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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곡1리(과상마을) 표석에서...... 11:31:52
산양면 연소리 룸비니유치원 주차장에 도착 후 출발..... 09:17:23
연화고저수지가 있는 연소마을을 향하여...
연소2리 마을 입구에 수로가 높이 위로 지나간다.
崇禮之鄕 우본2리 송본리(솔개이) 솔벗회 “증” 2002.05.08.
우본2리 마을 풍경
우본2리 승강장
우본1리 마을회관(붉은 벽돌집) 옆 길에 할머니가 밀차를 밀며 나오신다..
우본저수지 둑에서 보이는 관리가 잘된 산소들의 모습....
저수지 둑 아래 농막이 아름다운 공원 같다.
우본저수지에 물이 가득 고여있어 마음이 넉넉하다.. 10:10:55
處士仁川蔡公鴻奎之墓 配孺人咸陽朴氏 祔(부:합장할 부)
再從姪(재종질) 魯昌君이 來請於其 妹兄(매형) 墓碣之文이어늘 余以不文으로 何敢當是役也리오. 謹按公의 諱는 鴻奎요, 字는 善一이오, 號는 愚隱이오, 姓은 蔡氏니 係出仁川이라. 高麗朝 同知樞密院事 諱 先茂로 爲上祖하다. 有諱 寶文이니 大提學 錦城公이오. 有諱 貴河니 戶曹典書로 號는 多義堂이오. 有諱倫이니 侍講院左弼善이오. 生諱 申保니 南陽府使로 贈 吏曹參判하여 封 邵城君하니 號는 灣溪라 生諱 壽니 禮曹參判 藝文提學으로 封 仁川君하니 諡(시)는 襄靖(양정)이오, 號는 懶齊(라제)라 生諱 紹權은 刑曹判書 弘文館提學이오, 號는 拙齊(졸제)라 生諱 無怠니 南臺持平이라. 生諱 有孚니 參奉으로 贈 判決事하다. 生諱 得湖니 參奉通政이오. 生諱 克稽(극계)니 忠義衛(충의위)요. 生諱 荊龜(형구)니 號는 自牧堂이라, 道德行義가 一世推仰하고 文集 二冊이 行于世하니 於公에 爲八代祖也라, 高祖 諱는 灝東(호동)이오. 曾祖 諱는 謙禹(겸우)요 祖 諱는 周玉이오, 考(고:죽은 아버지) 諱는 張鎭이라, 妣(비:죽은 어미)는 孺人宣城金氏樂欽之女라 生公於 山陽 愚本 新村里第하니, 公이 儀表가 磅磚(방전)하고 性賦 淳厚(성부순후)하고 在家以孝友爲本하고 出門以忠信爲主하고 非義之物不取하고 非禮之言不聽하니 鄕人이 皆稱善人하더라. 公이 宿病으로 壬申十一月 二十四日 考終于 江原道 東海市 三和洞第하니 享年 七十七이라. 葬于 山陽面 愚本里 貯水池 前山 酉坐(유좌: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앉음)하다. 配는 咸陽朴氏 晩植之女요. 吏曹正郞 從鱗之后니 有婦德하다. 生 三男五女하니 男永柱는 其聰敏之才와 溫雅之性으로 定省之道와 甘肯之供을 極力極誠하고 言語之謹愼(근신)과 行事之正直은 人之所推 仰者多而現在 東海市 議會議長이다. 銘曰 仰瞻仁蔡(앙첨:처다봄)하니 嶠南(교남:영남)名族이라. 世世縉笏(세세진홀:대대로 벼슬에 나감)이 如水不息(여수불식:물과 같이 쉬지 않음)이라 爲仁所致요. 積德所發이라. 雅言不信커든 示此銘碣하라.
壬申年 十二月 日
西紀 一九一五年 乙卯 陰 十一月 二十一日 生. 癸未 十一月二十日 卒 墳 辛坐
※ 從姪(종질 : 사촌형제의 아들), 妹兄(매형 : 손위 누이의 남편),
墓碣(묘갈 : 작은 비석), 諡(시호 시 : 생전의 행적에 의하여 임금이 내려주는 칭호),
우본저수지 산 아래 지름길로 내려 온다..
포장농로가 막혀서 논둑으로 건너온다...
志山醴泉林公達圭之墓 配海州吳應淑女史 附左
志山醴泉林公墓表(묘표 :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
여기는 仁術과 育英事業으로 一生을 바친 林公의 墓所이다. 公의 諱는 達圭요 志山은 그의 號이고 貫은 醴泉이다. 林氏는 高麗名閥로서 金紫光祿大夫 文憲公 諱 季美이고 同中書門下侍郞 文烈公 諱 光庇와 玉川書院에 配享된 西河先生 諱椿과 조선조에 들어와 襄陽君 諱自蕃은 顯祖이다. 曾祖의 諱는 盛洙요 祖의 諱는 永相 號는 然石이며 考(죽은 아버지)의 諱는 炳健 號는 海雲으로 經史諸子에 博通하고 周遊全國한 후 金剛山에 들어가 濟世壽民하는 學問을 修學하고 돌아와 이 나라 中都 大田에다 韓醫院 惠和堂을 開設하였다. 妣(죽은 어머니)는 坡平 尹氏 世炳의 따님이며 相壁의 孫女로 名門의 後裔답게 賢淑한 婦德이 뛰어나 奉祭祀接客과 子女敎育에 남다른 熱誠을 보여 家門을 빛내었다. 公은 一九三一年 辛未 正月 二十四日 出生하고 一九八八年 戊辰 十月 九日에 逝去하니 墓는 先塋下 良坐 이다. 配는 海州 吳氏 京鎬의 따님이며 忠烈公 達濟의 後孫으로 賢哲한 女君子風이 있어 子女敎育과 志山公의 社會事業에 內助한 功이 많았으므로 後人의 模範이 된다고 稱頌이 자자하였다. 一九三四年 甲戌 四月 九日에 출생하고 一九九0年 庚午 六月 三十日에 卒하니 墓는 雙墳이다. 二男三女를 養育하니 長男 用哲은 載寧 李甲燮의 따님 智愛와 결혼 聖勳과 志勳을 낳았고 次男은 民哲이다. 長女 海京은 平山申宗憲과 결혼 榮哉 榮旭을 두었다. 公은 어린 시절 고향 聞慶에서 雄志를 길렀고 그 후 父親을 따라 忠淸道 大田으로 와서 大興校를 거쳐 慶熙大學校 韓醫科大學을 졸업한 후 韓醫師로 先業을 계승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인술을 베풀었던바 그 명성이 全國에 떨쳐졌다. 公은 仁術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덕을 베풀기 위해 學校法人 惠和學園 大田大學校를 設立하여 英材敎育을 畢生의 樂으로 삼았다. 어느 날 公의 姪壻(조카사위) 柳志晟君이 本人을 찾아와서 墓文을 請하기에 公의 行績의 大綱을 기록하고 이에 頌詞를 붙인다.
公의 仁術로 博施濟衆(박시제중: 널리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뭇 사람을 구제함)하였으니 이는 仁이요, 育英으로 晩年의 業을 삼았으니 智이며, 宣祖를 위하여 南皐亭과 海雲亭 等을 創建하고 南皐亭遺稿와 海雲亭詩集까지 刊行 반포하였으니 이는 孝이며, 가정을 잘 다스리고 兄第間에 우애하였으니 이는 德이다. 인생이 세상에 살면서 仁智孝德 중 한가지고 成就하기 어려운데 公은 네가지를 이루었으니 이 얼마나 偉大한가 偉大한 이 功績 옥돌에 깊이 새겨 永遠히 전하면 子孫은 본받고 世人은 稱頌하리라.
西紀 一九九一年 十月 日
學術會員 서울大學校 文學博士 柳 洪 烈 謹撰(근찬 : 삼가 짓다)
東洋書道會 會 長 宋 浚 永 謹書(근서 : 삼가 쓰다)
임달규님 산소에서 보이는 작은 정자가 보인다.
가랑비가 뿌려서 정자에서 간식도 즐기고 담소하며 비를 피했다.
정면의 작은 건물은 하수처리장이고 우측의 마을은 과곡1리..
산양면 과곡 마을 하수처리 시설
처리용량 : 60세제곱미터 /하루 준공일 : 2009.06 ※ 60세제곱미터 = 60000L= 3333드럼
과곡1리 입구의 석관지저수지와 왕버들나무...
보 호 수
품격 : 면나무 고유번호 : 11-26-4-1 지정일자 : 1982. 10. 26
수종 : 왕버들 수 령 : 350년 소재지 : 문경시 산양면 과곡리 893번지
김주범 정효각(金周範 旌孝閣)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과곡1리
효자 김주범(1827~1859. 산양면 과곡리 출신)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서 다 하였다. 어려운 살림에도 어버이에게 음식을 해드리고 뜻을 잘 받들어 부모의 얼굴에서 항상 기뻐하는 빛이 사라지질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부친이 병이 나서 여러 달을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애통히 여겨 주야를 가리지 않고 치료를 하였으나 별 효염이 없자 병세의 급함을 대변(大便)의 달고 쓴 것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짐작하였다. 부친의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고 숨도 차서 死境을 헤매게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니 얼마 뒤 끊겼던 숨결이 다시 이어지고, 그 후 10년의 수명을 연장케 하였다. 이렇듯 자신의 살을 상하게 하면서도 아픈 줄을 모르고 손가락을 잘라 이미 끊어진 부친의 생명을 소생시켜 여러 해 수명을 연장케 함은 깊은 효심의 발로(發露)라 하겠다.이러한 효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관영의 장계(狀啓)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증직)되고 고종 29년(1892년) 정려(旌閭)가 내려져 정효각을 세웠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1992년 재중수(再重修)를 했다.
(비각 내의 비석문)
孝子 贈 童蒙敎官 朝奉 大夫 金寧 金周範 之 閭
과곡1리 마을회관
果 谷 沿 革
동위치는 산양면소재지 동쪽 4km 지점이요 해발 70m 동경128도 북위 36도에 위치 하고 잇다. 동명은 원래 居默洞(거묵동)으로서 新羅中期까지 近品縣에 속하여 왔으며 統一新羅 景德王16년(757)에는 嘉猷縣으로 예천에 속하여 오면서 高麗顯宗9년(1018)에 山陽縣으로 개칭하면서 尙州속현이 되었다. 朝鮮明宗 庚戌1550년에 入鄕先祖 默溪公할아버지께서 蓮花浮水形局의 吉地를 擇하여 정착하게 되면서 과일나무와 뽕나무를 많이 심어 朝鮮顯宗1665년에 尙州果桑洞으로 改稱되다. 그 후 양쪽마을이 생겼다하여 숙종 1715년 果雙洞으로 개칭되고, 高宗32년(1895년) 尙州郡 山東面 果上里로 개칭 그 후 1914년 果上果下 斗溪店村을 합하여 慶北 聞慶郡 山陽面 果谷里로 부르게 되었다. 1950년 里洞行政區域改編에 의하여 果谷1里(果上) 果谷2里(果下) 果谷3里(말기점마)로 분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 마을 터를 잡은이는 慶州 金氏와 慶州 孫氏이다. 세월이 흘러 金寧金氏가 들어 온 후 慶州金氏와 慶州孫氏는 각처로 분산 이주하고 오직 金寧金氏門中이 東隱公할아버지를 慕鵑祠(모견사)에 모시고 수백여호 集成村을 이루고 살아왔다. 洞口에는 45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왕버드나무가 龜蓮池上에 마을의 상징으로 서 있으며 東은 發蔭山 箕川愚本을 접하고 西는 社稷峰下縣里 南은 松本里 北은 飛鳥山下 富岩里와 접경하고 洞中央에는 慕鵑堂 一名 東隱齊遠 慕齊南岡에 ???????(데크에 가려서 보이지 않음)
果谷會館竣工 1997년 5월
옛 금동초등학교가 지난날 근무했던 선생님들의 추억을 간직하며 잘 가꾸어져 있어 감사했다.
금동초등학교를 배경으로... 11:18:16
황금빛 잔디가 공원같고 선명한 건물이 꿈속의 추억을 되새기게한다...
과곡1리 출신 김현오님의 아들 김규연군의 서울대학교 정치외교과 합격 축하 현수막....
길가의 울타리 속에 당나귀 두 마리가 반긴다...
과곡3리 마을 회관건립기념비...
경북톱밥 공장 안에 톱밥이 쌓여 있고, 소나무가 엄청 많이 쌓여 있다..
연소승강장... 여기서 우측길로 연소1리마을로 넘어간다..
마을 뒤편의 첫집...
연소1리 마을회관 광장..
마을 회관 광장 앞의 보호수(왕버들나무)....
조상의 뜻을 기리는 효의 실행으로 후손들의 정성이 돋보인다..
대한불교조계종 개운사와 룸비니유치원... 12:21:43
첫댓글 초미세먼지를 걱정하며 나섰는데 가랑비가 오락가락하여 바닥이 젖어서 걷기에는 적당하였다. 처음 가는 길이라 호기심과 낯선 곳의 풍경과 새로운 볼거리와 풍경 그리고 마을마다 간직한 유적과 인물들의 생애는 산소의 비석을 통하여 살필 수 있고, 폐교되어 과거 근무했던 교직원들의 추억이 사라진 곳이 많았는데, 금동국민학교는 너무나 잘 가꾸어져 있어, 관리인의 노력에 감사하고 마음이 매우 즐거웠다. 엄대장님의 해박한 지식으로 탐방하면서 주변 설명과 경험담은 언제나 활력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선비의 고장이자 穀倉地帶인 山陽이다.룸비니유치원을 운영하는 개운사를 출발하여 느릿한 고개를 넘어서니 평화스런 蓮沼里이다.마을 건너가 龍宮인데 이곳이 山陽이라면 行政區域 說定부터 이상하다.완곡하게 돌아서니 별반 特徵없는 2里가 전개되고 韓牛畜舍가 연이어 나온다.夏節氣에는 惡臭도 상당하리라.멀리 보이는 愚本里로 進入하는 海平들에 들어서니 논 하나가 50마지기도 훨씬 더 될것 같은 큰규모에 감탄한다.내친김에 愚本貯水池 언덕으로 올라서니 바다같은 貯水池로 넓은 龍宮들을 관개한다.마을은 쇄락한듯 초라하나 옛부터 物産이 豊富하여 여유롭게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보인다.果谷里는 最上位마을답게 높은 지대에,정돈되고 청결하게 가꾸어졌다.김녕김씨 集姓村의 비석과 김규연군의 서울대 입학 祝賀 현수막부터 모든게 여유가 있고 閉校된 錦東初等은 바로 開校해도 될 정도로 단정하다.비록 우리완 아무 관련이 없어도 노력한 분 들에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歸路에 大田大學校 設立者인 林達圭 님의 墓所를 지났다.50여년전 客地에서 成功하여 故鄕과 母校 發展에 크게 寄與하셨다는 傳說的 人物이다.鹿門里를 들렸으면 이 지방 最古의 古屋을 살폈을텐데, 蓮沼里로 가는 지름길로 들어서니 지나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