諷寄鄭仁弘 — 정인홍에게 풍자하여 부치다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 숙부(肅夫). 호: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 시호: 문정(文貞). 조식의 문인으로, 이조좌랑, 홍문관직제학, 대사성, 전라도관찰사, 안동부사 등을 두루 엮임 하였으며,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었다.
山人不可尋 산인불가심
山路黑如漆 산로흑여칠
何以贈夫君 하이증부군
巖頭一片月 암두일편월
산속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산길은 칠흑처럼 어둡구나.
무엇을 그대에게 보내드릴까,
바위 끝에 걸린 한 조각 달뿐이네.
짧지만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제목의 諷(풍) 때문에 단순한 증시(贈詩)가 아니라 정인홍에게 어떤 뜻을 우회적으로 일깨워 주는 풍간(諷諫)의 성격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마지막의 「巖頭一片月」, 즉 ‘바위 위 한 조각 밝은 달’과 앞 구절의 「山路黑如漆」이라는 어둠이 강하게 대비된다.
동강 김우옹(金宇顒,1540~1603)과 내암 정인홍(鄭仁弘,1536~1623)은 모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문인으로, 조선 중기 영남의 남명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같은 스승에게 배운 동문(同門)이자 영남 사림의 동지였지만, 정치적 입장과 처신에서는 차이를 보인 인물들이다.
특히 김우옹의 한시 「諷寄鄭仁弘(풍기정인홍)」, 곧 '정인홍에게 풍자하여 부치다'라는 작품을 이해하려면 두 사람의 학문적 관계와 당시의 붕당정치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암 정인홍의 생애>
정인홍(鄭仁弘 · 1536~1623) 본관: 서산(瑞山). 자: 덕원(德遠). 호: 내암(來庵). 출생지: 경상도 합천. 주요 관직: 대사헌·우의정·좌의정·영의정
저서: 『내암집(來庵集)』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평가받으며, 김우옹·오건·최영경·곽재우 등과 함께 남명학파를 대표하였다. 학문에서는 의리와 실천을 중시하였으며, 정치에서는 강직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1573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
1575년 황간현감으로 재직
1581년 사헌부 장령에 임명
1589년 기축옥사 이후 북인의 주요 인물로 부상
1592년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대북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됨
1611년 이언적·이황을 비판한 회퇴변척 논쟁
1612년 우의정에 임명
1618년 영의정에 오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처형
1908년 관작이 회복되고 신원됨
<동강 김우옹과 정인홍의 관계>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이다.
김우옹은 성주 출신이고 정인홍은 합천 출신이다.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가까우며 남명학파의 학문적 기반이 형성된 영남 지역에 속한다. 남명학은 특히 경(敬)과 의(義)를 중시하고, 학문이 현실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김우옹과 정인홍은 이러한 학문적 전통을 공유하였다.
동인 계열에서 활동한 정치적 동지로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형성되자 남명학파의 많은 인물은 동인에 참여하였다. 정인홍은 서인 정철과 윤두수 등을 비판하였으며, 1589년 기축옥사 이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자 북인의 영수가 되었다.
김우옹 역시 동인 계열의 사림으로 활동하였고, 기축옥사 때 정치적 탄압을 받아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단순히 같은 스승을 모신 관계를 넘어, 당대 정치적 격변을 함께 겪은 사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남명 조식은 평소 몸에 방울을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경계하고, 칼을 곁에 두어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조식은 방울은 김우옹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전하며 자신의 심법(心法)을 전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두 사람이 남명학파에서 차지한 위상을 잘 보여준다.
정인홍의 공적과 역사적 논란
정인홍은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역사적 인물이다.
임진왜란의 의병장으로서의 공적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성주·고령 등지의 왜군에 맞섰으며, 영남 지역의 방어에 기여하였다.
반면 광해군 시기에는 대북의 영수로서 반대 세력에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1611년에는 스승 조식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려는 과정에서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비판해 성균관 유생들과 충돌하였다. 이 사건을 회퇴변척(晦退辨斥)이라 한다.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둘러싼 정치적 사건에서도 정인홍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이 있다. 영창대군 지지 세력의 제거에는 찬성했으나 영창대군의 처형에는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폐모론과 관련해서는 정치적 책임이 지적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처형되었으나, 후대에는 의병 활동과 학문적 업적을 재조명하는 연구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