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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1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주님께서 나의 목자시니…. 主はわたしの羊飼い…。
본문: 시편 23장 1절~6절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1 主は羊飼い、わたしには何も欠けることがない。2 主はわたしを青草の原に休ませ 憩いの水のほとりに伴い 3 魂を生き返らせてくださる。主は御名にふさわしく わたしを正しい道に導かれる。4 死の陰の谷を行くときも わたしは災いを恐れない。あなたがわたしと共にいてくださる。あなたの鞭、あなたの杖 それがわたしを力づける。5 わたしを苦しめる者を前にしても あなたはわたしに食卓を整えてくださる。わたしの頭に香油を注ぎ わたしの杯を溢れさせてくださる。6 命のある限り 恵みと慈しみはいつもわたしを追う。主の家にわたしは帰り 生涯、そこにとどまるであろう。
지난 주일에는 이사야서가 고백한 포도원의 노래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듣고 감동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 붙은 가지로 튼실한 열매를 맺는 삶의 축복을 다시금 발견하였지요. 저와 여러분이 늘 주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영생과 인생을 아우르는 농도가 진하고 당도가 높은 상급 포도열매와 같은 풍요로움을 누리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저 읽기만해도 은혜가 되고 마음에 위로와 격려를 받는 시편 23편입니다. 굳이 뭔가를 덧붙여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구절들이지요. 한 구절 한 구절을 곱씹어 묵상해 보면 정말 놀라운 보화를 캐낼 수 있는 말씀입니다. 만일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를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한 인생 그 자체라고 분명히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오늘의 본문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구절인데다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사님들이 오늘의 구절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하셨지요. 저도 가정 심방을 할 때 자주 인용하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자주 친근하게 암송하기도 하고 기억하며 기도하는 이 구절 가운데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특별하게 또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해 주시려는 은혜를 찾게 되었는데요. 물론 모든 구절들에 각별하고도 영적인 의미가 깊이 새겨 있어서, 단 한 구절도 가볍게 지날 곳이 없지요. 오늘 저를 통해 함께 무게중심으로 두고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바로 3절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아멘!
여기서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신”다는 표현을 개역성경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로 번역하였는데요. 여기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페쉬’인데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육체와 분리된 어떤 영적인 부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 나 자신, 살아 있는 나의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만 회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전체를 다시 살리시고 회복시키신다는 뜻이지요. 다시 말해 내면의 세계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나의 삶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는 표현을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신다’고 풀어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단지 내면세계의 활동이나, 생각 혹은 지식적인 어떤 영역에 가두어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의지와 행동과 태도가 모두 믿음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토대로 “영혼의 구원”은 단지 어떤 종교적인 교리와 지식을 쌓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생각과 의지에 합당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믿으면 결국 우리의 삶에서 그 믿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믿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병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일이 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이런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가 되어 버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목적을 이루어 주시는 수단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실제로 무엇에 붙들려 있고,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를 반성해 볼 기회를 정기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혹시 우리도 주님을 믿는 것이 단지 자신의 신변이나, 생활에 생길 수 있는 액운을 피하기 위한 방편인지… 혹은 남들보다 좀 더 많은 유익을 누리기 위한 것인지… 혹은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기 위한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 몸으로 흉내를 내는 의미 없는 행동인지 때때로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그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신사에 가서 소원을 빕니다. 일상 가운데 문제가 사라지기만을 빌고 또 빌지요. 간절한 마음에 돌탑을 쌓기도 하고, 공물을 바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열심과 정성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또한 종교적인 열심이나 간절함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인간의 이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종교적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는 것은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닙니다. ‘그 일이 누구의 이름을 위하여 일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당신의 이름을 위해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간절히 기도하고 정성을 들이는 나”를 봐서… 가 아니라, “주님 당신”을 위해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서라고 번역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이름’이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을 부르는 명칭, 혹은 호칭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당신의 이름”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명예와 신실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하심을 담보로 걸고, 당신의 성품에 합당하게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것은 단지 나의 편안함과 유익만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하신 성품에 합당하게,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속뜻을 근거로 다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든 과정은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절하고도 갈급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신유의 기적과 문제해결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단지 우리의 기도가 간절했기에 성취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바른 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소위 기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잘것없는 순종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표적으로 나타내신 것을 우리가 기적의 모습으로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너무나 작고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오천 명을 먹이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영적이고,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첫 시작은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부족함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족함이 없는 삶”이란 원하는 것은 모조리 성취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필요하다고 여기고, 갈급하다고 여기는 “결핍의 마음과 태도”가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정한 부자란 남들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의 갈망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 꼭 그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함께 그 가르침을 읽어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그런데 같은 가르침을 들었던 누가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0)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표현하고, 누가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두 말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력과 자원을 절대적인 것으로 붙들지 않는 사람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유함과 부자에 대해서 이렇게도 말씀하셨지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눅 18:25)
표면적으로만 보면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당혹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7)
다시 말해, 이 가르침은 부자가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영생하고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정성, 혹은 성취와 실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약속의 성취인 복음이 영생과 구원의 기준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기도응답을 받았느냐는 부족함이 없는 삶의 기준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부족함이 없는 삶의 기준은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인도하시는 의의 길을 따라 걷는” 삶을 살고 있느냐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3절 이하의 말씀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의의 길에서 겪는 경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의의 길을 따르는 여정 앞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원수들 앞에 놓이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우리는 생활하다 보면 정말 죽지 못해 견뎌야 하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각자의 경험과 견디는 정도는 다를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위협과 위험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경험하지요.
존 웨슬리 목사님은 영국 성공회의 엘리트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기 전, 영국이 식민지로 관할하던 조지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대서양 횡단 여객선에 올랐습니다. 어느 폭풍우 치는 밤에 독일인 모라비안 교도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이 모여 찬양한 것은 위험을 없애고 살려 달라고 외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선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웨슬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서 홀리클럽을 인도하고, 매일 규칙적인 경건의 훈련을 이어가던 훌륭한 신앙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웨슬리였지만, 평범한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폭풍 속에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라비안 교도들은 모두가 평온한 얼굴로 풍랑 속에서 찬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께서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 명예를 걸고 지키실 약속의 길, 의의 길, 바른 길로 자신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폭풍이 없다는 확신이 아니라, 폭풍 가운데에도 목자가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를 신약의 히브리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 (히 11:17-19)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눈앞에 보이는 상황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믿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보다 이삭을 통해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붙들었던 것이지요. 오늘 말씀으로 비유해서 우리에게 맞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걸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과 고난, 질병과 실패, 외로움과 버림받음과 같은 수많은 사망의 골짜기에서 나와 함께 그 모든 고통을 깊이 공감하시며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멀리서 불구경 하듯이 관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고 말씀하는데요. 여기서 ‘동정한다’는 말은 단순히 불쌍하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아시고 공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내가 지나가는 골짜기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걸으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습은 단지 뒤에서 휘파람을 불거나, 혹은 확성기로 경고음이나 울리면서 몰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두에 서셔서, 앞장서 나아가시며 함께 동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멀리서 나를 관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앞에서 길을 열어 가시며 나와 함께 걸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의 40년을 마감하면서 모세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고백합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신 32:11)
이 모습이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른 길,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나타납니다.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길을 만나기도 합니다. 원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 상황도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 그리고 실망하고 낙심할 일들이 참 많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을 지나가는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예비하신 바르고 의로운 길로 계속 인도하십니다.
단순히 고진감래와 같은 격언이 아닙니다. 내가 견디어 내야 겨우 얻어지고, 정성을 들여 공들여 탑을 쌓아야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은 단지 가벼운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능력과 권능이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샘솟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고백하면서 우리는 오직 주님 당신의 이름을 위해 나를 바르고 온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체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나의 손을 잡고, 나와 함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바닥에서 피어 오르는 음습한 공기를 함께 호흡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나를 이끌고 계심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고백이 곧 우리 각자가 고백하는 “나의 고백”이 되고, “나의 복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말씀을 암송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내는 주술적인 행위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암송함으로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삶을 성취하는 정성을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세우신 가장 온전한 영생의 약속을 찬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푸른 풀밭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이미 내 앞에서 나를 이끄시며 동행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 되시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걸으며 행복하고 든든한 일상을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하루에 하루만큼 승리하는 행복한 예수동행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내용의 인포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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