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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66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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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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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OPKOoREIfw&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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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좋은 땅이 되기 위해 보다 자주 우리 인생의 밭을 뒤집어야겠습니다!>
팔레스티나 지방 농법과 우리의 농법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기 전에 먼저 이랑을 잘 만듭니다. 씨앗이 묻힐 골도 적당히 파줍니다. 그리고 나서 씨앗을 심고 흙을 덮어줍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들은 파종 때가 오면 큰 씨앗통을 들고 무작위로 여기저기 흩뿌립니다. 재수가 좋으면 좋은 땅에 떨어져 살고,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면 그걸로 끝입니다. 무척이나 성의가 없어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농법입니다.
눈높이 교육의 전문가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체적인 삶의 배경들을 놓치지 않고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총 4부류의 사람들로 분류하셨습니다.
① 길에 뿌려진 씨: 말씀을 들을 기본적인 준비가 안 된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시선, 세속의 논리로만 말씀을 대하니 도무지 먹히지 않습니다. 말씀을 선포해봐야 목만 아플 뿐입니다. 마치 길에 뿌려진 씨 같습니다.
씨를 뿌리자 마자 득달같이 새들이 날아와 먹어치우니 괜한 헛고생입니다. 말씀을 향한 마음이 굳게 닫혀 있으니 그 어떤 명 설교도 허사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② 돌밭에 뿌려진 씨: 선포되는 말씀을 우선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 이해한다는 표정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깊이 뿌리내리지를 못합니다.
씨앗이 돌밭에 뿌려지다보니, 말씀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환난이나 박해, 고통이나 십자가 앞에 즉시 좌절하거나 실망합니다.
③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잡목들을 제거하다보면 정말 괴로운 것이 가시덤불입니다. 뾰쪽뾰쪽한 가시들을 피해가면서 일하려니 얼마나 성가신지 모릅니다.
신앙 안에서 가시는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쓸데 없는 걱정이나 근심입니다.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입니다. 시선이 온통 그리로 가 있으니 말씀이 제대로 뿌리 내릴 수가 없습니다. 풍성한 결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④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얼마 간의 수분과 바람과 햇빛에 힘을 얻어 무럭무럭 성장을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굳게 믿습니다. 선포되는 말씀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고 무한 노력을 다합니다.
작은 씨앗 하나, 작은 모종 하나 심었을 뿐인데, 몇달 지나고 나면 얼마나 큰 결실을 맺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린 결실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기분이 흐뭇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마음도 흐뭇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백배의 열매를 맺는 비옥하고 탐스러운 토양처럼 되고자 한다면,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우선 인생과 신앙의 농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가시 덤불들(불신과 의혹, 미움과 상처)을 걷어내야죠. 작물들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돌들(게으름과 나태함, 분노와 악감정)을 말끔히 골라내야 합니다. 양질의 퇴비를 흩뿌린 다음, 뒤집고 또 뒤집어야 합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 보다 자주 우리 인생의 밭을 뒤집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물구나무서기를 해야겠습니다. 기존의 고착화되고 편협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과감히 뒤집어야겠습니다. 그것만이 좋은 삶의 토양을 마련하고, 백배의 열매를 위한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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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메뚜기가 될 것인가, 청개구리가 될 것인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aiw4H2-la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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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다시 ‘씨 뿌리는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길과 돌밭과 가시밭에 뿌려진 씨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좋은 밭에 뿌려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열매는 ‘행복’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부모님을 자녀의 행복을 위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뿌려주시는 말씀도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씨앗 안에 행복의 열매가 있음을 믿지 못하고 허튼 데에 정신을 쓰는 데 있습니다.
벼가 익어갈 무렵 한 시골 중고등부 주일학교 수업 때의 일입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은 3명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고등학교에 가더라도 주일학교를 계속 나올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솔직하게 나오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공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공부는 왜 하려고?”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유명한 사람 되려고요.”,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애인 얼굴이 바뀌어요.”, “돈 많이 벌어 부모님 호강시켜드리려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만약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 같니?”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존심이 상한 듯, “성당은 따분해요. 어렸을 때부터 성당 다녀도 전해 행복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성당 다닌다고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라고 말해요. 맞는 말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오늘은 용을 만드는 작업을 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창호지로 멋진 용을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철사로 틀을 만들고 창호지를 조심스럽게 붙이고 그림을 그려서 멋진 용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부님이 메뚜기를 각자 한 마리씩 잡아 오라고 시켰습니다. 메뚜기를 잡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용의 배 부분에 구멍을 뚫고 아이들의 메뚜기를 그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꼬리 부분에 메뚜기가 빠져나오기에 충분할 만큼의 구멍을 뚫었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메뚜기들이 이 종이 용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니?”
아이들은 한결같이 그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메뚜기들은 그 강한 발과 턱으로 종이를 뚫기 위해 사정없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자 그것들은 지쳐 쓰러져 죽어버렸습니다. 아이들은 메뚜기들을 무식하다고 놀렸습니다.
신부님은 미리 잡아두었던 청개구리 몇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용의 배 밑으로 그 청개구리를 넣고 막았습니다. 청개구리들은 뛸 생각도 안 하고 엉금엉금 기어 입과 꼬리 부분으로 다 빠져나왔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유명해지면, 예쁜 여자와 결혼하면,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 믿지? 이것이 메뚜기와 같은 생각이란다. 너희 힘을 너무 믿는 나머지 뚫을 수 없는 창호지를 머리로 계속 들이박는 거야. 그런 것이 행복이라는 믿음은 너희 안에 있는 탐욕이라는 것이 만들어낸 것이란다. 너희가 아는 명예를 얻어 유명해진 사람 중에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지? 결혼한 사람은 다 행복해 보이니? 또한, 부자라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란다. 너희들은 청개구리가 될 필요가 있어. 그런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야 해. 우리나라에서는 청개구리는 시키는 것과 반대로 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 너희들이 메뚜기처럼 사는 대부분 친구와는 다른 청개구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당 다닌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야. 그러나 너희를 메뚜기로 만드는 세상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는 있지. 성당은 청개구리가 되는 지혜를 주는 곳이란다. 너희에게 행복의 열매가 열리는 결과는 너희가 메뚜기와 청개구리 중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어.”
아이들은 모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성당에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아라는 용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이 헛된 꿈을 조장합니다. 그렇게 교만해진 우리는 결코 뚫을 수 없는 행복을 얻겠다고 머리가 깨지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길의 교만’과 ‘돌밭의 육욕’과 ‘가시밭의 물욕’에서 벗어나야만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에 머리를 들이박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키가 크지 못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초등학교 때 밥 먹는 것보다 축구 하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점심시간에 남들 밥 먹을 때 저는 혼자 공을 들고 운동장에서 놀았습니다. 그때 끼니를 거르면 키가 안 큰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그때 행복한 것에 집중했을 뿐이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 그렇게 키가 커야 할 시기는 그렇게 지나버렸습니다.
우리 삶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에너지를 창호지를 뚫는 데 쓸 것인지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데 쓸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허튼 데에 에너지를 쓰면 열매를 맺을 에너지는 남지 않게 됩니다. 참 행복은 메뚜기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청개구리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겸손하게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진리란 참 행복은 세속-육신-마귀 자아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30배, 60배, 100배의 행복을 누리려면 메뚜기의 삶을 버리고 청개구리의 삶을 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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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18-23: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 마치 씨앗처럼 모든 이의 마음의 밭에 뿌려지지만 그가 내는 결실은 그 마음 토양이 어떠냐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하신다. 즉 풍성한 결실을 내느냐, 아니면 싹도 못 내고 죽이느냐, 싹은 내지만 즉시 죽이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생활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다 받았지만, 그 말씀이 잘 성장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가꾸느냐는 각자의 바탕과 노력과 열의와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나쁜 땅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이 있고, 좋은 땅도 백 배를 내는 곳, 예순 배를 내는 곳, 서른 배를 내는 곳이 있다. 길에 뿌려졌다는 것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이 말씀은 쾌락과 이 세상의 걱정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거룩한 빵과 참된 양식을 가시덤불 가운데서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세상 걱정”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씨앗’이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삶을 지닌 것이며 지금의 상태,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많은 결실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씨앗이 그렇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과 물과 빛과 기후와 환경 조건이 있어야 한다.우리가 씨를 뿌리고 길바닥이나 돌밭에서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서 곡식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더라도 그러한 곳에서 결실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곳에 씨를 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밭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잘 싹트고 잘 자라서, 많고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도록 그 바탕과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길바닥이나 돌밭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곧 외면하고 마는지? 아니면 들을 때는 기쁜 마음으로 흥분하고 감격도 해가면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빠져 하느님 말씀을 숨도 못 쉬게 가두고 뒷전으로 미뤄 놓는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으로,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바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이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을 잘 성장, 큰 결실을 낼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마음,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자. 여기에 그리스도를 닮는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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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에는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 비유는 농사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말씀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흙이 많지 않은 돌밭과 가시덤불 때문에 씨가 자라지 못하는 땅과 좋은 땅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이미 뿌려졌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사람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자라납니다.
비유의 해설은 가장 먼저 ‘나는 어떤 땅일까?’를 묻게 만듭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우리의 상황은 이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었지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각자 다릅니다. 말씀이 달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비유의 설명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향한 호소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변할 수 있고 언제든지 좋은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귀 기울여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찾고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걱정거리나 유혹은 항상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꾸준히 기도하면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도 ‘좋은 땅’이 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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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단순히 사람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설명하는 비유가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예수님께서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읽을 때, 자신의 상태가 어디에 해당되는지를 반성해 보고, 어떻게 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는지를 묵상하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좋은 땅’으로서 살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부족한 점이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교만과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 13,18-19)
악마의 공격, 또는 악마의 유혹 자체는 악마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쪽의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공격에 굴복하거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악마가 공격을 하든지 유혹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물리치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악마의 공격과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길’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악마를 물리치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무기인 ‘기도’를 하지 않고 있으니, ‘길’은 악마의 공격과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 사람입니다. 비유에서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마가 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서 ‘깨닫지 못하면’은 ‘믿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입니다. 실천 가운데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믿는다면 기도부터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믿으니까 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악마에게 말씀의 씨를 빼앗긴 상태를, 미신이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지금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미신이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더라도, 다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돌아가면 됩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절차 같은 것은 없습니다.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미신이나 우상숭배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악마의 유혹과 같은 유혹에 넘어가서 어떤 죄 속에서 살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를 원한다면, 즉시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면 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악마가 바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은, 간절한 마음 없이, 마치 취미생활을 하는 것처럼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환난과 박해가 없는 편안한 시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잘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환난과 박해가 일어나면 금방 넘어집니다. 신앙에 대해서 간절함이 없으니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경우에 ‘간절함’은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까?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그 경우에도 ‘기도’가 정답입니다. 사실 환난과 박해로 넘어지는 것과 악마가 와서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조금 다를 뿐이고, 실제로는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도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뿌리가 없는 신앙생활은 기도하지 않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난과 박해가 일어나도 넘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평소에 기도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머리로만 믿지 말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 신앙이 곧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든 환난과 박해 때에 넘어졌더라도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의 ‘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면 됩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악마가 와서 신앙인에게서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이나 환난과 박해가 신앙인을 넘어뜨리는 것이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신앙인 안에 있는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다를 뿐이고, 실제로는 다 같은 것입니다. (박해가 없는 요즘에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박해로 작용합니다. 또 악마는 그런 걱정을 통해서 유혹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은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이고,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는 “믿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할 의지와 힘을 빼앗아 버려”입니다. 가시덤불의 경우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막혀 버린 ‘말씀의 숨’을 회복시켜 주는 ‘성령의 인공호흡’ 같은 것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결국 숨이 막혀 죽을 것입니다. (구원의 길과는 반대쪽으로 나 있는 멸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과는 다릅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은 생존에 대한 걱정이고, 그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욕심과 이기심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와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바치는 기도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걱정은 하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이고, 욕심을 채우려고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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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9년 한국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아이리스’를 보았습니다. 20부작입니다. 당시에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다시 보아도 좋았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아름다운 영상, 감미로운 음악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드라마는 ‘원칙과 기준’을 이야기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대통령과 정보요원이 있습니다.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전진하려는 사람입니다. 거대자본과 군산복합 산업으로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정부를 전복하기도 하는 ‘아이리스’라는 조직입니다. 외부의 적은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싸울 수도 있지만 내부에 있는 적은 막기도 어렵고, 싸우기도 어렵습니다. 아이리스는 내부에 적을 심어놓은 조직이었습니다. 잘못된 원칙과 기준은 하나의 신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릇된 신념은 윤리와 인권의 ‘틀’마저도 버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기에 ‘광신’은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켜도, 사람을 죽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거대한 자본과 군산복합 산업으로 이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일으키고 사람도 죽이는 ‘아이리스’처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유혹하여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성공, 명예, 권력을 미끼로 욕망의 씨, 거짓의 씨, 교만의 씨를 뿌립니다. 사탄의 깃발에 빠진 사람은 그릇된 신념으로 다른 사람까지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시련과 고통까지도 받아들였던 대통령과 정보요원들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함도, 질병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믿음, 희망, 사랑의 씨를 뿌립니다. 이 씨는 자라나서 교회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복음의 씨는 어둠에 빛을 주고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있습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피정을 하고, 강론을 듣지만 성당을 나가면 곧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기 전에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직책, 나이, 능력, 성별과 상관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주로 그렇게 됩니다. 피정을 하고, 강론을 들어서 새롭게 변화되지만 시련과 갈등이 오면 다시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마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세례를 받은 햇수, 성당에서의 직책, 수도자와 성직자와도 상관없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있는 사람이 주로 그렇게 됩니다. 피정을 하고, 강론을 들어서 새롭게 변화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병들어도, 혼자여도 상관없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주로 그렇게 됩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이웃과 나눈다면 그것이 복음화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다. 그러고는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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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마태오 13,18-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씨 뿌리시는 분께서
이미 나에게 귀한 씨를
아낌없이 뿌리셨으니
씨를 뿌리시라고
보채지 말고
씨가 왜 이러냐고
투정부리지 말고
씨를 정성껏 품어
싹을 틔우고
열매 맺도록
묵묵히 애쓰는 거야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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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행복의 열쇠>
이웃사람이 땅바닥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열쇠를 찾는다는 말에 함께 쭈그리고 앉아 찾아보았습니다.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열쇠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를 물으니 집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합니다. 어이가 없어 왜 여기서 찾고 있느냐고 물으니 더 밝아서 그랬답니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재화를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싶습니다. 물론 최소한의 것도 못 가졌다면 행복해지기가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의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행복은 그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이란 외적인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만족에서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많은 재화를 얻는 데에 온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마치 바깥이 더 밝으니 집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그곳에서 찾겠다는 생각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자식들을 위하거나 노후대책을 장만한다는 등의 이유로, 그리고 심지어는 가난한 사람을 효과적으로 돕겠다는 이유로 쉽게 재물의 유혹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 역시 엉뚱한 곳에서 열쇠를 찾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믿음에 부합하는 사랑을 실질적으로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을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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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윤조 안토니오 신부님]
<주님 말씀을 사랑하세요>
어릴 적의 친구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는 괴물은 아니지만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200 더하기 500”이 얼마인지는 잘 몰라도 “200원 더하기 500원” 하면 금방 “700원!”이라고 알아 맞추는 친구입니다. 숫자 뒤에 단지 “원” 이라고 하는 말 한 마디가 더 붙어있을 뿐인데, “원” 이라고 하는 그 말이 친구의 머리를 갑자기 영리하게 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산수 문제를 푸는 머리만이 아니라 인생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사람들은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사는 것 같습니다.
사업을 운영해 나가는 데는 우등생 머리를 지닌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는 데는 형편없는 낙제생 아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녀의 아이큐를 높이는 데는 관심과 능력이 탁월한 머리를 지닌 어머니가 자녀의 영성을 높이는 데는 너무 무관심하고 어리석은 머리를 지닐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신학의 대상으로 여기며 말씀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설령 성서학 박사 학위를 얻는다 할지라도 말씀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데에도 박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은 신학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열쇠는 오직 사랑뿐입니다. 저의 어릴 적 친구가 단지 “원” 이라는 말 한마디를 덧붙이기만 하면 풀기 어려운 산수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사랑”의 마음 하나 깊이 품고 묵상하노라면 마침내 그 비밀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말씀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알리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어떤 대학에 “사랑학 개론”을 가르치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그 교수만큼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그 누구나 “아하~, 사랑이 그런 것이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할 정도로 사랑에 대하여 도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가 가르치는 사랑학 개론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그 교수의 부인이었습니다. 그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충고하는 말이 오히려 사랑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주는 것 같습니다.
그 부인은 늘 교수 남편에게 이렇게 충고하였습니다.
“사랑을 연구하지 마십시오!”
사랑을 학문적으로 아무리 연구해본들 곁에 있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연구는 어리석은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글입니다.
“임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 법이다. 말한다 하더라도 더듬거릴 뿐이다.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떨리고 가슴이 달아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정작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말이 없는데, 학자들은 장광설을 늘어놓는다.”(한상봉,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여러분, 말씀을 듣고 깨닫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서 옆에 주해서를 두거나, 성서를 분석하려 들지 마십시오. 먼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하나 가슴 깊이 품고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서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고백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으로 말씀을 깊이 품을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 안에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열매는 무릎을 탁 치는 지적인 만족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을 치며 뉘우치는 영적인 회개입니다.
말씀의 열매는 고개만 끄떡이는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말씀을 실천하는 봉헌의 삶입니다.
사랑을 연구하지 마십시오! 임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 법입니다. 다만 주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태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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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정원순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삶의 자리는 초대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도 실패할 때가 많았고, 신자들의 생활을 살펴보아도 부실한 면이 많은 쓰라린 현상을 체험한 곳이다.
믿음이 사라져 좌절하고 실망에 빠져 있던 공동체에 용기와 희망을 주고 격려하려는 의미에서 복음이 형성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믿음은 발전한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믿음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것을 반성할 때 믿음은 성장하고, 체험을 통하여 신앙인으로서 성숙해 간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한 마음, 말씀을 들으면 기쁘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는 마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는 가시덤불 같은 마음, 그리고 열매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맺는 마음도 있다. 마음이라는 밭에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사에 참례해야 한다. 믿음이 있어서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믿음이 성장해 간다. 믿음이 있어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커간다.
그리고 믿음이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함으로써 믿음이 발전해 간다. 우리가 마음에 무엇을 심고 살아가야 할까 하고 묵상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마음밭에 믿음이 자라도록 믿음을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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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후배 신부와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의 상황이 생각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상처 주는 말을 진짜로 했을까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입고 있었던 옷과 그때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신부의 말을 들으면서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기억이란 만들어진 기억이 많다고 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모르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억을 만들고, 그 기억에 오류를 지적하면 상대를 거짓말쟁이, 위선자로 몰면서 관계를 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럴 리가 없다는 처음의 생각을 바꿔서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저 자신도 제가 원하는 기억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그때는 너무 어렸고 판단력이 부족했다며 사죄했습니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30년 전의 기억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지금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 아닐까요?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십니다. 길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려진 씨,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그리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를 설명해주십니다. 씨가 뿌려진 곳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한 곳에서 과연 가능할까요? 세상의 물질적인 욕심으로만 채워졌다면 어떨까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남의 잘못만을 바라보면서 단죄하는 데 힘을 쏟는 곳은 어떨까요? 이러한 마음이 좋은 땅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씨가 죽어 없어질 것이라면서 씨를 뿌리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분명히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면서 씨를 뿌렸을 것입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이 주님의 기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을까요? 말도 안 되는 기대라면서 콧방귀만 뀌겠습니까?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하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분명히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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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표>
시험 보고 매 맞고
성적표 받고 매 맞고
내 다리 장한 다리
45년 전, 어느 신문에 실린 경상도 어린이의 시라고 합니다. 우연히 어느 책에서 본 시로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회초리를 맞았나 봅니다. 그것이 꽤 많이 그리고 아프게 말이지요. 그런데 그 아픔을 참은 자신의 다리를 칭찬합니다.
어마어마한 긍정적 마음이 아닙니까? 때린 사람을 미워하는 부정적 마음을 갖지도 않고, 나쁜 성적을 맞은 자신을 자책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이니 부정적 마음이나 자책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아이, 아니 45년 전이니, 지금은 50대 중후반 이상의 나이일 것입니다. 아직도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사시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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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聖人이 됩시다”>
-희망, 회개, 공부, 은총-
어제는 장마철답게 하루종일 비가 내린 날입니다. 오후 비가 한창 내릴 때 연락을 받았고 이어 20년이상 알게 모르게 수도원 일에 큰 도움을 주었던 형제의 중장비인 굴착기를 축복했습니다. 성수를 약간 뿌리며 나눈 유머를 잊지 못합니다.
“진짜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리시는 비, 성수로 축복했으니 이건 보통일이 아닙니다. 제가 성수를 뿌린데다가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이렇게 성수의 비로 온통 굴차기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형제님이 성인이 되어 보답하는 길뿐입니다.”
굴착기 축복식 후 요지의 덕담과 더불어 집무실에 안내하여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서 예수님과 함께 사진도 찍어 나눈 문자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세례자 요한 형제님! 사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성인이 되어 사세요!”
“신부님 말씀대로 포크레인으로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포크레인으로 사랑을 전하는 요한이 되겠습니다.”
“예,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비는 계속 내렸지만 참 기쁘고 기분 유쾌한 날이었습니다. 사실 형제의 포크레인 기술은 탁월하며 신앙심 또한 깊은 분입니다. 하여 내심 착안했던 강론 제목, ‘평생학인’에서 즉시 ‘성인이 됩시다’로 바꿨습니다. 혹시 덕담의 인사를 드린다면, ‘성인이 되십시오!’ 인사말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성인이, 하느님 불러 주신 고유의 참나가 되는 성인이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성소는 이런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주변 가까이에서 성인답게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만나곤 합니다.
어떻게 성인이 됩니까? 고맙게도 오늘 제1독서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설명 복음이 그 방법을 알려 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7월12일 주일 삼종기도후 일반 알현중 복음 묵상 나눔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우리 궁극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생은 문장으로 하면 ‘주어없는 문장’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는 예수님을 통해 자비하신 아버지로 환히 계시되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은 말그대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분도 규칙에서 분도성인은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 실망하지 마라’(성규4,74)고 강조하십니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실망, 절망, 원망의 삼망이란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낙관적 긍정적 인생관을 지니게 됩니다. 이런 생명의 샘, 생수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기쁨과 평화요 위로와 치유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둘째, 끊임없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있기에 회개도 겸손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려, 잃어버려 광야인생중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광야인생 셋 중 하나요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여 광야인생 성인이 되든지, 하느님을 잊어 괴물이나 폐인이 되는 경우입니다. 하여 저는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 되지만 세상 것들에 잘못 미쳐 중독이 되면 괴물이 되든가 폐인이 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입니다. 하여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제1독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하늘의 별들처럼 교회 하늘에 가득한 참 좋은 목자 성인들이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비롯한 무수한 살아 있는 착한 목자들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들의 교회 가르침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와 겸손입니다. 인간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회개뿐입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과 지혜를 지닐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회개의 은총이 다음 묘사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미사가 거행되는 이 거룩한 교회의 성전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의 옥좌’라 부를 것이고,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주님의 옥좌가 상징하는 바,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신 하느님입니다. 이런 주님의 옥좌, 궁극의 희망을 앞당겨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셋째,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하느님을 공부하고 나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더불어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평생학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비유 설명이 참 심오합니다. 씨들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타고난 좋은 땅의 마음밭은 없습니다. 하느님 탓할 것이 아니라 나를 탓해야 합니다. 잘 들여다 보면 결국은 내가 문제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방치하면 길바닥 마음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믿음을 앗아가는 분심거리는 얼마나 많습니까. 온갖 이념들, 뒷담화 등 바로 분심으로 침묵의 열정도, 묵상도, 주님과 대화의 기도도 사라진 경우가 바로 길바닥 같은 마음밭입니다.
돌밭같은 마음 밭은 일시적 열광으로 곧 닥치는 어려움이나 불편, 혼란으로 좌초되어 뿌리 내리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경우입니다. 용두사미로 끝나고 시종여일 항구하지 못합니다. 어디 뿌리 내리는 일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집니까? 바로 정주서원이 의도하는 바도 일시적 열광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데 있습니다. 불암산 바위에 뿌리 내린 푸른 솔들이 참 좋은 정주 믿음의 스승입니다.
가시덤불 같은 마음밭은 재물, 성공, 세상적 관심사, 탐욕의 잡초들 무성한 마음밭을 상징합니다. 바로 밭을 방치해 두면 곧장 잡초 우거진 밭이 되듯이 마음밭도 방치하면 그대로 탐욕들 무성한 잡초밭이 됩니다. ‘풀과의 전쟁’ 농사이듯 ‘탐욕의 가시덤불과의 영적전쟁’이 인생농사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탓이 아닌 내탓입니다. 이런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땅같은 마음밭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자라날 수 없습니다. 어찌 이런 마음밭에 주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좋은 땅이 바로 성인의 마음밭이고 바로 우리의 공부에 달렸습니다. 머리 공부, 마음 공부뿐 아니라 몸의 실천까지 포함한 전인적 공부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공부의 수행으로 영적거름도 주고 영적농약도 하고 잡초같은 탐욕을 예초刈草하며 끊임없이 마음밭을 돌보고 가꾸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이렇게 절실히 간절히 항구히 노력하면서 결과는 하느님 은총에 맡기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침내 우리는 좋은 땅의 마음 밭을 지닌 성인이 될 것이고 백 배 열매의 성인, 육십 배 열매의 성인, 서른 배 열매의 성인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양이 아닌 과정의 충실도를 보시며 그에 맞는 성과의 열매도 주십니다. 똑같은 성인이 아니라 각자 고유의 자기 모습대로의 성인입니다. 꽃의 색깔, 크기, 모양, 향기가 다 다르듯 성인도 그러합니다. 공통점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 주님의 종들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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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매를 맺으려면>
몇 개의 작은 화분을 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보기는 좋은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 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 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자기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양성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 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커가고 그 사랑이 이웃으로 향할 때 비로소 열매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가13,8) 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 오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새기고 행하는 만큼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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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말씀의 씨앗을 품는 우리 마음 밭을 돌보라고 이끕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느님의 성실한 사랑이 돋보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예레 3,15).
주님은 우상 숭배와 유배로 흩어진 이들을 다시 모아들이시고 그들에게서 다시 하느님 백성의 정신을 일으킬 목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목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나 그들을 실질적으로 이끌 임금, 예언자이기도 하고, 또 혼을 불어넣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예레 3,17)
이스라엘 백성은 지식과 슬기로 자신들을 돌보는 목자와 매일 접하는 말씀의 도움으로 다시 주님께 돌아와 신의를 다해 그분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백성들 편에서 무엇보다 먼저 "악한 마음"을 버려야 하지요.
"악한 마음을 고집스레 따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지름길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심겨 스며들 수 없는 냉랭하고 척박한 박토와도 같지요. 말씀을 거부하는 마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셋 다 말씀의 씨앗을 제대로 품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무수한 세상 욕망의 스침과 진동으로 길바닥처럼 다져졌거나, 이기적 자아가 돌처럼 뭉쳐 굳어졌거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무성하게 번져 영혼을 칭칭 감고 있는 땅에는 말씀이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이런 마음의 악한 상태를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것이 곧 적극적으로 악을 고수하는 죄일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마태 13,23)
좋은 땅은 말씀을 품어 썩히고 싹으로 밀어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분 앞에서 경청하고 몰입하며 머무르는 상태지요. 열매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맺히는 선물입니다.
악은 우리 주변을 맴돌며 거처를 찾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는 쉽사리, 게다가 번번이 걸려넘어지기 일쑤지요. 어느 추락은 선택적이기도 하지만 어느 실패는 불가항력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우리가 주님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무수한 죄악이 끈질기게 우리에게 달라붙어도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레 따르지 않는 것"(예레 3,17)에서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다가오시는 말씀 앞에서 건조해지고 냉랭해진다면, 불편함과 거부감이 든다면, 못 들은 척 건너뛰고 싶다면,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오히려 그 말씀을 품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대단치 않아 보여도 이로써 악에 고착하려는 고집이 순간 힘을 잃지요. 악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잔뜩 힘이 들어간 고집에 피식~ 하고 바람을 빼는 것, 이는 좋은 땅이 되려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을 품고, 말씀을 품고, 세상을 품는 좋은 땅이 되도록 힘껏 애써 봅시다. 아무리 척박하게 보이는 땅이라도 돌을 골라내고 거름과 퇴비를 주고 가꾸다보면 좋은 땅이 될 수 있답니다. 사실 하느님 모상인 우리는 원래 좋은 땅이었고, 지금도 부단히 그 원초적 풍요와 비옥함을 회복해가는 중이랍니다. 이를 믿고 희망하며 나아가는 벗님을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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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마음 건강 - 진단 방법 -5
*다섯째, 건강한 사람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열려 있습니다.*
길가에 핀 자그마한 꽃을 보고도 마음이 기쁘고, 소박한 물건 하나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무디고 작은 일에도 인상을 찌푸리기 일쑤입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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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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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런데, 정작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뿌려진 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말씀”이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뿌려진 씨’는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뿌려진 씨’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하느님의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뿌려졌듯이, 사람도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사 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에게 결실을 보아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루어야 할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소명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라는 환경(조건)과의 관계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곧 ‘길’, ‘돌’, ‘가시덤불’, ‘좋은 땅’과의 관계 안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예컨대, 씨앗을 물어가는 새(악한 생각)와,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는 돌(시련과 박해)과, 씨앗을 숨 막히게 하는 가시덤불(재물과 유혹) 등과의 관계 안에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또한, 그 열매는 자신이 원하는 열매인 것이 아니라, 씨앗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 것을 과업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곧 우리 자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형제와 더불어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구원의 동반자요, 동행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조자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맺도록 자신이 거름이 되는 것, 죽어 거름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한편, 우리는 밭이 씨앗을 일구는 줄로 알지만, 사실은 씨앗이 밭을 일굽니다. 씨앗이 밭을 규명하는 것이지, 밭이 씨를 규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밀 씨가 뿌려지면 밀밭이 되고, 콩이 뿌려지면 콩밭이 됩니다. 돌이 깔려 있으면 돌밭이 되고, 가시덤불이 덮고 있으면 가시덤불 밭이 되는 것입니다. 쓰레기가 가득하며 쓰레기 밭이요, 똥이 뿌려지면 똥밭이 됩니다. 결코 밭이 스스로 밀밭이 되거나 콩밭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가 바로 내가 어떤 밭인지를 말해줍니다. 곧 내 안에 말씀이 자라고 있으면 향기를 뿜는 좋은 밭이요, 쓰레기로 쌓여 가고 있으면 온갖 악취가 뒤범벅이 된 오물 밭일 것입니다. 옛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은 한 권의 책, 곧 한 권의 복음서이다.”라고 표현했으며, 특히 “성모님을 말씀의 도서관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분 안에는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안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고,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요? 말씀이 자라고 있는 ‘말씀의 도서관’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욕망이 자라는 잡초 밭인가요?
하오니,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랄 수 있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열매를 맺는 데 당연히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게 하소서!
기꺼이 죽어서 뿌린 씨앗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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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의 노래를 부르는
땅을 지배하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고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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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k6-0U6NO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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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마태 13, 23)
열매 하나
하나에도
스며드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열매가
됩니다.
말씀으로
하느님의 시간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으로
건너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열매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게
하는 분명한
말씀입니다.
말씀은
듣고 깨닫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말씀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열매를
맺게합니다.
모든 열매는
말씀이 빚어내는
열매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분리할 수 없는
경청과 깨달음
말씀과 열매입니다.
말씀으로 열매맺는
우리의 인생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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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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