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의미와 재미다. 의미없는 인생은 우울에 빠지고, 재미없는 인생은 권태에 빠진다. 재미있게 의미를 새기며 사는 인생은 행복하다. 문제는 세상이 호락하지 않다는 거다. 쇼펜하우어가 그랬나. ‘인간은 권태와 고통사이를 오가는 존재이며, 그 사이 순간 스치는 찰나로 행복을 느낀다’고. 그래서 인정해야 한다. 원래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다고,
또 관계는 어떤가? 우리는 위선과 위악사이에서 헤매는 존재다. 적당히 위선적이고, 적당히 위악적인 그런 관계가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은 선의로 다가가고 호의로 맞을 때 이루어진다고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존재다. 위선과 위악, 선의와 호의라는 네 가지 변수가 들어있는 방정식을 잘 풀어내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 해법이 있겠지만 ‘기왕이면’이란 자세로 살면 어떨까.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 변덕스런 우리들 속에 의미와 재미를 찾고, 그리고 선의와 호의로 관계를 맺으며 살면 어떨까. ‘기왕이면’ 말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세상은 고통에 차 있고 위선과 위악으로 적당하게 얽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이면’이란 자세로 살자 했다. 그러나 도대체 그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말이다. 알아야 면장을 할 건데. 우리만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중세와 고대의 현인들도 그랬고, 이 책의 저자 유대칠님도 그랬다. 젊은 시절 철학에 일생을 맡기자 할 때 정리한 이 책은 간단하지만 깊고, 단순하지만 넓고도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바로 철학의 사유라는 공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저자가 스물세 살경 학부 때 철학에 입문하면서 썼다. 그의 전공은 서양의 중세철학이다. 하여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스콜라 철학에 근거한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Metaphysica의 번역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번역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현실, physica)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그 너머(초월, meta)의 인간의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자연학 너머의 공부를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것이라 했다.
19세기 이전 철학은 법, 의학, 신학의 예비학문이었다. 그 곳에서 행해진 강의가 바로 형이상학이었다. 그러나 이후 대학은 개별 학과를 세워 직접 학생들을 모집하면서 그 체계가 무너졌다고 한다. 형이상학은 추상의 영역에서 인간(영혼), 신, 우주의 존재와 본질에 대해 궁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칸트나 하이데거등 현대철학자들에 의해 관심 밖, 무시의 영역으로 취급되었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시작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믿고, ‘마지막은 잘 다듬어진 자신의 형이상학을 구성함으로 정리된다’고 했다.
무엇으로 있는 것
이 것이 일반 형이상학의 화두다. 즉 존재(있는,esse)와 본질(이다,essentia)에 대한 물음이다. 이 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세상에 한 몫함으로써 사는 존재로서 우리가 그 한 몫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실존주의, 다른 하나는 본질주의라 부른다. 존재(있기)와 본질(무엇임)은 실제적으로 구분된다고 보는 것이 전자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후자다. 전자의 대표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 후자는 둔스 스코투스와 오캄이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 언뜻 보면 존재와 본질은 구분할 수 없다. 시공간의 영역에서 우리는 어찌됐든 어떤 행위와 변화를 겪으며 있기 때문이다. 그 행위와 변화가 ‘한 몫하기’이고 ‘인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투스는 대상이 무엇이든 ‘사람 지성 가운데 사고 되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일의적일 수 밖에’없다 했다. 그러나 신학을 집대성하고자 했던 아퀴나스에게 이 명제를 받아 들이면 신을 어떤 식으로든 정의내려야 했다. 그러나 신은 인간 언어의 밖에 존재하기에, 인간이 어떤 언어로 신을 언급해도 그 것은 유비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존재는 본질에 앞서며, 실제적으로 나눠진다고 주장했다.
존재와 본질
위의 두 가지 태도의 원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올라간다. 둘은 진선미의 초월범주를 담지하는 존재와 본질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플라톤은 진리의 이데아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참된 가치가 인간 밖에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는 존재에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으로는 이를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존재가 사라지면 본질도 진리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플라톤을 따르면 우리는 진리를 밖에 두고 따르면 된다. 그 것이 원래 있든, 개발되는 것이든 상관 없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면 본질과 진리는 내 안에 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후자의 모습이 좋아 보인다. 전자는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그럴까? 생각보다 복잡할 것이다. 모스크, 성당, 교회, 절에 진리를 보관하고 따른다 해도 인간 삶의 윤리적 고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 안에 진리가 있다고 믿고 끊임없는 궁구를 한다 해도 우리는 결국 누구를 본받고 살고 싶어 하는 존재다. 차라리 우리는 바닷가에 떠 있는 부표라고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 바다 밑 어느 땅바닥에 줄로 묶여있는 존재인 부표. 그러나 끊임없이 부는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에 넘실거리는 부표.
현상과 본질
나는 생각에서 ‘존재’는 빼고 싶다. 있든 없든 나는 있으니까. 살아 있는 한 살아야 하니까. 현상과 본질은 인식론적 영역에, 실천론에서 의미를 가진다. 존재론적으로 현상과 본질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람마다 같은 현상을 봐도 다르게 보고 판단하는 것은 그 본질을 서로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여기에서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현상과 본질보다 페르소나(가면)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싶다. 우리가 하나의 본질만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다양한 인격을 띠면 살고 있다. 역할과도 다르지 않다. 나는 남자, 중년, 아버지, 아들, 책마을 회원으로 살고 있다. 거기에 합당한, 적당한 인격을 행사하며 살고 있다.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가면을 바꿔가며 사는 것이지.
관계와 마음
그러나 마음이 있다. 마음도 각 자 별개라 하면 안 된다. 마음은 나가 아닌 우리에게 있다. 『다시 보는 오만년의 역사』의 저자 타밈 안사리가 마음은 ‘뇌나 몸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지만 , 몸 밖에 있다. 즉, 개인이 속한 사회적 연결망에 자리 잡고 있다’했다. 그 마음은 ‘관념, 태도, 사고, 정보, 신념’으로 구성된다. 그 별자리를 통해 너와 나가 우리가 함께 하는 시대 정신과 형이상학 일반이 구성된다. 하여 우리가 구성하는 일반 형이상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과거의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현재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일 뿐. 그래서 소망한다. 너의 형이상학을 엿보고, 나의 속마음도 들여다 보며 우리 시대의 형이상학이 어떻게 구성되어가고 있는지 하여 보다 올바른 좋은 참된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일조가 될 것인지 지켜보고 실천해 나가는 것. 2024년 올해도 우리들 마음에 아름다운 일반 형이상학이 자리 잡을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책익는 마을 원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