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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 결국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창29:31-35)
성경을 보면 축복에 관해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축복의 조건’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축복의 씨앗’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자세는 그 축복의 조건과 씨앗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둘러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축복을 얻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는 것에 더 집중하려고 해야 합니다.
맨날 없는 것만 보며 없는 것이 있기만을 희망하며 살게 되면 그거야말로 ‘희망 고문’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전 설교에서 믿음은 생각의 전환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서도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허구한 날 없는 것만 생각하게 되면 인생이 피곤해지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원망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결과는 감사한 인생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나에게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도 없는 것에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을 찾으려고 하면 내게 무엇이 있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매 순간 나에게 있는 것을 찾는 중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나에겐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빠가 죽어 장사된 뒤의 마르다와 마리아에겐 이젠 ‘오빠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신 그들에겐 뭐가 있었습니까?
그들에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계셨기에 오빠는 없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거치고 나니까 어찌 되었습니까?
오빠가 다시 있게 되었다가 사실인 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서도 없는 게 무엇이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만 믿는다면 그 없던 것이 다시 있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자 복 받을 기회인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고백에서도 보면 ‘나 가진 재물이 없고, 가진 지식 없으며, 남에게 있는 건강조차 있지 않아도 나에겐 남이 없는 것이 있으니.’라고 하면서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공평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면 하나님은 나에게도 남이 가진 것은 물론이고 남이 없는 것도 있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린 세상의 이런저런 것들이 없는 중에도 내게 있는 것을 찾으려 할진대 가장 먼저 ‘내게는 하나님이 있으심’을 생각하고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나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배경을 살펴보면, 야곱에게는 4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사실 야곱이 사랑해서 결혼하고자 했던 여인은 외삼촌의 두 여식 중에 동생인 라헬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정작 혼인은 언니인 레아와 하게 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사기 결혼을 당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야곱은 끝내 동생인 라헬과도 혼인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레아와 라헬 두 여인 중에서 레아는 야곱이 속아서 결혼한 여자였고 라헬은 야곱이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란 점에서 야곱은 누구를 진정한 아내요 사랑하는 여인으로 여겼을까요?
결국 라헬이 본처의 지위를 누렸고 레아는 언니였고 먼저 혼인했음에도 첩일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31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보면 둘 다 결혼한 여인인데 하나님은 레아에게만 자녀가 있게 하시고 라헬은 상관도 하지 않으신 듯한 말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은 왜 레아에게만 태의 문을 열어주신 걸까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만 보면 누가 봐도 레아와 라헬을 차별하시는 게 분명한데도 하나님이 뭐가, 어떻게 공평하시다는 걸까요?
여기서 우린 하나님의 ‘공평하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게 어떤 뜻인가요?
사전에서는 공평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공평은 ‘어느 쪽에서도 불평, 불만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심에 있어 어느 누구도 불만이나 불평이 없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모두에게 공평할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복을 주심에 있어 ‘믿음대로’ 혹은 ‘믿은 대로’ 되게 해 주신다는 기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기준이기에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을 안 믿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없는 게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절대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이,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지 ‘평등하신 하나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공평은 ‘기회의 동일함’을 말하는 것이고, 평등은 ‘결과의 동일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말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결과’가 있게 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심에 있어 누구라도 복을 받을 수 있는 ‘동일한 기회’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연 그 기회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어야만 믿은 대로 복 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겐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은 ‘나에겐 복을 받을 기회가 있다.’와 같은 말인 거고 같은 믿음이기에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믿음과 복 받음’의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가 본문에 등장하는 레아와 라헬 이야기입니다.
다시 31절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레아는 무슨 이유로 태의 문이 열리는 복을 받은 걸까요?
당시 레아에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남편의 마음이 온통 라헬에게만 가 있는 상황에서 레아가 하나님 말곤 누굴 믿고 누굴 의지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라헬에겐 하나님이 태의 문을 여셨다는 말씀이 없던 걸까요?
당시 라헬에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헬은 가만히 있어도 남편이 알아서 사랑해 주고 위해 주고 하다 보니 무심중에 라헬의 ‘믿는 구석’은 하나님이 아닌 남편이었던 겁니다.
어쨌든 공평하신 하나님이셨기에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대상’이 달랐기에 둘의 결과도 달랐던 겁니다.
32절로 35절을 보면 레아의 경우엔 자녀를 낳을 때마다 그 공로와 감사를 누구에게 돌리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혹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에서 보듯 레아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런 레아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라헬은 어땠습니까?
이어지는 30장 1절과 2절에서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하자 야곱이 말하기를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라고 합니다.
레아는 남편을 믿었지만, 남편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었는지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었던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것은 결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복 받을 기회는 있다. 믿기만 하면!’
이게 우리가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기회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기에 믿기만 하면 나에게도 복 받을 기회가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창세가 30:22절에서도 보면 늦게라도 라헬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소원을 두었기에 기록되기를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지금의 결과가 결국은 아니기에 당장의 결과에만 연연해서 실망하거나 믿음이 흔들리지 말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 결국엔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성가에서도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라고 했던 것처럼 세상엔 노력과 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까지 현재의 상황을 꾹 참고 견뎌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먹는 과일 하나도 하룻밤 사이에 익은 것이 아닙니다. 몇 번의 찬 겨울 눈보라를 맞았고, 몇 번의 뜨거운 여름 햇볕도 견디어 냈습니다. 때론 폭풍우와 비바람에 시달렸고 해충들이 계속 물어뜯었지만, 끝까지 가지에 붙어있었기에 결국엔 탐스런 과일을 맺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서 승리하시길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믿어 기회를 잡으신 것이기에 하나님이 그 기회를 결과로 바꿔주실 때까지 손 놓고 포기하지 말고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인 노력을 다 하시길 바랍니다.
신앙적으로만 노력하는 사람은 ‘광신도’일 뿐이고, 세상적으로만 노력하게 되면 불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신자가 되고자 하면 우린 신앙적으로도 할 수 있는 걸 다하면서 세상적으로도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노력과 열심히 필요합니다.
잘 아시는 말 중에 ‘진인사대천명’이란 게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림’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천명’ 즉 ‘하늘의 뜻’은 뭘까요?
사람들은 ‘운’이라고들 합니다. 따라서 운은 하늘에 맡기라는 뜻이기에 사람들이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할 때는 ‘대천명’보다는 ‘진인사’를 강조하는 데 더 큰 비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최선을 다했는데도 운이 안 따라 준다거나 운이 없다면 그땐 어떨까요?
‘하늘의 뜻이 그러니 어쩌겠나.’ 하고 말아야 할까요?
‘대천명’을 신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어 성경을 봐야 합니다. 중국어 성경에는 하나님이 ‘티엔 푸’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천부’라고 읽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진인사대천명은 ‘진인사’와 ‘대천명’ 둘 다에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신앙적이거나 세상적이거나 둘 중 하나만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다하려면 두 배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두 가지를 다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둘을 하나로!’ 합치면 쉬워집니다.
합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우선은 내가 세상적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전력을 다하세요. 그러면서 그 세상적인 일을 하기 전과 하고 난 후에 기도가 있게 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잠 깨자마자 새벽기도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며, 취침 전에 기도하는 것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오늘날 성도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하나는 ‘웃는 일’이고, 또 하나는 ‘기도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영어로 기도하는 것은 ‘프레이’(pray)라고 하고 노는 것은 ‘플레이’(play)라고 하는데 요즘 교인들은 교회에서 노는 플레이(play)는 잘하는데 기도하는 프레이(pray)는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웃을 기회’도 회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00살이나 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던 자식을 얻게 하시면서 그 이름을 무어라 지으라고 하셨던가요?
‘이삭’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웃음’입니다.
결국 ‘공평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받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고 결국엔 복을 주셔서 우리를 ‘웃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울어도 못하네’라고 하지만 기도하면 웃게 됩니다.
‘힘써도 못하네’라고 하지만 기도하면 해결됩니다.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기 위해 이제부터는 기도에서부터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따라하세요.) “지금은 기도 제목 / 나중은 감사 제목”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기도하면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있느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결과는 ‘대천명’ 즉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세상에서는 ‘진인사’ 즉 해야 할 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도우리라.’는 찬양곡을 보면 ‘세상일에 실패했어도 너는 절망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 참지 못할 슬픔 있어도 기도하며 담대하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실 것이기에 지금의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나중엔 ‘여러분의 감사 제목’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서 뭘 하든 기도부터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32절 이후에서도 보면 레아는 하나님이 자녀를 주실 때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괴로움을 돌보셨다”고 이름을 르우벤이라 지었고, 둘째는 “여호와께서 나의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고 시므온이라 지었으며, 셋째는 “여호와께서 남편이 나와 연합하도록 하셨다”고 레위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여호와께서 나의 찬송이 되셨다”는 고백을 담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레아는 왜 아들을 낳을 때마다 그런 고백을 했을까요?
레아의 감사 제목이 앞서 있었던 레아의 기도 제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때는 괴로운 중에 기도했기에, 둘째 때는 사랑받지 못한 신세를 기도했기에, 셋째 때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을 기도했기에, 그리고 넷째 때는 하나님이 해 주신 일들이 감사함을 기도했기에 그랬던 기도 제목들이 결국엔 감사 제목들이 된 겁니다.
레아처럼 여러분도 소망하는 것이 있으면 기도하세요. 예수님이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곧 감사할 거리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고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살고 복 받는 기회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의 안내를 받으며 오지 선교를 나선 선교사님이 가도 가도 밀림뿐이기에 안내하는 원주민에게 묻기를 ‘지금 제대로 가는 겁니까? 어째 계속 밀림뿐입니까?’라고 하자 원주민이 대답하기를 ‘밀림에는 길이 없습니다.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신앙의 길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인생의 길을 잃고 암담해도 예수님만 믿고 살면 길은 있습니다.
믿으세요. 하나님은 결국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만 믿을진대, 기쁘기 위해 기도해서 기쁨을 얻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