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지장사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620번지
485년(신라 소지왕 7) 극달(極達) 화상이 창건했으며,
684년(신문왕 4) 양개(良价)가 창건한 달성군
가창면의 남지장사와 대비되는 절이다.
1040년(고려 정종 6) 최제안(崔齊顔)이 쓴 경주 천룡사
(天龍寺) 중창 관련문서에 따르면, 이 절의 밭이 200결
이나 되었다고 하므로 당시에는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사라고도 불렀다고 하나 이후의 연혁은
별로 전하는 것이 없다.
유가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양리 144번지
동화사의 말사인 유가사는 신라 흥덕왕2년에 도성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절 이름은 비슬산의 바위모습이 아름
다운 구슬과 부처의 형상과 같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그 뒤로 여러차례 중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속 암자로는 수도암, 청신암, 도성암을 거느렸다.
범종각 부근에서 대웅전 지붕 위를 올려다보면 비슬산 바위
군이 기와처럼 대웅전 위에 얹혀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근처에는 도성암과 도통바위 등이 자리잡고 있다.
소재사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봉리 4번지
소재사는 비슬산 남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고 현재의
재난을 없애 주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사찰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여 온다.
1976년에 보수하고 경내에는 대웅전, 명부전,
산령각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단층 맞배집으로 내삼
출목, 외이출목의 다포식 건축이고, 명부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단층 맞배집으로 이익공양식의 건축이다.
가산산성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 98-1번지
1974년 3월 26일 사적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쌓은 석성(石城)으로, 내성은
1640년(인조 18), 외성은 1700년(숙종 26), 중성은 1741년
(영조 17) 각각 완성하였고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성 안에 객사·인화관(人和館)을 비롯
한 관아와 군관청.군기고.보루.포루(砲樓).장대(將臺)
등이 설치된 점으로 보아 행정적 목적보다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한 것 같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쌓는 선 후기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다.
모명재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715-1번지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후 계산동 일대에 정착한
두사충은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
(현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모명재라는 이름도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며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하목정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번지
1995년 5월 12일 대구시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이종문이
세운 정자이다. 하목정이라는 명칭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이종문의 맏아들
이지영(李之英)에게 써준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우측 1칸에는 앞쪽으로 누
1칸을 첨가하고 뒤쪽으로 방 1칸을 더 만들어 평면이
정자형(丁字形)으로 구성되었다. 처마곡선이 부채모양의
곡선으로 된 특이한 형태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영남제일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 90번지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곳에 평지에 축성된 대구 읍성
(邑城)은 1590년(선조23년)에 처음 만들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뒤
1736년(영조 12)에 돌로 다시 쌓아 석성(石城)을 만들
었다. 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진동문(鎭東門), 서문은 달서문(達西門), 남문은 영남
제일관(嶺南第一關),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다.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께 철거
되었다. 지금 대구제일의 향토상징 관문으로서 금호강과
함께 대구시민들이 대자연의 운치를 마음껏 즐기는 곳이다. | |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86번지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양식과 생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종택인 백불고택은 대구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1982.3.4)
된 후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261호로 지정되었으며(2009.6.19), 조선시대(1616년) 학자인 최동집이 세운
모실과 보본당과 사당 등은 4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육신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40번지
박팽년만 후손에 의해 배향되다가 나중에 현손(玄孫)
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육신사의 전신인 낙빈사(洛濱祠)를
지어 제향하여 오다가 1691년(숙종17) 낙빈서원을 건립
하여 제사를 지냈다. 1866년(고종3)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서원(書院)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
하게 되었다.
이후1974년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다.
동화사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31번지
동화사는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동화사라는 이름은 오동나무가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것을 상서롭게 여겨 동화사라 개칭했다 한다.
이후에도 동화사는 여러 번의 중창과 개축을 거쳤고, 현존
하는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영조 때 중창한 것이라 한다.
경내에는 중앙에 대웅전을 비롯하여 봉황새를 상징하는
누각 봉서루와, 천태각, 영상전, 심검당 등이 있고 지난
1992년에 지어진 통일약사여래대불이 있다.
이 대불은 높이가 무려 17m에 이르는 약사여래상으로
통일을 기원하는 의미로 지어졌는데 그 규모만으로도 눈길을
끈다. 이외에도 금당암 삼층석탑(보물 제248호), 동화사
당간지주(보물 제254호) 등 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있다.
곽재우장군묘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곽재우 장군의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이다.
조선 명종 7년(1552년) 8월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천리
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군이 의령
에서 의병을 모아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입고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후 성주, 진주목사,
함경감사 등의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은퇴한
후 낙동강변에다 망우정을 세워 그 곳에서 지냈다.
상무헌 허공신도비
대구광역시 달서구 장동산 46번지
상무헌 허공 신도비는 가선대부 허득량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57년 김희순이 건립한 것이다. 비명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 15년 정축년에 청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
다가 1637년 광주쌍령에서 순직하였으며 허득량의
자는 국필, 본관은 김해다. 벼슬은 도총부 부총관
(都摠府 副摠官)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자의금부사
훈련원사에 이르렀다. 그는 청렴결백한 관리로서
청나라가 침공해 왔을 때 자청하여 말을 타고 적진을
혼자 달려 적의 선봉 몇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니 적이
크게 놀라 공을 가리켜 백마장군이라 하고 두려워하였다.
현풍향교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상리 326-1번지
문화재 자료 제 27호이다. 원래 있었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전후 현감 이영도가 구교동에 중건하였던
것을 영조때 현감을 지낸 김광태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그 후 고종 광무5년에 현감 허길이 중수하고,
1931년에 군수 신현구가 다시 대성전, 명륜당 및 동.서무를
중수하였다.
삼가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번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 |
용연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01번지
용연사는비슬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로 달성군
옥포면에 소재한다. 진입로 입구에 조성된 벚꽃길이
유명하며, 계곡 입구에 이르면 용연사의 명물 '옥연지'가
나타난다. 용연사는 912년(신라 신덕왕 1년)보양선사
에 의해 창건되었다. 용연사 적멸보궁 뒤뜰에는 자장율
사가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세존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조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이중기단 위에 석종형
탑신을 세우고 팔부신상, 사천왕상으로 조각한 이 석조
계단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석조예술품으로 보물
제 539호로 지정되어 있다.
파계사 :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7번지
동화사에서 서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있는 파계사
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팔공산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역시 심지왕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타자 계관법사가 중창하였으며,
그후 숙종연간에 현응스님이 새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1981년 봄에 말끔히 포장된 길을 따라 주차장이 있는
입구에 이르면 10여개의 식당과 매점 등이 늘어선
가운데 절로 오르는 작은 길이 나 있다. 약 1㎞ 남짓한
울창한 산림으로 이루어진 이 길을 걷다보면 완전히
속세를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호젓한 정취를
느껴진다. 예전에 성철스님이 이곳 성전암에 머무르면서
수도하기도 했다.
남지장사 :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865번지
남지장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4년(684)에 양개조사가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에 고승 무학대사가
수도한 곳이기도 하며,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효종 4년(1653) 인혜
대사가 청련암과 함께 다시 세웠으나,
순조 6년(1806)에 또 화재가 발생하여 2년 뒤 다시 세웠다고 한다. 청련암은 법당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겸한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그러나 실제로 법당의 기능보다 강당의 기능을 가진 건물로 ‘인법당’으로도 부르고 있다.
남지장사 청련암은 부분적으로 옛 건축수법을 간직하고 있는 소박한 구조의 건물이다. 부속암자인 청련암은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김굉필 신도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구지면 도동리에 소재하는 도동서원 좌측편에 있는 이
신도비는 김굉필 선생의 유덕을 기리고 있다.
김대진의 후손과 경남감사 이민구의 협력으로 세운
비석이며 그 글은 여헌 장현광이 지었고 사헌부
감찰인 배홍우가 썼다.
옻골동산 : 대구광역시 북구 구암동 6번지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3지구의 국우터널 근처에 있는
공원이다. 주변에 동천공원과 운암지공원이 있다.
여름이면 잔디광장과 푸른 숲이 인상적인 곳으로
겨울이면 다소 한적하다. 시민들의 소풍 장소 및
단체구기를 위한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칠곡향교 :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600번지
향교는 문묘와 어진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유학을 가르
쳐 인재를 양성하는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이었다.
칠곡향교는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묘당인 대성전을 뒤로 배치하였다.
대구향교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735-4번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 李成桂)는 이전 고려 왕조의
불교 중심 정책을 억제하고 일상 생활 예절의 근본이 되는
儒學(유학)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그와 동시에 교육을 통해 백성을 문맹으로부터 해방시키
고, 지역전통문화를 선도하며, 유학의 성현등의 제례의식
을 올려 예절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향교를 세웠고,
대구향교도 이 중에 하나이다.
향교는 당초 1398년 교동에 세워졌으나 1592년 임진
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932년 일제침략기 유림집회로
인한 항일운동 봉쇄를 위해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대성전에서는 유교문화의 중흥을 위해 영남각지에서
유림등이 모여들어 연2회 춘추중 월(2.8월) 상정일
(上丁日)에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