 감격스럽게 내려옵니다.
또 하나의 감격을 추가하자면 시내 산 정상에서 추운 바람을 맞고 사발면 하나 먹고 내려오는 추억도 있습니다.
우리는 왜 시내 산에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시내 산은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사실 십계명을 받게 되는 그 장소는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장소’였던 시내 산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 거룩한 곳이 되었고 기념할 만한 곳이 되었다는 사실이지요.
오늘부터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고, 그들이 주님을 만난 장소 역시 특별하게 구별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마태는 그 부르심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마태라고 아는 예수님의 제자가 오늘 본문에는 ‘레위’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은,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레위’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고,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 9장 9절에서는 예수님이 주신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리였던 ‘레위’가 예수님을 만난 후 ‘마태’라는 이름으로 변했다는 것이죠.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름처럼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판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오늘 본문 27절과 28절을 보겠습니다.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마태를 만난 곳은 초기 사역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에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성경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평판을 받았지만, 어느 정도의 교육과 숫자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할 수 있었던 직업입니다.
또한, 당시 통용되는 언어인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까지 알아야 했기에, 다른 제자들보다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당시 세리는 그리 명예로운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세리는 지배국 로마의 하수인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가 겪었던 일제 강점기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많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에게 멸시를 받아야 하는 직업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명예를 포기했다면,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반대급부인 돈을 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일정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세리들은 로마에 낼 세금보다 더 많은 액수를 사람들에게 부과하므로 자신이 착복하여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당시 기록에 보면 세금 문제로 인해 민중들의 봉기가 여러 차례 일어났던 것으로 보면 그 세금이 얼마나 과중했고 사람들의 분노를 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태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다는 것은, 그의 삶의 집착,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버텼던 삶의 근거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에게 세관을 박차고 일어났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삶을 의미합니다.
세리들은 정치적인 이유로도 미움을 받았고, 부정직하고 교활하고 무자비하게 착취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사실 멸시를 돈으로 보상받는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세리라는 직업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 못할 정도로 인정과 신용을 받지 못하는 직업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와 창기’는 같은 부류의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회당 출입도 금지되었고, 헌금이나 자선금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창기’는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사람, ‘세리’는 돈을 위해 영혼과 나라를 파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의 삶과 이름을 바꾼 것은,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그를 부르신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세리와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심으로 인해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사명을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과 갈등을 유발하는 것 같습니다.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명이 자연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본문 30~32절입니다.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오늘 마태를 부르신 사건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는 부르심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 부르심으로 인해,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0절의 말씀을 보면, 가장 종교적이고 율법에 박식했던 사람들에게 세리를 부르신 것이 의문스러웠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이고, 게다가 세리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찾아가셔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찾아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종교와 율법은 늘 자격에 합당한 사람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사람은 자격을 갖춘 변화된 사람을 원하지만, 주님은 누군가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의사가 필요한 것은 병든 자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위하여.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 인생의 욕된 자리가 복된 자리로 변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가치관이나 원칙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따르라고 말씀하지 않고 대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그의 삶이 로마 황제의 권위를 최고로 받들고, 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이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이 로마 황제 시저의 말보다 더 귀하고 값진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마태의 부르심을 보며 생각나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어떤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발견한 농부가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산 이야기 말입니다.
마태에게서 주님의 부르심은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가 생명을 걸고 붙들고 있었던 줄을 놓았더니 예수님의 품속에 안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따른 것이 귀하지만, 마태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쉽게 자기 직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세리였던 마태는 이제 돌아갈 곳도 없었습니다.
로마와의 계약도 파기되고 세리라는 직업도 회복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모험이었고, 배수진을 친 결단이었습니다.
윌리엄 페더라는 사람의 글 중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떤 아이가 길을 걷다가 5달러 지폐를 주었습니다. 한 번 횡재한 이 아이는 그 다음부터는 기분이 좋아서 한평생을 길바닥만 보고 길을 걸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가 주운 엄청난 물건들의 숫자가 있는데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 이게 얼마나 정확한 숫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그렇게 쭉 가서, 동전 수천 개….
대신에 잃어버린 것도 있었습니다.
푸른 하늘과 길가에 핀 아름다운 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고, 봄날의 따스한 향기를 맡아 본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너스로 얻은 것 한 가지가 바로 꼽추처럼 굽어 버린 등이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길바닥을 휩쓸며 평생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잡다한 것을 주웠지만, 사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인생의 참된 가치는 다 잃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인생을 가리켜서 넝마주이 인생이라고 표현한 것을 읽었습니다.
넝마주이 인생… 다 주운 것 같은데,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한 사람….
과거에는 자기의 영혼을 팔아 부를 더했던 사람이, 부를 버림으로써 생명을 구하는 길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것은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일어나 좇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참 쉽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일어나 주님을 좇지 않는 듯합니다. 사실 말로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어나 좇는다는 것은 삶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자’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은 그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기 위해 현재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이전의 자리가 ‘과거’의 자리가 되도록 일어서야 합니다.
옮겨진 자리가 새로운 ‘미래’가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마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혁명적인 일이 아닐까요?
그의 삶에 일어난 전체적인 변화의 사건입니다.
결단의 결과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순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29절을 보세요.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그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는 단순히 제자 됨을 자축하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 중에는 바리새인도,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리도 초청했습니다. 뭔가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이야기를 통해 초청받은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어쩌면 그가 그 논쟁을 예상했거나, 그 논쟁에 대하여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세리였던 마태가 굳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초청해 논쟁거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가 기꺼이 그의 삶에 귀찮은 것을 감수하겠다는 의도가 아닐까요?
게다가 자신의 돈을 들여, 자신의 집에서 잔치한다는 것 역시 자신의 삶을 내어놓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이전의 잔치는 자신을 위하여 베풀어진 것이라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야말로 예수님을 위한 잔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셨던 것처럼, 그들을 부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예수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다는 이야기겠죠.
중요한 것은 마태가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신나는 일이 된 것입니다.
존 피터슨이 작곡한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오 아름다운 날 즐거운 날 내 어이 잊으리요
어두움 속에서 헤매던 나 예수님 만났도다
얼마나 다정한 친구인지 부족함 전혀없네
어두움 물리친 구세주 예수님 기쁨으로 증거해
성령이 내 맘을 주장하사 내 생활 변화되고
갈보리 십자가 그 사랑이 내 죄를 사하셨네
이전에 죄악된 내 생활은 모두 다 사라지고
놀라운 은혜를 넘치게 주시니 주 이름 찬양하네.
(후렴)
하늘 영광 내 맘에 넘치네
주 십자가로 나를 구했네
나 죄사함 받고 밤이 밝은 낮 되었네
하늘 영광 내 맘에 넘치네
마태가 준비한 잔치는 과거 자신의 삶에 대한 이별 연,자기 삶의 결단을 밝히는 자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 공증하는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 논쟁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순간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묻는 물음은, 곧 우리 삶의 정체성을 묻는 것입니다.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첫 번째 의문은 “왜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느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했기에, 그래서 자신들은 세리와 죄인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왜 죄인들과 함께 자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자신들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이 창기와 세리들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굉장한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죠.
이들은 ‘죄’와 ‘죄인’을 구별하여 보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상관없는 분이시기에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죄인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 자신이 죄인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았기에 예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잔치를 베푼 것이죠.
예수님을 가리켜 ‘죄인들의 친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교회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겠지요.
죄로 가득한 교회가 아니라, 죄인임을 고백하는 공동체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왜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고 마시느냐?”는 것입니다.
가장 경건한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금식’은 참된 경건과 신앙생활의 표준처럼 생각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자신을 절제하고 금욕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하시는 진정한 신앙은 금욕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입니다.
즉, 우리 삶의 주인이신 그분과 함께할 때, 마치 잔치에 참여하는 것 같은 즐거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의 모습을 보면 참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죠.
은혜가 없는 자에게 어떻게 그런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마태에게 찾아온 것은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그에게 기꺼이 잔치를 베풀게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신학자 하비 콕스는 [세속도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미국교회의 붕괴를 오래전에 예언했습니다.
기독교의 붕괴는 과학의 발달과 산업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오대식 목사의 책 [왜 교회는 예수님의 세족식을 왜곡했을까?]에서 흥미로운 연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그리스도인 의사와 치료사 6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 12년간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뒤에서 만지는 장면을 설명할 때였습니다.
하비 콕스는 그 상황에서 누구의 심정에 제일 공감이 되는지를 청중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보기로 야이로, 헐루증을 앓는 여인, 군중, 예수님 등 넷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야이로 300여 명,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 100명, 군중 0명, 예수님 6명,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콕스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그리스도인 지성인이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유의 실험을 계속해 나가다 보니,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많은 변화가 요청되고, 또 이루어지지만 정작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는 흥미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들은 커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열정적인 활동들이 이루어지지만, 곳곳에서 기독교 몰락의 모습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과 말씀의 홍수 속에 외형적으로는 비대해졌지만 정작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을 품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목회자의 욕심이나 교인들의 세속적 관심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영양실조에 걸린 듯 힘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마태를 부르신 것은 실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늘 이런 사람을 불러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요한과 마태가 복음서를 쓰게 됩니다.
장부기록의 전문가인 마태가 예수님의 기사를 낱낱이 기록합니다.
특히 마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돈’에 관한 내용을 많이 썼습니다.
예를 들어, 빚 탕감의 비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등의 관한 것이죠.
마태의 세상 지식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는 모습이죠.
알렉산더 와이트는 “마태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서 그의 과거 직업으로부터 가지고 온 것은 펜과 잉크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펜과 잉크뿐 아니라 과거의 사회적 경험과 지식까지도 주님을 위해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모든 것, 그러니까 재물, 재능, 지식, 건강 등이 세례를 받게 되면 새로운 차원에서 거룩하게 쓰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영적 빈곤을 느끼던 그가 영적 부유함을 가지고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합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까지 나아가 선교하다 결국 칼로 베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T’자형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마태의 삶이 여러분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마태를 통해 알게 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오늘날 마태에게 다가오셨던 예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서 우리가 결단할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답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구체적이고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마음을 알 때,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