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 / 이헌 조미경
경기도 포천과 남양주에 걸쳐 있는 광릉을 다녀왔다
국보문학회에서 산악회 트레킹으로 정한 광릉, 조선 시대의 능을 보며 역사를 배워 본다.
지척에 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방문을 했다.
광릉으로 가는 길은 예전 아들이 포천에서 군 생활을 할 때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아침에는 햇볕이 쨍쨍하더니, 광릉에 도착해서 능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비가 내렸다.
비는 잠깐 내리다 그쳤다. 하늘은 잠시 내린 비로 맑게 개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왕조의 능이 모두 42개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중 40기만 세계문화유산인 유네스코에 등재가 되어 있다고 한다. 나머지 2기의 능은 지금 현재 북한에 있어 사실상 볼 수는 없다고 한다. 광릉은 다른 능과 마찬 가지로 높은 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곧게 뻗어 있고 나무들은 맑은 공기를 시원하게 내뿜으며 방문객들을 반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에 마음을 담아 본다. 파릇한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지 못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가슴에 담아 본다.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왕릉을 조성할 때 죽을 때 빨리 썩어야 하니 석곽과 묘실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자신에게 큰 돈을 쓰지 말고 간소하게 능을 조성하라는 뜻에서 저렇게 말한 것이다. 정확히는 석실 형태의 석곽을 만든 후 안에 관을 집어넣는 이전의 조선왕릉과 달리 세조는 회곽묘 형태로 관이 들어갈 구덩이만 석회로 다진 회곽에 안장했는데, 역설적으로 석회가 주성분인 삼물(三物·석회와 황토, 가는 모래를 2 : 1 : 1로 섞은 것)이 돌처럼 굳어 방수 기능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회곽에 안치된 시신은 석곽에서보다 천천히 썩는다. 그걸 넘어서 사실상 안 썩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무덤에서 미라가 대거 발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에는 왕릉 건축과 조성 과정에서 엄청난 돈과 백성들의 인력이 동원되어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는데 세조가 부역 인원과 조성 비용을 절반 이상 감축하게 한 것이다. 그 외에도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시신이 빨리 흙이 되어야 좋다고 생각한 이유도 있었다.
이렇게 광릉은 평소 왕릉 조성 비용의 절반 남짓으로 묘역이 조성되었고, 덕분에 왕릉 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광릉은 조선 왕조는 물론 조선 장례 문화 변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후의 왕릉 조성에도 큰 모범이 되었다. 조선의 관혼상제 예법을 적시한 주자가례에도 장례 방식이 회곽묘로 되어있으나, 정작 회곽 묘의 원산인 중국에선 회곽묘가 흔하지 않다. 반면 조선은 사대부의 상당수가 회곽묘다. 1483년 그의 정실 정희왕후 윤씨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묻혔다. 원래는 정창손의 조부인 정흠지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시켰다.
원래 정해진 능호(陵號)는 지금의 이름인 광릉이 아닌, 태릉(泰陵)이었다.[1] 그러다 예종이 태릉을 제시했는데 신숙주가 재논의 과정에서 태릉은 암군이자 후대의 평가가 좋지 않은 당 현종의 능호와 똑같다는 이유로 반대해서, 결국 광릉(光陵)으로 정해진다. 이 태릉(泰陵)이란 능호는 나중에 문정왕후의 능호가 된다.
인테넷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