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 아래 무릎을 꿇고
봄, 여름 내내 상추를 따 먹었지요
그동안 상추를 앉은뱅이로만 알았지 뭐예요
따고 또 따도,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새잎을 밀어내는 상추 때문에
나, 사실 상처 받았어요
끝까지 가보겠다는 듯
땀을 뻘뻘 흘리며 꽃대 올리는 상추를 보고
나, 눈물 났다니까요
상추꽃이 하나둘 작은 입들을 벌렸다 오므리면
상추 주변으로 노을이 펴요
이제 나의 숙제만 남았어요
씨앗 받는 일
두 손을 깨끗이 씻어야겠어요
이처럼 거룩한 생을,
제가 언제 또 받아 안아보겠어요
펄펄 끓는 태양 아래 무릎을 꿇고
오늘, 상추의 온 생애를
두 손으로 받아 모셔요
살구
장마철이었다
떨어지지 않고
붙어, 매달려 있을 수 있다면
한껏 뺨을 맞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빰을 실컷 맞고서
해가 난 뒤에는 미련 없이 떨어지리라
그날도 마당에는 비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엄마가 실컷 나를 때려줬으면
그랬으면, 나도 힘껏 악다구니를 날렸을 텐데
엄마는 말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살구는 너무 익었다
아직 보송한 살구를 떼내어 한입 문다
조금 남은 신맛이 죄책감처럼 혀끝을 떠나지 않았다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뺨을
세차게 내리치고 싶어지는 계절이었다
나를 대신해
누군가, 뺨이 붉어지는 젖은 오후였다
맨드라미
꽃만 보였지
꽃만 보여서
줄기와 잎사귀에 얼비친 실핏줄은
집에 와서야 뒤꿈치를 보고 알았네
한발짝 뒤에 묻어오는 피의 이야기
꽃은 겹겹의 미로를 품고 있었네
누가 맨처음 그 붉은 길을 열었을까
미로는 미로라는 이름을 얻었을 뿐
미로 속에는 길만 있지
길만 보이지
뱀의 혀가 핥고 지나간 듯
허물만 남은 길은 저 혼자 일렁이고
너만 있지
너만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잠시,
난 맨드라미 심장이 되어
홍순영
인천 출생
2011년 <<시인동네>> 등단
시집<<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