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들이 천문봉을 향할 때 나는 기상대 쪽을 향하였다. 거기 옛날 서파에서 보던 국경5호선 경계비 같은 것이 서 있어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그냥 네모진 기둥이고 국경6호선 경계비는 거기서 동쪽으로 20분을 더 가야 볼 수 있다 한다.
백두산 천지 쪽 내윤은 누구라도 감히 내려갈 엄두를 내릴 수 없는 천 길 낭떠러지라 위험하여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그 오른 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봉이 있어 철벽 봉인가 해서 다른 팀 가이드가 있어 물어보았다.
"이 봉 이름은 무엇입니까?"
가이드가 이것도 천문봉의 일부란다.
여기서 천지 수면까지는 467m인데 천문봉 정상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철조망을 돌아 정상에 서야 호수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데 거기까지 가기가 너무 두려워 생략하고 말았다. 천지로 향한 '천상은병풍'에는 비취를 박아 놓은 듯이 바위가 드문드문 박혀 있고 수리바위가 그 주둥이를 쳐들고 있다.
거기서 뒤돌아보니 북저남고(北低南高)라는 풍광이 만주 벌판의 끝없는 평야를 향하고 있다.
*. 백두산 서파(西坡) 종주 길
여기서 이야기를 옛날의 나의 '백두산 서파 종주'로 이야기로 돌린다.
서파(西坡)의 마지막 버스 주차장까지는 눈이 막혀서 차가 더 이상 오를 수 없어서 우리는 도중에 차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그곳은 1,700m 이상의 수목한계선(樹木限界線)을 넘어선 지점이어서 나무 하나 없는 초원에는 갖가지 들풀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7월인데도 길가에는 10cm 이상 두께의 눈이 쌓여 있었고 초원에는 들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그 들풀, 그 들꽃이 무성한 초원 사이로 난 돌층계를 따라 올라가고 있다. 5호경계비까지 꼬불꼬불 계속 올라가고 그 돌층계도 멋있다.
층계도 가파른 층계가 아니다. 두어 걸음 걷다가 한 계단 오르는 식의 조각까지 해 놓은 여유로운 층계다.
이러한 층계 1,386개를 거의 다 오르는 곳 능선에 감격하며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남한에서 최고로 높다는 1,950m의 한라산보다 40m나 높은 천지를 굽어보는 위치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5호선 국경 비를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단순한 붉은 음각 ‘中國5 1990“, 파란 음각 ”조선5 1990“의 키에도 못 미치는 작은 비이지만 청나라가 완력을 앞세워 휴전선이 한반도를 가르듯이 천지를 갈라놓은 역사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 조선조 숙종 때 청나라와 두만강의 국경을 정할 때였다.
청나라 황제의 특사로 온 총관 목극동에 맞서야 할 중신 접반사(接伴使)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란 작자가 늙은 나이를 핑계하여 목극동과 함께 백두산에 오르지도 않고 산 아래에 그냥 머물고 있어서, 우리의 국토 두만강 안쪽 700리를 잃게 하였으니 이완용보다 더 못난 위인들이다. 힘든 것을 핑계하다가 국토를 영원히 잃었기 때문이다.
목극동이 제 마음대로 정계비를 세우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소국(小國)에 인물이 없어서 좋은 자기들 땅을 많이 잃었구나.”
이렇게 백두산은 많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뿐인가. 일제시절에 왜놈들은 남만주 철도부설 등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 영토인 간도(間島)를 청나라에게 넘겨 주는 협약을 자기들 멋대로 체결하고 말았다.
북한(北韓) 위정자들도 그랬다. 1962년 경 6.25의 중공군 참전 대가로, 한민족의 상징인 백두산과 천지의 절반을 중공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알려진 비밀이라니, 오늘날에도 옛날의 그 못난 박선부, 이선부 같은 자가 북한에도 있었던 것 같으니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질 일이다.
*. 백두산(白頭山) 명칭
단군신화가 깃들은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요, 조산(祖山)인 백두산(白頭山)은 북한 양강도와 중국 길림성 국경선에 있는 한국에서 2,744m로 제일 높은 산이다.
백두산(白頭山)의 이름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로 불려왔다.
문헌에 나오는 백두산(白頭山)의 최초의 이름은 중국 옛날 지리책인 ‘산해경(山海經)’에서다.
“넓은 광야 한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不咸)’이라 부르는데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백두산은 곧 장백산이다. 산이 모두 삼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리요, 가로는 천리에 뻗혀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 리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혼동강,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화강과 속평강,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천지에 대한 기록은 영조40년(1764년) 박종(朴琮)의 ‘백두산 유록(白頭山遊錄)’에서다.
“ 봉(石峰)이 늘어선 것이 병풍을 두른 것 같고 높이 솟은 것이 군자(君子)와 같은데, 그 복판에 큰 못이 고여 있다. 움푹 꺼져 들어가기를 천 길이나 되며, 물이 독에 있는 것 같아서 엎드려 보면 무서워서 몸이 떨리고, 검푸르게 깊은 것이 잴 수 없으며 땅 구멍에 통할 것만 같다. 얼음이 수면을 덮었는데 열린 곳은 겨우 4분의 1 이며 빛은 푸른 유리와 같고 석문이 영롱하여 사면의 그림자가 비치여 얼음이 엷어서 거울 같다.”
백두산의 넓이는 8,000㎢로 우리나라 전라북도(8,052 ㎢)와 비슷하고, 천지의 넓이는 여의도보다 약간 더 넓다.
그 높이나 넓이는 중국과 북한 자료가 서로 차이가 난다.
그것은 한국은 인천 앞 바다를, 북한은 원산을, 중국은 천진을, 일제(日帝)는 동경만 앞바다를 해발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왕이면 우리 동족인 북한의 자료를 주로 따르기로 한다.
백두산의 높이가 2,750m(한국 2,744m, 중국 2.749.6m)인데 천지 수면은 2,190m로 백두산 서파 종주 길에서 500m 정도 아래에 있다.
내가 준비한 카메라는 광각을 겸한 것이련만 한 컷으로는 잡히지 않는 천지 둘레는 14.399km, 평균 수심은 213m이고, 최고 수심은 384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산정(山頂) 호수가 바로 우리 천지다.
저수량은 19억5천500만㎥로, 만약 어느 누가 1초에 1톤씩 퍼낸다면 60년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데 이 물은 어디서 온 물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비와 눈이 녹은 물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북쪽 화구벽을 뚫고 저 달문(達門)을 통하여 사시사철 장백폭포(長白瀑 일명 飛龍瀑)를 이루어 떨어지는 물의 양을 생각하면 비와 눈이 녹은 물만이라고는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천지의 물 60% 이상이 지하에서 솟아나는 용출수라고 하는데 16봉과 천지 수면의 고도차가 4~5백m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깊은 산 정상에 호수를 이루다니 신비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1931~1932년에 천지를 답사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지리학자는 천지의 깊이를 442m 이상으로 보고 천지를 세계 10대 호수 중 하나로 꼽았다.
유명한 곳은 이름 하나로 말할 수 없음인가. 천지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대동여지도에서 ‘대지(大池)’라 하는 것을 위시해서 '천상의 호수', '대택(大澤)', '용왕담(龍王潭)','용궁지(龍宮池)', '신수분(神水盆)', '천상수(天上水)', '달문지(達門池)' 등이다.
천지 빼놓고 백두산을 말할 수 없듯이, 천지를 말하려면 천지를 병풍처럼 빙 둘러 있는 16봉우리를 말해야 한다. 이 천지와 16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
옛날 옛적 백두산을 백두산이라 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이 산 한 마을에 흉년이 들었답니다. 심술궂은 흑룡(黑龍) 한 마리가 있어 불칼(벼락)을 휘두르며 물곬을 막아 놓은 탓이지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백(白) 장수와 합심하여 물줄기를 찾아놓았더니, 그 위에다가 백두산 돌을 굴려 돌산을 만들어 버렸답니다. 물론 흑룡의 심술이었지요.
하릴없어 마을 사람이 다 떠난 자리에 앉아 백장사가 탄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리따운 공주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간밤에 꿈속에서 무지개를 보았어요. 그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신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백장수와 마을 사람들의 지성에 감천하여 왔노라. 백 장수에게 옥장천의 샘물을 석 달 열흘 마시게 하여 힘을 길러 흑룡과 싸워 이기게 하라. 이건 네 나라의 일이니 네가 직접 알려야 하느니라.”
지 금의 백운봉 정상에 있는 옥장천을 찾아가서 석 달 열흘 동안 샘물을 마셔 기를 키운 백 장수는 가장 높은 산마루에 올라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 삽이 얼마나 컸던지, 그 기운이 얼마나 세었던지 한 삽을 파내서 던지면 봉우리 하나씩이 생기더랍니다. 백 장수는 이렇게 동서남북을 향하여 16삽을 파 던졌더니 버린 자리에 16봉이 생겨나고 움푹 팬 밑바닥에서 지하수가 강물처럼 솟아나더랍니다.
이때 검은 구름을 타고 달려와서 훼방하는 흑룡을, 흰 구름을 탄 백 장수가 공주와 합심하여 물리치고 나서보니 방금 파놓은 흙구덩이에 물이 지금처럼 가득 차서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백장사와 공주는 흑룡이 다시 또 와서 심술을 부리지 못하게 천지 속에 수정궁을 지어놓고 둘이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 전설을 가만히 살펴보니 백장사의 흰 ‘白(백)’과 산머리를 팠다 해서 머리 '頭('두)로 白頭山(백두산)이라 했다고 하는 옛날 사람들의 민간어원설이 그럴 듯하게 여겨지고 천지를 용왕담(龍王潭)이라고 한다는 것에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 전설 따라 어원 따라 가본 16봉들 천지를 둘러싼 2,500m 이상의 높이라는 16봉들의 이름은 중국과 북한이 다르고, 이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높이 역시 북한과 중국이 말하는 것이 서로 달랐다.
우리가 서파 5호경계비로부터 북파 쪽으로 가면서 볼 수 있다는 산을 차례로 들어보면
2,664m 청석봉(일명 옥주봉), 2,691m 백운봉, 2,603m 녹명봉(일명 지반봉), 2,510m 관일봉, 2,595m 용문봉(일명 차일봉), 2,595m 철벽봉, 2670m 천문봉(일명 백암봉) 2,618m 자하봉, 2,625m 쌍무지개봉으로 9개가 있다.
북한 쪽으로는 2,711m향도봉(일명 삼기봉, 망천후), 2,749.2m 장군봉(일명 병사봉, 중국 백두봉), 2,549m 제비봉, 2,533m 관면봉, 2,566m 와호봉, 2,543m 제운봉, 2,691m 마천우 7봉이 있다.
더 자세히 말해 보면 18봉 중 6개는 북한에, 7개는 중국에 3개는 북경에 걸쳐 있다.
이 16봉은 천지 쪽으로는 거의 90도 경사로 도저히 내려 갈 수 없는 경사로 이를 내륜(內輪: 안둘레)이라고 한다. ,그 반대쪽에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초원보다 더 아름다운 들꽃이 막 피기 시작한 '천국의 화원' 같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곳을 외륜(外輪:바깥 둘레)이라고 한다.
서파(西坡) 트레킹에서 온 분들은 5호경계비에서 둘로 나뉜다.
종주에 자신 있는 사람은 청석봉으로 하여 장백폭포가 있는 북파 쪽으로 트레킹을 시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5호경계비에서 천지를 감상-서파 꽃밭 트레킹-금강대협곡 관람-버스로 송강역-기차로-이도백하까지-버스로-북파 장백폭포(총 약 5시간) -달문-승하사-천지물가 트레킹-종주산행팀과 합류>
우리들의 서파에서 북파까지의 백두산 외륜 종주는 13km로 9시간 정도 걸리는 모양이다.
백두산을 남산북야(南山北野)라 하는 말 그대로 남쪽의 북한 땅은 백두대간으로 수많은 산들이 남을 향하여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이루는데, 이 장백산은 북으로 한반도의 7배가 넘는 드넓은 만주 평야로 열려있다.
그 중 구름 속에 쌓인 제일 높은 산봉우리 중 젖꼭지처럼 뾰족한 봉이 백두산의 주봉인 2,749.2m 장군봉이다.
장군봉은 일명 병사봉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백두봉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김일성 장군의 '장군'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1927년에 육당 최남선 선생이 쓴 '백두산근참기'에도 '장군봉'이라고 나온다니 말이다.
장군봉을 오르려면 도로를 통할 수도 있으나 끌차(잉크라인 철도)가 있다 한다. 망원경으로 바라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정상에 높은 안테나와 철조망과 기둥 같은 것을 흉하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북한은 백두산을 명승지 제19호로 지정·보호하고 있으면서 이 산을 '조선 혁명의 성산'이라 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쓴 ‘혁명의 성산 백두산’이라는 총길이 216m의 초대형 ‘향도봉 친필비’가 거기 호수 바깥쪽에 모자이크로 쓰여 음각되어 있다 한다. 산이 정치의 광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위해 삼지연군 백두산역에서 향도봉(일명 망천후)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여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한다.
*. 장백폭로(長白瀑布, 창바이푸부) 이야기
비 맞고 짚차로 천문봉에 올라 천우신조로 천지를 우러르고 다시 짚차로 천지길목(倒站口)에 내려와서 우리는 다시 장백폭포를 향하고 있다.
장백폭포 가는 길은 멀리서부터 폭포의 모습을 부분에서 전체로, 그 소리를 점점 가까이 하며 향하는 길이다.
그 길은 안개 같은 뿜어나오는 온천수가 짙은 유황냄새와 함께 그 멋을 더하고 있는 길이었다.
장백폭포 우측으로 동굴등산로가 길게 길게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백두산 돌은 박혀 있지 않고 구르는 돌이 많아서 만들어 놓은 안전 동굴등산로였다.
장백폭포는 천지 북쪽의 천문봉(天文峰, 2,670m)과 용문봉(龍文峰, 2,595m) 사이 달문(達門)에서 흘러내린 물이 1km 정도를 승하사(承擄河-뗏목이 흐르는 강), 우랑도(牛郞渡-견우와 직녀가 건넌 곳)를 거쳐 흐르다가 낙차 68m로 떨어지는 장백폭포가 된다.
평균 수량이 초당 2.15톤에 달한다는데 겨울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폭포로 그 소리가 200m 이상의 거리에서도 들린다는 폭포다.
그 흐르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무지개를 타고 오르는 모습이라서 장백폭포는 비룡폭포(飛龍瀑布)라는 애칭을 갖는다.
폭포를 보고 매표소를 내려오다 올라갈 때 지나친 1,000원에 2개 하는 온천계란을 먹어보니 그 맛이, 그 고장 특유의 먹거리와 함께 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체득하게 한다.
그 83도 보글보글 용출되는 온천수로 익힌 달걀은 물론 옥수수, 소시지가 유혹하나 저녁 시간이 가까워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라 백두산유황온천탕에 들어가서 온천 목욕을 하였다.
단순하고 어두운 시설과 야외 온천은 그 아름다운 백두산 영봉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아깝게도 그 담장이 그 모습을 가리고 있다. 송성만 지배인이 말한다.
"온천은 좋은 물이 제일이 아닙니까?"
이 말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발가벗은 몸으로 그의 방에 서 술자리를 벌였다.
여행은 만남이다. 자연을 만나고 문화를 만나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거기서 만난 사람은 조선족으로 연변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니 이 얼마나 황홀한 만남의 시간인가. 우리는 한국과 연변 조선족의 명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저께 묵었던 연길의 호텔에 돌아가서 석식 후에 일행과 함께 호텔 옆에 있는 시장 구경을 나갔다.
그렇게 보기 어렵다는 천지를 비옷을 입고 가서 보았고, 장백폭포와 백두산이 몸으로 삶은 계란을 먹고 온천 목욕도 하였으니 어찌 그냥 잘 수 있으랴.
우리는 야외 포장마차에서 이화주 1병에 맥주 6병에 꼬치안주를 먹었더니 한국 돈으로 21.000원이었다.
4년 전 왔을 때와 달리 위앤화는 2배나 올라서 10위엔 1,000원이던 것이 2000원이나 하였다. 오늘 나는 새벽에 연변장 터를 1시간 이상이나 구경하였고, 백두산 천지를 마음껏 카메라에 담았으며 여기에 장백폭포까지 더 하였으니 어찌 부라보 하지 않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