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빌 2:5~13
제목: 문제의 매듭을 푸는 첫 단추는 예배와 겸손이다
● 기독교는 인생에서 만난 문제의 매듭을 푸는 첫 단추가 예배와 겸손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 마6: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기독교 신자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걱정과 근심이 많고, 그것의 대부분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불신지와 마찬가지의 원초적 고민에 부딪혔을 때 참 성도는 결국에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것을 믿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인생을 살다 보면 도저히 내 힘으로 풀 수 없는 복잡한 문제의 실타래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건강, 경제, 관계의 꼬인 매듭 앞에서 우리는 무력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해결의 시작이 인간이 처한 ‘상황’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선포합니다. 아래 말씀처럼요.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새번역: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새: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현대인의성경: 여호와 안에서 너희 기쁨을 찾아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the desires)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
성경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생을 ‘방황’이라 부르고, 하나님께 돌아와 무릎 꿇는 인생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위 구절들은 ‘인생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임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신령과 진정으로, 영적으로 참되게, 영적인 진실한, in spirit and truth)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하나님이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고, 다음은 진정한 예배자에게 하나님의 전능한 도움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예배와 겸손의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배의 시작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겸손입니다.
● 예배는 피조물들이 창조주께 당연한 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단순히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듣는 종교적 형식만이 아닙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히 3:4)을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히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시95: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새번역: 엎드려 경배하자, 현대인의성경: 허리를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
개혁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지성(至誠)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창조주께 드리는 마땅한 ‘경외’입니다. 이것은 약자가 더 강한 인간에게 굴복하는 비굴함 따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지를 지으신 도움의 근원(시 121:2) 앞에 우리 인생을 바로 세우는 가장 지혜로운 행위입니다.
| 시121: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where does my help come from?) 2.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경외하며 예배드릴 때, 우리 삶의 무너진 질서가 비로소 바로잡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필요한 태도는 참 ‘겸손’인데요.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통로입니다. 아직 신앙의 깊이가 얕아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배의 시작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나의 지혜와 의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敬聽)하는 것! 그것이 겸손의 시작입니다. 겸손은 은혜를 받은 결과에서 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를 받아 ‘겸손한 자’에게 다른 은혜도 베푸십니다. 개혁주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믿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그 겸손하고 빈 마음의 자리에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집니다. 우리가 겸손히 낮아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진정한 겸손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모범은 ‘낮아지심’(비하)의 신비입니다.
| 빌2: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모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빌 2:5~8). 이것이 개혁주의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비하(낮아지심, Humiliation)’입니다. 성자의 위격이신 예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성부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을 ‘주(主)’라 시인할 때, 우리를 억누르던 세상의 문제들도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외하면, 인생에서 자잘한 문제를 일으키는 어둠의 세력은 떠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에 임하게 됩니다. 이는 신비주의와 기복신앙의 허탄한 과장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성경에 ‘성령께서 연약한 성도를 도우심’이 명확히 나옵니다. 성령은 성도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견인합니다.
| 롬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in our weakness)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예배가 포함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드린 성도에게는 문제 포함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 신비주의와 기복신앙의 양대 미혹을 회피한 참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빌2:13). 이 내용은 솔직히 개역개정으로 보면 헷갈립니다. 타 번역을 보면 좋지요.
공동번역)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새번역)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소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현대인의성경)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목적에 따라(NIV: according to his good purpose)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
우리가 소원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거룩한 소원을 심어주십니다. 그것의 기도가 탐욕이나 범죄가 아니라면(약4:2), 그 소원은 하나님이 성취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을 보시는데요. 우리가 겸손의 첫 단추를 꿰면, 나머지 모든 꼬인 매듭을 하나님께서 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예배에서 평안을 누리며, 우리 모두가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즐거운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호쿠마 주석: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본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페'(* )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외적인 형체와 영광이 동일시되며(출 16:10;24:15,16;레 9:6,23;민 12:8;14:10)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나누셨기 때문에(요 17:5;고후 4:4;골 1:15), '본체'를 '영광'으로 해석한다(Behm, Fitzmyer). 그러나 이 해석은 7절의
'종의 형체'(* , 모르펜 둘루)에서 나타나는 '고난당함'을 설명할 수 없다(Hendriksen, Hawthorne). (2)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품'으로 이해한다(Muller,Lightfoot, Kent, Hawthorne, Vincen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 안에서 존재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과 동등됨'이 그리스도께서 장차 취하실 영광이지만 고난을 통과하기까지 유보하셨다고 해석한다(Martin, Stauffer). (2) 혹자는 본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나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는 인간으로 오시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셨다고 해석한다(Muller, Hawthorne, Lightfoot).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이미 그의 영광은 하나님과 동등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2:7
자기를 비어 - '자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아우톤'(* )은 강조적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비어'의 헬라어 '에케노센'(* )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였다(Plummer). (2) 독립적인 권위 행사를 포기하였다(Hendriksen). (3) 하나님의 대권적(大權的) 권능을 포기하였다(Lightfoot). (4) 존엄과 주권의 표지(標識)를 포기하였다(Calvin). (5) 하나님의 속성 즉 무소부재, 전지전능 등을 포기하였다(Forsyth, Mackintosh, Martin). 위의 견해들 중 세번째가 타당한 듯하다(Kent).
종의 형체를 가져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종의 외적인 모습을 취하셨거나 종으로 가장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의 본질적인 속성을 취하셔서 종이 되셨음을 의미한다(Hawthorne). '종'에 대해서 혹자는 사 52:13-53:12에 나타난 '야웨의 종'의 개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Martin, J. Jeremias, Lohmeyer).
그러나 본절의 '종'은 11절에 나타난 고양된 그리스도이신 '주'와 대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나타낸다(Renqstorf, Hawthorne).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나 특권을 포기하여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시사한다(막10:45;눅 22:27).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같이' 의 헬라어 '호모이오마티'(* )는'유사함'(similarity)이나 '동일함'(identity)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의 본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셨음을 시사한다(Kent, Lincol-n). 그리스도는 참인간이시다.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그리스도의 겸손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심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로우신분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지극한 겸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 십자가를 지시는데 까지 나아간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 되심에도 불구하고 동등됨을 포기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히 5:8).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Kent, Hawthorne).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립소센'(* )은 '휘페르'(* , '위로')와 '휩소스'(* ,'높은 곳')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지다'라는 의미이다(Kent).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귀(昇貴)를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높이셨음을 시사한다(Robertson, Hawthorne).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바울은 이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이름'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라고 주장하며(De Wette),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Vincent). 그러나 문맥상 '이름'은 11절에 나오는 '주'를 가리킨다(Muller, Weiss, Martin, Kent).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을 소유하신 '주'이심을 시사한다(Hawthorne).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주'라는 이름을주신 목적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케 하여 주로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은 앞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뛰어난 이름'과동일한 것으로 '주'를 가리킨다(Lightfoot, Michael, Moule, Plummer). 그리스도께서'주'(主)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할 대상에 대해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즉 '하늘에 있는 자들'(* , 에푸라니온), '땅에 있는 자들'(* , 에피게이온) '땅 아래 있는 자들'(* , 카타크도니온)이다. 세 대상의 헬라어는 남성과 중성 둘 다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그것을 남성으로 이해해서 이성적(理性的)이며 생물적(生物的) 존재인 천사와 같은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nt, Muller, Martin). 이들은 '에푸라니온'이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 '에피게이온'이 땅에 살아있는 자들, '카타크도니온'이 사단의 무리와 지옥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혹자는 중성으로 해석해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주로 경배하며
복종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oule, 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어떤 사본에서는 제1부정과거 가정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 )를 사용하여 '시인하였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기술한다(* ,B, P )다른 사본에서는 미래 직설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 )를 사용하여 '시인할 것이다'라는 미래적 의미로 기술한다(A, C, D, Textus Receptus). 두 가지 경우 중 문맥상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10절의 '꿇게 하시고'의 헬라어 '캄프세'(* )는 '캄프토'(* ,'굽히다')의 제1부정과거 가정법이기 때문이다(Kent, Hawthorne).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주'라는 칭호를 주심으로 모든 만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라고 시인하게 하셨다. '주'에 대한 시인은 하나님 뜻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Kent).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 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Muller, Kent). 본절의 권면은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있어서 '개인'과 '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엡 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곤'(* )은 현재분사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힘을 부여하시며 우리의 결심과 소원까지도 인도하시는 분임을 시사한다(Hendriksen). 그렇다고 해서 본절이 인간의 자유 의지나 책임적선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일의 계획과 성취에 있어서 그 모든것을 인도하시되 강제적인 방법이나 수단으로 하시지 않는다(Kent).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비록 온전히 이해할 수없을 만큼의 신비일지 모르지만 바울이나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는
교훈이다(Hawthorne, Lenski).
상세하고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6:31
무엇을 먹을까...입을까 하지 말라 - 25절과 맥을 같이 하는 명령으로서 특히 본문의 '하지 말라'는 말은 부정 과거 시상으로 표현되어 '조그만치도 염려하지 말라'는 절대 금지(禁止)를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하나님은 무가치해 보이는 극히 작은 것이라도 크나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 이상의 말할수 없는 풍부하신 관심으로 신자들을 돌보고 계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즉 굶지나 않을까 헐벗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과 걱정을 온전히 떨쳐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계속적인 염려는 당신 백성들의 요구를 미리 아시며(8절) 풍족히 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6:32
심하면서 오직 먹고 마실 것만 추구하는 자들을 통칭한 맡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다. 또한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한 신앙적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세상적 염려와 근심에 쫓기고 있다. 첨부께서...아시느니라 - 신자가 세상일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될 이유가 본절에서 몇 가지로 제시되었다. 그 첫번째는 앞에서와 같이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 없이 생활하는 이방인들의 행위와 같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크나큰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아심'은 단순한 지적 인식(recognition)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그 필요를 채워주되 넉넉히 채워주시는 데까지 미치는 완전하고도 전인적인 인식을 뜻한다(8절).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및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야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이며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稱義)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께서 줄곧 강조해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善)을 행할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 '먼저'(* , 프로톤)는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과 세상적 노력이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정녕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히 선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결국 경건(piety)에도 자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의 두 종류가 있듯이 포부(aspiration)에도 두 종류가 있다. 곧 자신을 위한 포부와 하나님을 위한 포부가 그것이다. 제 3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Stott, Sermon on the mount, p. 172).
이 둘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하겠는가? 이 모든 것(* , 타우타 판타) - 이 어구의 강조점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판타'에 놓여져 있으며, 이는 언급한 전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필요로하는 모든 종류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포부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영혼의 만족과 평안(peace)을 주시며 또 인생의 필요조건을 충분히 채우시겠다는 의미이다.
더하시리라(* , 프로스테쎄세타이) - 오리겐(Origen)은 본문에 관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조그마한 것들을 덤으로 주겠노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겠노라'고 말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우리들 마음에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일시적인 지상의 소모품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양식이어야 하며, 신자들은 이방인의 염려의 대상인 먹을 것, 마실 것에 지배받지 말고 아버지께서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시는 만큼 주실 것을 믿고 하늘의 뜻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고 추구한 모든 것 위에 '덤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딤전 4:8).
=====6:34
내일 일을 위하여(* , 에이스 텐 아우리온) -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일은 언제나 다시 다가오며 따라서 내일의 문제는 결코 오늘 다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의 은혜는 오늘에 족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면 새로운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할 것임을 암시(hint)하셨다. 즉 내일의 염려는 내일의 새 은혜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한 날 괴로움 - 여기서 '괴로움'(* , 카키아)이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적 견지에서 본
'악'을 뜻하나 본문에서는 윤리적 측면의 '죄악'을 뜻하지 않고 인간이 감내(堪耐)하기 힘든 고초, 역경 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말은 가끔 우박으로 인해 수확물을 몽땅 잃어버리는 등의 절망적 재해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70인역(LXX)은 히브리어 '라아'(* )를 '카키아'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라아'는 '악한', '불운한', '곤고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 날 괴로움'이란 우리의 현실에서 각 날(日)들에서 마주치는 온갖 어려움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족하니라(* , 알케톤) - 그 날에 주어진 것은 그 날의 고통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같은 원리, 즉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야 하는 내일에 대한 원리는 결국 염려의 근원적 치유(healing)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넘치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실로 내일 일의 염려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기울여야 할 관심은 오늘로서 끝나야 할 것이며 내일의 불행과 고난(distress)은 오늘 앞당겨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b. Sanhedrin 100b;b. Berakoth 9a). 한편 본문의 교훈적 말씀을 살전 5:16-18과 비교해 볼 때,
이는 단순한 권면과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염려 자체가 불신앙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 '내일'의 주인은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 은혜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멘!
시37:4
<호크마 주석>
여호와를 기뻐하라 - '기뻐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그'(* )는 '부드럽다','유연하다', '즐거워하다'란 뜻이다. 그래서 본 표현은 여호와로 인하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기쁘게 됨'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본 히브리어의 어원을 '분투(奮鬪) 이후에 찾아오는 어떤 기쁨, 희열'로 보는 견해도 있다(D. Kidner). 또한 '너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을 허락하다'를 뜻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VonRad). 이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하고 기쁨을 발견하는 삶을 살 것을 권하는 말을 의미한다고볼 수 있다(욥 22:26 ; 27:10 ; 사 58:14).
네 마음의 소원 - 이러한 사실은 오직 백성의 소망과 기대를 이루시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20:4 ; 21:2 ; 마 5:33 ; 눅 12:31)).
네, 아멘!
요4:23
<호크마 주석>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신령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위의 21절에 벌써 말한 "아버지께 예배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떤 지방, 어떤 민족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신(神)이 아니시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 난 자이면 그를 아버지로 섬길 수 있다. 거듭 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 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벧전 1:23). 사람의 거듭 난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성경 말씀을 듣기 좋아하며, 읽기 좋아하며, 순종하기 좋아함이다. 이렇게 그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가 영적인 자녀로서 영적인 아버지에게 예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신령한 예배이다. "진정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이란 것은, 예수님이 22절에 말씀하신 내용의 성취 형태이다. 이스라엘의 "아는 것"(22절 하반), 곧, 구약적 계시가 신약 시대에 성취된 형태이다. 이것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 사건(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에 근거한 예배가 "진정"으로(진리로)예배함이다. 그것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내포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진리에 순종하고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추측이나 깨달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 )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메시야 약속)이 성취된 사실, 곧,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다(고후 1:20).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신앙적 예배가 될 수밖에 없다. 신앙적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
네, 알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로마서>
=====8:26
이와 같이 - 이 접속사는 성도가 탄식하면서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참음으로 기다림을 지칭한다(Black).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 성령은 성도를 양자로 보증해 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최종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도와 주신다. 성도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계시면서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 16:13) 양자로서의 보증이 성도 안에서 확실히 성취되도록 도와주신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보혜사(保惠師)이시다(요 14:16, 26;16:7). 한편 본절의 '도우시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난틸람바네타이'(* )는 '쉬난틸람바노마이'(* )의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아 준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가운데 본절과, 마르다가 마리아의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인 눅 10:40에만 나온다. 성령께서는 성도가 연약해 있을 때에 성도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고 곁에서 일으켜 세워주며 붙들어 주신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 본 구절은 기도하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성도는 연약하기에
영적 힘을 공급해주는 통로인 기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도는 기도함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기도의 능력도, 기도할 내용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본 구절은 성령께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 즉 성령께서 성도들 편에 서서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실들을 미리 아시고 성도들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신다. 이런 면에서 기도는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의 사역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C.H. Dodd). 성도가 갈등으로 인해 탄식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성령께서도 성도보다 더 심한 탄식으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성도에게는 가장 큰 위로이며 구원에 대한 보증이다.
=====8:27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 본 구절에서 바울은 성부나 성자 하나님과는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성령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의 활동을 구별한다(Black).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구원 계시를 바탕으로 해서 성도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요 14:26;16:7-14).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하나님의 뜻대로'에 해당되는 헬라어 '카타 데온'(* )은 직역하면 '하나님을 따라 '란 의미이다. 여기에는 개역성경처럼 '뜻'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성부 하나님이 구속 사역을 위해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데 그 강조점이 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별개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거대한 구원 계획에 따라 활동하신다.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도 성부의 구원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졌다는 인상이 본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성도로 선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비롯된다. 또한 본 구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입은 자'를
동격(同格)으로 취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이에 대한 헬라어 본문은 '판타 쉬네르게이 에이스 아가돈'(* )으로 직역하면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이다. 즉 만물 또는 모든 일이 선을 목표로 하여 협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본 구절이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로하여금 선을 위해 역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하나님'이 주어가 되지 않고 '만물'이 주어가 된 것은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 , 호 데오스)을 주어로 삽입시키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은 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도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원동력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사실에 있다(27절).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적용은 31-39절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좋은 가르침에 공감합니다.
인생의 꼬인 매듭 앞에서 내 힘으로 발버둥 치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해결책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우리 삶의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는 거룩한 첫 단추이자, 모든 회복의 시작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작음을 인정하는 겸손으로 하나님을 높여 드릴 때, 우리 안에 선한 소원을 두시고 친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풍성히 경험하시길 소망하며 응원합니다.
아멘 🙏
아멘 🙏 🙏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배하며 영광 돌리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마음의 소원을 갖고 기도하게 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멀리 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니, 우리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참으로 그렇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 영광을 돌려 드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거기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권면에 깊이 공감합니다. 첫째도 둘째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따라 사는 것이 복된 길임을 명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내용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생존의 결핍 앞에 서더라도, 모든 필요를 이미 아시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며 '영혼의 평안'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참된 성도의 실력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꼬인 상황을 풀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보다 먼저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관계의 회복이 땅의 고침을 불러오는 가장 강력한 열쇠임을 말씀 속에서 다시금 확인합니다.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찾는 그 겸손의 자리에서, 찢긴 곳을 싸매시고 범사를 강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깊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인생의 엉킨 매듭을 푸는 첫 단추가 예배와 겸손이라는 통찰이, 막막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먼저 붙잡아야 할지 명확한 우선순위를 가르쳐 줍니다.
먹고 사는 원초적인 걱정에 짓눌리기보다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며,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내일 일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오늘 하루를 허락하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때,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경험하는 참 성도의 삶이 되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