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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박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의향기
이른바 ‘내재적(內在的) 접근법’이라는 희한한 논법이 있다. 북한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북한 나름의 잣대로 북한을 봐야지, 외부의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북한의 인권문제도 북한이 처한 특수상황을 이해하면 왜 그런지 수긍할 수 있고, 또 수긍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소가 웃을 소리다.
그런데 그런 논자들은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한 번도 그런 ‘내재적 접근법’을 써본 적이 없다. 그들의 ‘내재적 접근법’으로 본다면 5·16 같은 쿠데타도 충분히 도리 없이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사태도 “은인자중하던 군(軍)은 마침내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조국 근대화를 위해…”라는 그 나름대로의 자기 명분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내재적 접근법으로 이해해야…” 하는 그들이 남쪽의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서는 ‘자유’ ‘민주’ ‘인권’이라는 외부(서구)의 잣대를 들이밀며 질타했다. 필자는 물론 그때 그들과 함께 ‘자유’ ‘민주’ ‘인권’의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산업화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민주화의 정당성 또한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한국의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문명세계의 보편적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김정일 수령독재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가?
이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남한은 자본주의, 북한은 사회주의…. 그러니까 당연히 잣대를 달리해야….” “북한은 고립무원(孤立無援),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어째서 “자유·민주·인권 타령은 서구식 민주주의, 그래서 우리는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해야…”라던 권위주의 정권의 상황논리에 맞서 그토록 목숨 바쳐 싸웠다는 것인가?
바로 ‘자유’ ‘민주’ ‘인권’은 체제의 차이를 막론한, 그리고 상황의 차이를 막론한 인류 보편의 가치라면서 그렇게 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김정일 폭정을 굳이 감싸고 돌겠다고 하는 데야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들의 이런 모순된 궤변과 억지에 대해서는 일일이 대적할 가치조차 없지만,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이 중국 방문 중에 북한의 ‘체제 변환(regime transformation)’에 대한 미국 인사들의 언급에 대해 “자기(서구)네 잣대를 타국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며 또 그 ‘내재적 접근법’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고 다닌다니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렇다면 그저 자고 깨면 ‘남조선 혁명’을 불어대며 자기들의 잣대를 대한민국에 강제하려는 김정일의 대남 선동에 대해서는 왜 단 한마디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가?
자기들을 대통령 시켜주고, 장관 국회의원 시켜준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매사에 그토록 엄격한 잣대로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대한민국을 아예 말살하려고 6·25를 일으키고, 청와대를 기습하고, 아웅산을 테러하고, KAL기를 폭파하고, 마약을 밀매하고, 위조 달러를 찍어내고, 심지어는 일본 피랍자들의 유골까지 바꿔치기하는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는 왜 우리더러 입도 벙긋하지 말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고 분통 터지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또 “북한이 그런 줄은 알지만 그것을 너무 시비하다가는 전쟁 날까봐…”라고 둘러댈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때론 가차없이 매도하던 과거 ‘북괴’의 시절에 전쟁이 나도 여러 번 났어야 하지 않겠는가.
운동권이란 애초에 “정직하게 가리고, 따지고, 말하자”는 뜻에서 시작됐다. 그러던 그들이 이제 와서 토해내는 궤변들을 듣자면 이건 숫제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이다. 도무지 경우도 없고, 온통 이중 잣대이고, 우기고 억지 부리면 다라는 식이다.
정말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 허망하고 애석하다. 그래서 오늘의 시대는 새로운 시각의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이미 기득권 세력이 돼버린 수구적 운동권을 넘어서기 위한 전(全) 한반도적인 제2의 민주화 운동을 지펴 올려야 할 때인 것이다.
언론인 류근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