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聞罷官作) 관직에서 파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 허균(許筠)
禮敎寧拘放(예교녕구방) 예교가 어찌 구속하거나 자유롭게 하리오,
浮沈只任情(부침지임정) 인생의 부침 단지 내 정감에 맡기려 하네.
君須用君法(군수용군법) 그대는 그대 법대로 하시게,
吾自達吾生(오자달오생) 나는 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겠네.
親友來相慰(친우래상위) 친한 벗들은 찾아와 위로하는데
妻孥意不平(처노의불평) 처자식들은 내심 불평을 하네.
歡然若有得(환연약유득) 기쁘게 터득한 게 있는 듯하니,
李杜幸齊名(이두행제명) 이응, 두밀과 명성을 나란히 하게 되었구려.
▷이두(李杜)는 중국 후한 때의 이응(李膺)과 두밀(杜密)을 지칭하는 것인데, 두 사람 모두 당쟁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인물들이다
【감상】
명문가 자제로 태어났지만 시대의 반역아요. 이단아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교산(蛟山) 허균(許筠) 선생! 그가 1606년 삼척부사로 부임했다가 불상을 모시고 염불을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당한 뒤에 지은 작품이다.
이 시의 첫 번째 연(首聯)에서 그는 사람의 자유로운 행동을 얽어매고 있는 예교니 법도니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정감이 가리키는 바에 따라 살아나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성리학의 심성론에 의하면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 받는 성(性)에는 선(善)만이 존재하지만, 외부의 자극에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정(情)은 악(惡)할 수도 있기 때문에, 오직 선하기만 한 성을 발현해야 참다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주장과 반대로 허위나 가식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정(情)이야말로 인간과 문학의 진정성을 보장해 준다고 한 것이다. 시인은 일찍이 “남녀 정욕은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이요, 분별의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으므로 성인의 예교를 어길지언정 천부의 본성을 위배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성리학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짓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떳떳하게 했다. 미련(尾聯)에 나오는 이두(李杜)는 중국 후한 때의 이응(李膺)과 두밀(杜密)을 지칭하는 것인데, 두 사람 모두 당쟁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인물들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에서 시인은 비록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관직에서 쫓겨나더라도 자신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며 살아가겠노라는 자유인의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비슷한 처지로 관직을 쫓겨난 이응, 두밀과 명성을 함께하게 되었다며 내심 흐뭇해하고 있다.
교산 허균 선생은 1569년(선조 3) 경상도 관찰사인 아버지 허엽과 둘째 부인인 강릉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명문가로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수제자이자 높은 벼슬을 지낸 동인의 거두였고, 맏형 허성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예단한 인물이며, 둘째형 허봉은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썼고, 누이는 천재 여류시인 난설헌이었다. 이런 가정배경으로 어릴 적부터 유성룡과 같은 명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명문가의 자녀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또 서자 출신 이달로부터 시를 배웠는데, 이달은 허균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허균은 아홉 살 때부터 시를 지으며 천재로 일컬어졌고, 그의 누이도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열두 살 때 아버지 허엽이 세상을 떠나자 더욱 문학에 전념했다.
열일곱 살 때 초시에 급제하고 생원시를 앞두었을 무렵 둘째 형 허봉이 이이의 행적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서인의 공격을 받고 유배를 당한 후 세상을 떠났다. 또 이듬해에는 누이 난설헌까지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죽음은 그에게 큰 고통을 주었지만 그는 이 슬픔을 극복하고 열여덟 살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그러나 곧 임진왜란이 터졌고, 부인 김씨가 피란 중에 첫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계속되는 비극은 그를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만들었다. 결국 스물여섯 살 때인 1594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 여섯 달 만에 파직됐다. 그 뒤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 시복시정 등을 거쳐 1604년 수안군수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고 또다시 파직되었다.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주어 중국에서 출판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석 달이 못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했다는 탄핵을 받고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가 또다시 파직되었다. 거듭되는 파직에도 그는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썩어빠진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 없었고, 선비들의 치졸하고도 위선적인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불우한 문인이나 시인들과 어울리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서자, 승려, 무사들과 한패가 되어 술로 세월을 보냈다.
【작자 소개】
허균(許筠:1569~1618년)은 조선 중기 때의 문인, 학자이며 호는 교산(蛟山)이다. 양천 허씨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허난설헌은 그의 누이였다. 성품이 경박하였다거나, 기녀들을 데리고 놀았다거나, 참선을 하고 불교를 숭상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벼슬에서 파직되는 경우가 많았다. 벼슬이 순탄치 못했음에도 광해군 때 형조판서, 좌찬성에 이르렀다.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다. 반대하는 무리로부터 ‘천지간의 한 괴물’, ‘올빼미 같고 개돼지 같은 인물’로 폄하되었지만, 후대에 와서는 ‘중세를 뛰어넘는’ 대표적인 문인, 사상가로 평가된다.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다.
[출처] 문파관작(聞罷官作)|작성자/지족상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