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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ing Together to Encourage to Love and Good Deeds 사랑과 선행을 함께 장려함 These facts help us appreciate the sense and force of this oftenquoted exhortation: 이러한 사실들은 자주 인용되는 권고의 의미를 이해하고 힘을 내도록 도움을 준다: Let us consider how we may spur one another on toward love and good deeds. Let us not give up meeting together, as some are in the habit of doing, but let us encourage one another—and all the more as you see the Day approaching.58 그리고 서로 생각해 주어 사랑과 훌륭한 일을 고무하며, 일부 사람들의 습관처럼 함께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오히려 서로 격려하며 그날이 다가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더 그렇게 합시다.58 Christian freedom offers no excuse for showing apathy toward others, simply living for oneself. Love draws people together. As members of Christ’s body, “individually we are members one of another.”59 Does, then, this stress on meeting together stated in the quoted text limit our Christian freedom, inhibit our expression of it, or once again make us subject to law, to rules? To the contrary it gives our freedom greater meaning, greater value.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며,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구실이 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끌어 당긴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 한명 한명이 우리 서로간의 지체이다."59 그렇다면, 인용된 본문에서 언급되었듯이 모임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의 그리스도인 자유를 제한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고, 아니면 다시 또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자유에 더 큰 의미와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There is nothing connected with the rigidity or formality of works of law in our interesting ourselves in others, showing brotherly affection for them and for their spiritual growth, by our seeking to be with them in brotherly gathering. Neither in the exhortation at Hebrews 10:24, 25, nor in any other part of Scripture do we have any declared set of rules governing such gathering together by fellow believers.60 While this text is used by some as a sort of spiritual “club” to enforce strict attendance at meetings routinely held at specific times, this calls for reading more into the exhortation than is there. The Greek word in this text rendered “give up,” “neglect” (or similar renderings), infers desertion or abandonment, something far more serious than a mere irregularity or occasional infrequency of attendance.61 Nor is there anything to show that being in attendance at such gatherings was ever presented by Jesus’ apostles as having greater merit as “worship” over other expressions of love and faith made in a Christian’s daily life. We do not find this idea expressed in any of the apostolic writings. As a source earlier referred to expresses it, Christians learned, or were encouraged to learn, that: 형제자매들의 모임에서 그들과 함께 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타인에 대한 형제자매의 애정과 그들의 영적 성장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율법적 행위의 엄격함이나 형식은 아무런 관련도 갖지 않는다. 히브리어 10장 24절, 25절의 권고나,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도 동료 신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규제하는 어떤 선언된 규칙들이 존재하지 않는다.60 이 본문은 일부 사람들에 의해 특정한 시간에 의례적으로 열리는 집회에 엄격한 참석을 강요하기 위한 일종의 영적 "동호회" 성격으로서 인용되지만, 이 본문의 권고는 글자 이상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더 자세히 읽을 것이 요구된다. 이 본문에서 "포기", "방임"(또는 비슷한 번역들)으로 번역된 그리스 단어는 단순히 불규칙하게 또는 어쩌다 만나는 것 이상의 모임을 갖지 않는 것, 포기하는 것 등, 훨씬 심각한 무언가를 암시한다.61 또한 그러한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예수의 사도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랑과 믿음의 표현인 "숭배"로서 합당한 것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이 어떤 사도의 글에서도 표현되지 않았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자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웠거나 배우도록 격려받았다: . . . worship involves the whole of one’s life, every word and action, and knows no special place or time. . . . Since all places and times have now become the venue for worship, Paul cannot speak of Christians assembling in church [ekklesia] distinctively for this purpose. They are already worshipping God, acceptably or unacceptably, in whatever they are doing.62 . . . 예배는 한 사람의 삶 전체, 특별한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모든 말과 행동을 포함한다. . . . 모든 장소와 시간에서 이제 예배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러한 목적으로 교회 [에클레시아]에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뚜렷이 구별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받아들여지든 않던 간에 이미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다.62 In considering the Biblical evidence of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the remarkable fact is that we find there simply is no set pattern laid out for us as regards Christian gathering. Initially, following Pentecost, the apostles and others gathered daily in the temple for discussion and exhortation.63 It is unrealistic to assume that most would be able to do so after that initial period, nor is there any indication that they did. Their sharing meals with their brothers in various homes is listed right along with their temple gatherings, and, since meals were often the occasion for Christ’s informally conveying spiritual benefit, this was likely true in this case.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관한 성서적 증거를 고려했을 때, 대단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리스도인 집회에 대해 정해진 패턴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오순절 이후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이 토론과 권고를 하기 위해 매일 성전에 모였다.63 대부분의 사도들이 초기의 이러한 관례에 따라 계속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들이 여러 집에서 동료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은 그들의 성전 모임에 이어 곧바로 기록되어 있으며, 식사가 종종 비공식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유익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에, 이 식사 모임의 경우는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At Ephesus, during the first three months Paul met at the synagogue, hence on a weekly basis each Sabbath.64 When moving out of the synagogue, he then held “discussions daily in the lecture-hall of Tyrannus,” doing this over a two-year period.65 It is illogical to assume that those who met with him were the same persons each day, since few persons could be free to spend their time this way for a twoyear period. We know that Paul was there day by day; we do not know definitely of anyone else who was. Nor is there anything to show that thereafter in Ephesus—or in any other place—Christians met with identical frequency. In many cities in the Roman Empire the slave population was very large, forming fully one third of the population of larger cities, such as Rome, Ephesus, Antioch and Corinth.66 While many of these were not mere laborers but held positions at times of quite high responsibility ( as was Joseph in Egyptian Potiphar’s household), it is still unlikely that most slaves were free to attend gatherings at will. 바울은 에베소에서 처음 석달 동안 안식일을 근거로, 매주 회당에서 만났다. 회당에서 나올 때에, `두란노의 강당에서 매일 토론하여, 2년 동안 이 일을 계속하였다. `두란노 강당에서 매일 토론하여, 2년 동안 자유롭게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매일 같은 사람과 만나 토론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우리는 바울이 날마다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누구를 만나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 후 에베소나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빈도로 만났다는 것을 보여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로마 제국의 여러 대도시에서는 노예 인구가 매우 많아 로마, 에베소, 안디옥, 고린도와 같은 도시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66 이들 중 대다수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때때로 꽤 높은 책임을 맡은 위치에 있었으므로(보디발 집안의 요셉처럼), 대부분의 노예들은 집회에 자유로이 참석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Aside from such accounts in the book of Acts, the Christian Scriptures, though filled with all manner of exhortation, simply contain nothing outlining or commending any specific program for Christian gathering, either as to time, frequency or format. The exhortation to gather together is there, fellow love being the motivating force. The essential aim and purpose is stated, to stir one another up to love and fine deeds; but the manner and form are left open. 사도행전의 이러한 설명 외에도, 신약 성경은 다양한 종류의 권고로 가득 차 있지만, 그리스도인 집회의 시간, 빈도, 형식에 관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거나 추천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함께 모여야 한다는 권고는 바로 동료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동기부여를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사랑과 선한 행위로 서로를 자극하기 위한 본질적인 목표와 목적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방법과 형식은 열린 채 유보되어 있다. This feature of informal gatherings among early Christians allowed for persons to express themselves, to be themselves, speak from their own minds and hearts, not simply repeat supplied material, engaging in some tightly controlled, pre-programmed, catechistical questionand-answer session. People would genuinely come to know one another, know how a person actually felt and viewed matters, not merely hear people make expressions that were actually representative of someone elses’ thinking and views, rather than the individual’s own.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비공식적인 모임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이 주체가 되고, 제공된 자료를 단순히 반복하여, 엄격히 통제되고 사전에 프로그램된 몇가지 주제별 질의응답 모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개인의 생각이나 견해를 대변하는 발표를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서로를 알게 되고, 사람들이 문제를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보는지 알게 되며,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견해와 생각을 대변하는 것을 듣는 것이었다. In the absence of tight control by an authority structure, what prevents such meetings from deteriorating into debates over dissenting views? Even during the time of the apostles, who did have a divinely assigned special authority, there is nothing to show that they or anyone else, individually or collectively, exercised a rigid control over the gatherings and discussion of Christians. Perhaps the most extensive, almost the only, discussion of meetings is that found in First Corinthians chapter fourteen. And there the only emphasis is on basic and considerate order and a seeking to convey understanding. 권위 구조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집회에서 반대되는 견해가 논쟁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아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신성한 특권을 부여받은 사도들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과 토론에 대해 경직된 통제를 행사했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마도 가장 광범위하고 유일하게 논의가 되었던 모임은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유일하게 기본적인 질서에 대해 사려깊은 강조를 하고 있으며, 이해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Elsewhere, of course, there are exhortations against debating, antagonistic speech, uselessly involved discussions and similar negative practices.67 But, rather than exercise some coercive power over believers, the means of combating these wrongs was primarily persuasive, emphasizing and encouraging positive qualities. 물론 그외 다른 곳에서는 논쟁, 적대적인 연설, 무익한 토론과 그와 유사한 부정적인 습관들에 대한 권고들이 들어 있다.67 그러나 강압적인 힘을 신자들에게 행사하기 보다는, 주로 설득력이 있고 긍정적인 자질을 강조하고 격려함으로써 이러한 잘못된 것들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
This freeness, then, represented both an opportunity and a test. It called on all those sharing it to demonstrate that they were indeed gathered together to build one another up and encourage to love and fine deeds—not merely to make a display of personal knowledge, or advance and debate personal theories. Instead they were to show consideration for others, exercising self-control for the good of all, manifesting humility, deference, patience, understanding, fellow feeling, compassion and sincere concern to reflect the headship of God’s Son.68 These are the true remedies for confusion or bickering, the proper source of peace and harmony. They are the product of God’s holy Spirit and it was that Spirit that would serve as the controlling factor, preserving order and assuring a healthful, wholesome atmosphere and quality to the gathering.69 As long as persons showed a spirit of deep respect for Christ’s headship, viewing him as “among them” even when their visible numbers might be as apparently insignificant as two or three, matters would not get out of hand or deteriorate into useless, unwholesome, disputatious talk.70 The same remains true in our time. 그리하여, 이 자유는 기회이자 시험이었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지식을 과시하거나 개인적인 이론을 발전시키고 토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세워주고 사랑과 선한 행실을 장려하기 위해 함께 모였음을 증명하도록 그것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었다. 대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모두를 위해 자기 통제를 행사하고, 겸손, 존경, 인내, 이해, 동료애, 동정심,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머리 역할을 반영하는 진실한 배려를 드러내도록 했다.68 이것은 혼란과 말다툼을 진정시키기 위한 치료책이며, 평화와 연합의 적절한 원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산물이며,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들 가운데"에 모시고, 질서를 지키고, 건강하고 건전한 분위기와 질을 보장하면서, 그 모임에 지배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영이었다.69 두세 가지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이는 문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거나 쓸모없는, 불건전하고 논쟁적인 이야기로 변질되지 않을 것이다.70 우리 시대에도 그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Divisions come when persons seek to make definite, explicit and conclusive what the Scriptures themselves leave indefinite or subject to more than one possible understanding. They come when persons make major issues out of what—when the whole picture is viewed—occupy the place of minor points; when they make rules out of what is simply counsel or a general statement of principle. They may also come when persons fail to acknowledge that, while they themselves have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and Christ, so do all their brothers and sisters, and that none has some special “line of communication” with God and his Son that is not available to every other member of the body. This can protect us against thinking we have some unique insight or specially intimate relationship that sets us apart from others, makes us a divine “channel” for them. 성서 자체가 확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거나 또는 둘 이상의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명확하고 명시적으로 결정하고자 할 때 의견 차이가 일어난다. 사람들이ㅡ전체 그림의 관점에서 본다면ㅡ사소한 사항에서 문제가 제기되면; 단순히 일반적인 조언이나 원칙의 진술로 기준을 삼고자 할 때 분열이 일어난다. 또한 그들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형제자매들도 모두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분열이 올지도 모른다. 또한, 회중의 다른 모든 성원들이 이용할 수 없는 하나님이나 그분의 아들과의 특별한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할 때에 오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거나 우리를 그들에게 신성한 "통로"로 만들게 하는 독특한 통찰력이나 특히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게 할 수 있다. Faced with the various Biblical interpretations one can find, sometimes differing widely one with another, it seems the greatest safeguard rests in seeking always to keep the whole picture, the overall message, in view, not isolating one part from the other. The reason for such a wide variety of interpretation of various points undoubtedly has a relation to the tendency to focus on one part of Scripture rather than looking at it as a whole. A friend recently sent me some information that included a quotation from B. F. Westcott, who shared in the development of the well-known Westcott and Hort text or recension of Scripture. In his book The Bible and the Church, he makes this comment: 우리가 볼 수 있는 다양한 성경 해석에 접하거나, 때로는 서로 크게 다른 해석에 접했을 때, 가장 큰 안전장치는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별도로 분리시켜 해석하지 말고 전체 그림, 전체적인 메시지에 항상 시야를 두는 데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다양한 점들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이유는 성서 전체를 보기보다는 성서의 한 부분에 집중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친구가 B F. 웨스트코트에서 인용한 정보를 보내왔다. B. F. 웨스트코트는 잘 알려진 웨스트코트/호트의 성경 본문 또는 교정본 연구의 공동 참여자이다. 그의 저서 성경과 교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한다: No temptation is more subtle or more potent than that which bids us judge everything by one standard. Practically we are inclined to measure others by ourselves, other ages by our own, other forms of civilization by that under which we live, as the true and final measure of all. Against this error, which is sufficient almost to cloud the whole world, the Bible contains the surest safeguard. In that we see side by side how God finds a dwellingplace among nations and families in every stage of social advancement, and recognizes faithful worshippers even where they are hidden from the eyes of prophets. The absorbing cares of daily life, the imperious claims of those immediately around us, tend to narrow our sympathies, but the Bible shows to us, in an abiding record, every condition and every power of man blessed by the Divine Spirit. It lifts us out of the circle of daily influences and introduces us to prophets and kings and deep thinkers and preachers of righteousness, each working in their own spheres variously and yet by one power and for one end. It may be objected that devout students of the Bible have often proved to be the sternest fanatics. But the answer is easy. They were fanatics because they were students not of the whole Bible but of some one fragment of it to which all else is sacrificed. The teaching of one part only, if taken without any regard to its relative position in connexion with other times and other books, may lead to narrowness of thought, but the whole recognizes and ennobles every excellence of man. 어떤 유혹도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유혹보다 더 미묘하거나 더 강력하지는 않다. 사실상 우리는 모든 것의 진정한 최종 척도로서 우리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 자신의 시대를 기준으로 다른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기준으로 다른 형태의 문명을 측정하는 경향이 있다. 온 세상을 거의 흐리게 하기에 충분한 이 오류에 맞서 성경은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를 담고 있다. 우리는 사회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하나님이 나라와 가족 사이에서 거주지를 어떻게 찾는지 어려움 없이 알고, 선지자들의 눈에 가려진 곳에서도 어떻게 충실한 숭배자를 인정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일상생활의 지나친 염려, 우리 주변 사람들의 고압적인 주장은 동정심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성경은 영으로 축복받은 인간의 모든 상황과 모든 능력을 변치 않는 기록에 의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를 일상 생활의 지나친 염려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예언자와 왕과 깊은 사상가들과 정의의 전파자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그 각각은 다양한 방식이지만 여전히 하나의 힘으로 그리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도움을 베푼다. 성경의 독실한 연구생들이 매우 엄격한 광신도인 것으로 종종 판명되었다는 것은 이의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전체 성경의 연구생이 아니라 성경의 일부분만 인정하여 나머지는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한 부분의 가르침만을 강조한 나머지, 다른 시대와 다른 부분의 성경과 연관지어 상대적인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해석된다면, 편협한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연관지어 강조될 때, 연구생의 모든 우수한 점이 인정되고 고귀하게 된다. When Paul wrote to the Corinthians urging them to be “united in the same mind and the same purpose,” the context shows that he was appealing, not for a total uniformity of understanding of each and every point in Scripture, but rather for the putting aside of divisive attitudes that were splitting them up into factions, so that they could be of a united disposition and outlook. 71 The test of true unity is not uniformity of belief on every single point. Paul’s letters almost without exception show that among Christians in the different places to which he wrote some saw certain things differently from others. Christian unity proves itself genuine when differences of viewpoint do exist and yet the persons holding such differing views refuse to allow this to divide them. And they do this because of recognizing that, while differing in understanding of certain points, they are members of a spiritual family sharing a common faith based on clearly stated, foundational teachings contained in the good news.72 Not uniformity, and certainly not a humanly imposed uniformity, but love is “the perfect bond of union.”73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같은 마음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연합하라"고 촉구했을 때, 문맥은 그가 호소하고 있었던 점이, 성경의 각 요점들에 대한 이해의 절대적 획일성이 아니라, 그들이 연합하고자 하는 태도와 관점을 지닐 수 있도록 파벌로 갈라놓는 분열적 태도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71 진정한 연합의 시험은 모든 점에서 신조의 통일성이 아니다. 바울의 편지는 거의 예외 없이 그가 편지했던 다른 도시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가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견해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러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양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때 그 자체는 각각 진실된 것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그들은 특정한 점에 대한 이해는 다르지만, 그것들이 좋은 소식으로 언급되고 포함된 기본적 가르침에 기초한 공통의 믿음을 공유하는 영적 가족의 구성원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72 획일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적으로 강요된 획일성이 아니라, 사랑이 "연합의 완전한 결합의 띠"이다.73 This also provides the favorable climate in which knowledge and understanding can grow and deepen. Differences of viewpoint, rather than dividing, can move persons to greater efforts at understanding— both as regards the viewpoint itself and as regards the person advancing it. They can rouse us to increased study and thought, so as to deal with whatever problem those viewpoints may present, and can impel us in efforts at finding a solution for them in love. They can in this way result in making evident just how genuine the Christianity of each one is, even as the apostle indicates at 1 Corinthians 11:19. 이는 지식과 이해가 성장하고 깊어질 수 있는 유리한 분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견해의 차이는,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 그 자체와 그것을 진전시키는 사람에 대한 이해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이게 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연구와 사고를 증가시켜, 그러한 관점들이 어떤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다루게 할 수 있고, 그들을 위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우리를 추진하게 만들 수 있다. 그들은 사도가 고린도 11:19에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방법으로 각각이 지닌 그리스도의 정신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나타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Christian freedom thus represents a challenge to us in our association with others, for it calls us on to demonstrate that we truly do have “the mind of Christ.”74 If we steadily and genuinely ‘hold fast to him as our head’ in all things and at all times, we will never fail in proving ourselves to be harmonious “members one of another” in his body of followers.7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에 있어서 우리에게 도전을 의미한다.74 만약 우리가 모든 일에서 그리고 항상 꾸준히 그리고 진정으로 "그분을 우리의 머리로서 고착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의 몸 안에서 서로에 대해 조화로운 "하나의 지체"임을 증명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75 Is an Authority Structure Needed? 권위 구조가 필요한가? How did Christian congregations come into being in the first century? There is nothing to indicate that people were “organized” into a congregation. How did a congregation form? It formed simply as a result of people congregating, getting together, doing so out of mutual faith and mutual interest in building up one another in that faith. What then of the different terms found in the Christian Scriptures, such as elder, overseer, deacon (“helper,” TEV), teacher, shepherd? First-century circumstances in this regard can serve as a model. This cannot, however, be a precise model. The reason is that not all the circumstances remain the same today. We read that the household or family of God was “built up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 self as the cornerstone.” Though not present on earth, Christ Jesus remains with us, and “in him the whole structure is joined together.”76 But that is not the case with the apostles. They have ceased to be. The very fact that they were for a ‘foundational’ purpose implies that their function was fitted for the beginning stages of Christianity. The “prophets” referred to may be Christian prophets, rather than the pre-Christian prophets of the Hebrew Scriptures.77 If so, the fact that the prophets are mentioned in the same way as the apostles would indicate a similar initial role in Christianity, one that, like that of apostleship, was due to end.78 1세기에 그리스도인 회중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사람들이 회중으로 "조직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증거는 전무하다. 어떻게 회중이 생겨났는가?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들고, 함께 모이고, 상호간의 믿음과 상호간의 관심에서 모임으로써 서로의 믿음을 세워주는 결과로 형성되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 성경에서 발견되는 구별되는 용어들 장로, 감독자, 집사(보조자, TEV), 교사, 목자 등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이점과 관련된 1세기 상황이 하나의 모델로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모형이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오늘날 모든 상황이 1세기와 같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 식구나 가계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춧돌로 삼아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성서에서 읽게 된다. 비록 지상에는 계시지 않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분 안에서 모든 구조는 함께 연합되어 있다."76 그러나 사도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들이 '창립의 기초를' 이룰 목적을 위해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사도직의 존재 기능이 기독교의 초기 단계에 적합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람들로 된 선물 중의 하나인 "예언자"는 그리스도 이전의 예언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일 수 있다.77 만약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사도들과 같은 방식으로 언급된다는 사실은 궁극적 목적으로 인하여 사도직의 그것과 같은 그리스도교에서의 비슷한 초기 역할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78 Like many other religions, Jehovah’s Witnesses accept that there is no succession of apostles beyond the first century. Yet as we have seen, while not taking the title of apostle, nor speaking of themselves as holding the office of apostle, men in different religions endeavor to robe themselves with apostolic authority. The Governing Body of Jehovah’s Witnesses assumes authority equalling that of the apostles, at times even beyond that of the apostles.79 The leadership of various other religions does similarly. We can be “apostolic” today only in the sense of holding to the apostolic teaching. Aside from Christ Jesus, holy Spirit, and God’s Word, those few men were, by virtue of their divine appointment, the one external source of authority which any congregated group of Christians would rightly recognize. But their divinely received apostolic assignment and authority was unique. It does not exist today. That has considerable bearing on our understanding how certain circumstances in the initial stage of Christianity and our own time may differ. 대부분의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증인들도 1세기가 지나서는 사도들의 계승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사도의 직함을 받지도 않고, 사도의 직책을 맡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으면서도, 여러 종교의 사람들은 사도의 권위를 가진 옷을 입으려고 애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통치체는 사도들의 권위를, 때로는 심지어 사도들의 권위를 넘어서까지 사도들의 권위와 동등한 권위를 가지려 하고 있다.79 다양한 다른 종교들의 지도부도 비슷하다. 오늘날 우리는 사도적 가르침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만 '사도적'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하고, 그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신성한 임명에 의해, 어떤 모인 그리스도인들이든 정당하게 인정할 수 있는 권위의 외적 근원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신성한 임무와 권위는 독특했다. 그것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초기 시절과 우리 시대의 특정한 상황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A Dynamic Arrangement—Not a Static One 정체된 방식이 아닌 동적인 방식 Another factor that bears on our understanding is the principle set out at Ephesians 4:11-16. It states that the services rendered by individuals within the congregations, including those provided by apostles, prophets, evangelists, shepherds and teachers, were all designed to bring people to a goal. As we have seen, the goal was, not for them to remain childlike, needing others to teach and shepherd them, but for them to “grow up in every way into him who is the head, into Christ.”80 The passage of time should lessen their need of others to render such services and should increase their own ability to act as grown, mature persons who are not constantly dependent on others. In the letter to the Hebrews the writer reproves those he addresses, saying, “By this time you should be teaching others.”81 우리의 이해와 관계가 있는 또 다른 요소는 에베소 4장 11-16절에 규정된 원칙이다. 사도, 예언자, 복음 전파자, 목자, 교사 등을 포함하여 회중 내 개인들이 행하는 봉사가 모두 사람들을 목표에 이르게 하기 위해 마련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목표는, 그들을 가르치고 양떼를 돌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며, 그들은 여전히 어린이와 같은 상태로 머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든 면에서 머리인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었다.80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봉사를 제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할 필요를 줄여주고, 끊임없이 남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어른으로서 성숙하게 행동할 수 있는 그들 자신의 능력을 증가시켜야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필자는 "이때 쯤이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수신자들을 책망한다.81 Any religious system that perpetuates the dependence of its members on the services of certain men is working against the goal set forth. Not that every person is expected to develop to become like every other person, having the identical abilities or “gifts” in identical measure. But all should become “adult” Christians, mature in understanding and in the ability to live a Christian life, to make mature decisions that are their own, not those of someone else. They should all be functioning members of “the body of Christ,” not just receiving the services of other members, but each contributing a valuable and beneficial service himself or herself. That is the picture conveyed to us in the Christian Scriptures.82 특정 사람들의 봉사에 대한 의존도를 영구화시키는 어떤 종교 체계도 정해진 목표에 반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능력이나 "선물"을 가지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의 결정이 아닌 그들 자신의 성숙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해력과 그리스도인 삶을 사는 능력에서 성숙한 "성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기능을 하는 성원이어야 하며, 다른 성원들의 봉사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각자 가치 있고 유익한 봉사에 기여해야 한다. 그것이 신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그림이다.82 Instead of continuing in constant need of shepherding service by others, they are to gain strength so as to be able to go themselves to the aid of others. Not to some church officials or organizational leaders, but to the Christians in Galatia generally Paul writes: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목회 활동을 필요로 하는 대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친히 도울 수 있도록 강화되어야 한다. 일부 교회관계자 또는 조직지도자들에게는 예외지만, 갈라디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My brothers, if someone is detected in sin, you who live by the spirit should gently set him right, each of you trying to avoid falling into temptation himself. Help carry one another’s burdens; in that way you will fulfill the law of Christ.83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83 Discussing this exhortation, one commentary states: 이 권고를 논의함에 있어서, 어떤 주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It is very impressive that to ‘love one another,’ ‘bear one another’s burdens’ and ‘fulfill the law’ are three equivalent expressions. It shows that to love one another as Christ loved us may lead us not to some heroic, spectacular deed of self-sacrifice, but to the much more mundane and unspectacular ministry of burden-bearing. When we see a woman, or a child, or an elderly person carrying a heavy case, do we not offer to carry it for them? So when we see somebody with a heavy burden on his heart or mind, we must be ready to get alongside him and share his burden. Similarly, we must be humble enough to let others share ours. To be a burdenbearer is a great ministry. It is something that every Christian should and can do. It is a natural consequence of walking by the Spirit. It fulfills the law of Christ.84 '서로 사랑하라' '서로의 짐을 지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세 가지 대등한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를 영웅적이고 화려한 자기 희생의 행위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봉사의 짐을 지는 것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여성, 어린이, 노인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것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하지 않는가? 그처럼 우리가 그의 마음이나 정신에 무거운 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와 함께 그의 짐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것을 공유하게 할 만큼 충분히 겸허해야 한다. 짐꾼이 되어주는 것은 훌륭한 봉사활동이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걸어가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84 |
Emphasis on Service and Function, Not Office and Position 직분이나 직위가 아니라 봉사와 역활을 강조 A final factor that needs consideration is that the various designations of shepherd, teacher, evangelizer, and so forth, describe services to be rendered, work to be done on behalf of the Christian community, not offices in the sense of institutional positions in a structured arrangement.85 As we have seen, the apostle does mention “apostles, prophets, and teachers” in his comparison of the Christian community with the human body. But previous thereto he describes the spiritual gifts that enable all, each and every one, of the members (hence, including the apostles, prophets and teachers) to care mutually for one another, and in doing so he focuses, not on offices or organizational positions, but on services and work, saying: 고려되어야 할 마지막 요소는 종교 기관에서의 직분이나 구조화된 위계에서의 신분이 아니라 목자, 교사, 복음 전파자 등 다양한 선물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하여 제공되어야 할 봉사와 해야 할 일을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85 우리가 살펴 본 대로 사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체에 비유하면서 "사도들, 예언자들, 교사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앞에서 그는 모든 성원(사도, 예언자, 교사 등)이 서로를 돌볼 수 있도록 하는 영적 선물을 설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직분이나 조직의 지위가 아니라 봉사와 일에 초점을 맞추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re are varieties of service, but the same Lord. There are many forms of work, but all of them, in all men, are the work of the same God. In each of us the Spirit is manifested in one particular way, for some useful purpose. . . . But all these gifts are the work of the one and the same Spirit, distributing them separately to each individual at will.86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86 The apostle Paul demonstrates the emphasis on the service or activity performed, rather than an office, by sometimes using simply a verb form rather than a noun. As an illustration, if one uses the noun “president,” the thought of an office is immediately conveyed. If instead the verb form “presiding” is used, the thought goes to the action and not to an office or position. In verse 28 of the section of Paul’s letter to the Corinthians from which the previous quotation comes, along with such nouns as “apostles,” “teachers,” “prophets,” the apostle also lists some “verbal” nouns, literally “helping” and “giving of direction.”87 사도 바울은 때때로 명사가 아닌 동사 형태를 사용하여 직무가 아닌 수행되는 봉사나 활동에 중점을 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대통령이라는 명사를 쓰면 직분이라는 개념이 바로 전달된다. 대신 "주재함"이라는 동명사 형식을 사용한다면, 개념이 직분이나 직책이 아닌 행동방식으로 전달된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28절에서 앞의 인용구가 "사도", "교사", "예언자"와 같은 명사와 함께, 사도는 문자적으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같은 몇개의 "동사형" 명사를 열거하기도 한다.87 Some translations render these “verbal” nouns by such terms as “helpers, administrators” (RSV), “helpers, good leaders,” (JB), “helpers, counsellors,” (PME), “assistants, administrators,” (NAB). Other translations, recognizing clearly that what is described are not official positions but functions and services, render the expressions as “forms of assistance, forms of leadership,” (NRSV), “assistance, administration” (NAB, Revised Edition), “[those who have] ability to help others or power to guide them,” (NEB). As scholar Robert Banks, states: 일부 번역에서는 "돕는자, 관리자"(RSV), "돕는자, 선한 인도자"(JB), "돕는자, 상담자"(PME), "보조자, 관리자"(NAB)와 같은 용어로 "동사형" 명사로 표현한다. 기술된 것이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역활 및 봉사임을 명확히 인식한 다른 번역에서는 "지원 형태, 리더십 형태"(NRSV), "지원, 행정"(NAB, 개정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 또는 이들을 안내할 권능이 있는 사람]" (NEB)으로 표현한다. 학자인 로버트 뱅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y [the two Greek nouns (relating to assistance and administration)] simply mean the rendering of assistance and the giving of direction in a less personalized way. . . . ‘helpful deeds’ and ‘practical initiatives’ are about as close as one can get. Once again these terms are not technical in character. Certainly no official positions in the church are in view. Their application to functions rather than the persons engaged in them, their ranking so far down the list of gifts and, perhaps, their occurrence only here in the New Testament all support this.88 이들 [(보조와 행정에 관련된) 두개의 그리스 명사]는 단순히 도움을 제공하는 것과 약간의 개인적 방식으로 지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 . 베풀 수 있는 '도움이 되는 행위', '실천적 주도성'. 다시 말하면, 이 용어들은 성격상 사무적이지 않다. 어떤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 직분에 종사하는 사람보다는 역활에 적용되는 것이며, 신약 성서에서만 나오는 모든 선물 목록에서의 순서나 언급은 아마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88 In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I, page 197, we find this related comment: <신약신학 신국제사전>에서는, 제 I 권, 197면에서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논평한다: The present writer believes that there was as yet no institutionalized or precisely differentiated offices in the church known to Paul. . . . This is confirmed by the list of gifts in Rom. 12:8, where the prohistamenos [“giving direction” or “caring for”] is characterized by spoude (zeal). The prohistamenos is here listed alongside the didaskon (he who teaches), the parakalon (he who exhorts), the eleon (he who does acts of mercy). All of these words are participles which suggest an activity rather than an office. 바울에게 알려진 교회에는 아직 제도화되거나 정확하게 구분된 직분은 없다고 현재의 필자는 믿고 있다. 이는 프로히스타메노스 ["지시를 내림" 또는 "보살핌"]가 스푸드(열성)로 특징지어지는 롬 12:8의 선물 리스트로 확인된다. 프로히스타메노스는 여기 디다콘(가르치는 자), 파라칼론(권고하는 자), 엘레온(긍휼을 베푸는 자)과 함께 나열되어 있다. 이 단어들은 모두 직분이 아닌 활동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Another factor worth keeping in mind if we are to develop an accurate viewpoint in this area is that often the original language words allow for a fairly wide variety of meanings. Some translators choose those meanings that lend support to the concept of a structured arrangement and of considerable official authority. As one example, the New American Bible at Romans 12:8, employs the expression, “he who rules should exercise his authority with care.” Here the phrase, “he who rules” translates the Greek ho proistámenos (literally, the [one] standing before). Other translations giving an authoritative cast to their translation use such terms as “the man in authority” (PME), “leader” (NEB, NRSV ), “leadership . . . govern” (NIV), “officials” (JB), “officeholder” (AT). Yet the Revised Standard Version renders this same expression simply as “he who gives aid.” Why such a difference? 우리가 이 분야에서 정확한 방향을 잡기 위해 고려할 가치가 있는 또 다른 요소는 종종 원 단어들의 언어가 상당히 다양한 의미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일부 번역자는 구조화된 약정과 상당한 공적 권위에 의해 뒷받침하는 개념의 의미를 선택한다. 그 한 예로 로마서 12장 8절의 신미국역( the New American Bible )은 "다스리는 자는 신중하게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다스리는 자"라는 말은 그리스어 프로이스타메노스(문자적으로 앞에 서 있는 자)를 번역한 단어이다. 권위 있는 또 다른 번역들은 "권위를 가진 자"(PME), "지도자"(NEB, NRSV), "다스리는 . . . 지도체제"(NIV), "공무원"(JB), "공직자"(AT)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개정 표준역(RSV)은 이 동일한 표현을 단순히 "도움을 베푸는 자"와 동일시한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가? It is because the original language term (proistemi) has a wide latitude of meaning. Sources show it can mean to lead, to direct, to assist, to protect, to represent, to care for, to support, to concern oneself with, to apply oneself.89 The context is the guide as to which of these meanings is involved and generally, in the places where this term appears in the Christian Scriptures, translators choose between the two senses of “to lead” and “to care for.”90 Those inclining to give a tone of authority, do so; those favoring a sense of caring for and supporting similarly show this by their translation. Whatever the case, the rendering “he who gives aid” has full validity and certainly harmonizes well with the spirit of the Christian Scriptures as a whole, and particularly with the example and spirit of God’s Son. 원래 (프로스테미)라는 용어는 의미의 폭이 매우 넓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용된 출처를 살펴보면 "인도하다", "지시하다", "보조하다", "보호하다", "대표하다", "돌보다", "지원하다", "관여하다", "전념하다" 등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89 맥락은 이러한 의미와 관련되며, 일반적으로 이 용어가 신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곳에서 번역자들은 "인도하다"와 "돌보다"라는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선택한다.90 권위의 어조를 부여하는 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은 "인도하다"로 번역하고, 돌보고 지지한다는 느낌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돌보다" 로 이 용어를 번역한다. 어떤 경우든 '도움을 베푸는 자'라는 표현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신약 성경 전체의 정신,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 보이신 모범과 잘 조화된다. The same phrase appears at 1 Thessalonians 5:12, where we find this exhortation (NRSV rendering): 데살로니가 전서 5:12에 동일한 문구가 나타나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권고(NRSV)를 볼 수 있다: We appeal to you, brothers and sisters, to respect those who labor among you, and have charge of you in the Lord and admonish you.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일하는 사람들을 존중하여 주시고, 여러분을 주님 안에서 돌보고, 여러분을 권고해 주십시오. Again we find a similar range of translations of this phrase. Some read: “[those who] exercise authority in the Lord” (NAB), “[those] over you in the Lord” (RSV); “[those] above you in the Lord.” Other translations, however, read “[those] who lead you in the service of the Lord” (AT) and “those whom the Lord has chosen to guide [you]) (TEV). Here, in this verse, unlike 1 Corinthians 12:28, three participial forms (“working,” “caring for [or leading],” and “teaching [or admonishing]” rather than nouns are used. Showing the difference this produces, Banks comments: 우리는 이 구절과 유사하게 번역된 부분을 다시 찾아냈다. 일부는 다음과 같다; "주 안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NAB) ,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는 [사람들]" (RSV), "주 안에서 너희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 그러나 다른 번역본에는 "주의 봉사에 여러분을 인도하는 사람들"(AT)과 "주께서 [여러분을] 안내하기 위해 선택하신 [사람들]"(TEV)로 되어 있다. 이 절에서 고린도전서 12:28과는 달리, 명사보다는 세개의 분사형(일하는 것), [또는 지도하는 것], 그리고 [또는 권고하는 것]이 사용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점에 대해 뱅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Together these three words simply indicate the effort expended by such people in carrying out their tasks, the supportive character of their work and the note of exhortation and warning appropriate to it. . . . what is in view here is not official positions within the community but special functions.91 이 세 단어들은 모두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쏟은 노력, 그들의 일에 대한 지지적 성격, 그리고 그것에 적절한 권고와 경고를 기록한 간단한 메모가 나타난다. 여기서 관찰되는 것은 공동체 내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 특별한 역활이다.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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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Hebrews 10:24, 25, NIV.
58 히브리서 10:24, 25, NIV
59 Romans 12:5, NRSV.
59 로마서 12:5, NRSV
60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Vol. IV, page 347), in discussing Hebrews 10:25, comments on the writer’s use of the rather lengthy phrase episynagogen heauton (gathering together of selves) instead of the simple synagoge (assembly, congregation), saying that synagoge “might rather have suggested the building and formal stated meetings, while episynagogen heauton denotes merely the meeting together of Christians.”
60 <해설자의 신약 성서> (IV권, 347면)은 히브리서 10:25에 대해 논하면서, 단지 회당(집회, 회중 )이 아니라, 다소 긴 표현인 에피시나고겐 헤우톤(자체 모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건물이나 공식적인 모임을 제안했을 수도 있고 단지 그리스도인 모임을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61 Compare its use at Matthew 27:46; 2 Corinthians 4:9.
61 마태복음 27장 46절, 고린도 2장 4장 9절에서 그 용도를 비교해 보라.
62 Paul’s Idea of Community, page 92.
62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생각> 92면.
63 Acts 2:46; 5:42.
63 행 2:46; 5:42.
64 Acts 19:1, 8. The evidence points to similar synagogue attendance among many Christians initially, that attendance evidently continuing until opposition made it unfavorable. (Acts 18: 24-26; compare John 16:1, 2.)
64 행 19:1, 8. 그 증거는 처음에는 많은 기독교인들 사이에 회당 참석과 비슷한 형태를 가리키는데, 유대인 반대파가 그것을 불리하게 만들 때까지 그러한 참석은 분명히 계속되었다. (행 18:24-26; 요한 16:1, 2. 비교)
65 Acts 19:8-10, NEB.
65 행 19:8-10, NEB
66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Vol. V, page 54
66 <국제 표준 성서 백과사전>, 제5권, 54면
67 Galatians 1:13-15; 1 Timothy 1:3-7; 6:4, 5; 2 Timothy 2:14-16; Titus 3:9.
67 갈라디아서 1:13-15; 딤전 1:1-3-7; 6:4, 5; 2 딤후 2:14-16; 디도 3:9.
68 Romans 12:3, 9, 10, 16; Colossians 3:7, 12-17; 2 Timothy 2:23-26; Titus 1:9, 13; James 3:13-17; 1 Peter 4:8-11; 5:2-5.
68 로마서 12:3, 9, 10, 16; 골 3:7, 12-17, 2 딤후 2:23-26, 디도 1:9, 13; 야고보 3:13-17, 1 벧전 4:8-11, 5:2-5.
69 Ephesians 4:3; Galatians 5:13-21.
69 에베소서 4:3; 갈라디아 5:13-21.
70 Matthew 18:20.
70 마태 18: 20.
71 1 Corinthians 1:10-17, NRSV . Of the word “mind” (Greek nous) as used by Paul, the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Abridged Edition), page 637, states: “It first means ‘mind’ or ‘disposition’ in the sense of inner orientation or moral attitude.” Compare also Romans 15:5, 6.
71 고린도전서 1:10-17, NRSV. 바울이 사용한 "마음"(그리스어, 노우스)이란 단어는 <신약신학사전> 637면에서, "마음" 또는 "경향"은 내적 지향이나 도덕적인 태도라는 의미에서 우선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로마서 15:5, 6 비교.
72 Romans 14:1-6, 13-22.
72 롬 14:1-6, 13-22.
73 Colossians 3:14.
73 골 3:14
74 1 Corinthians 2:16; 1 Timothy 6:3-5; Titus 3:2-7.
74 고전 2:16; 딤전6:3-5; 디도 3:2-7.
75 Ephesians 4:15, 16; Colossians 2:17-19; Romans 12:5.
75 엡 4:15, 16; 골 2:17-19; 롬 12:5.
76 엡 2:19, 20, NRSV .
77 Compare Acts 15:32; 21:8-10;1 Corinthians 12:10, 28; Ephesians 4:11.
77 행 15:32; 21:8-10; 고전 12:10, 28; 엡 4:11 비교.
78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III, page 84, similarly comments: “In Eph. 2:20 the prophets form part of the ‘foundation’ of the church. This image suggests that the period in which the foundations of the church were laid is over, i.e. the prophetic office is a thing of the past. The apostles are here the NT counterpart of the OT prophets. Together they constitute the foundation, ‘Christ Jesus himself being the chief cornerstone.’” It may be noted that the term “prophet” in the original Greek (prophétes) basically means “a proclaimer, one making known messages from a divine source.” (This is discussed in detail in articles I prepared for Aid to Bible Understanding on the subjects “Prophecy” and “Prophet,” the same material being found in the revised edition called Insight on the Scriptures.) The proclamation may or may not involve prediction of future events and circumstances. (Compare Acts 15:30-32.) The apostles themselves, by their speech and writings, performed the essential function of a prophet, and the divine message they made known, thereafter recorded and preserved, forms an integral part of the foundation of our faith to this day. Whatever the messages made known by other Christian prophets, they were evidently not major in significance, for we have but two proclamations recorded, both by the same individual, Agabus.—Acts 11:27, 28; 21:10, 11.
78 <신약신학사전> 제3권 제84면도 이와 비슷한 논평을 내고 있다: "에베소 2: 20에서 예언자들은 교회의 '기초'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 이미지는 교회의 기초가 놓였던 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예언의 직무가 과거사가 되었다. 사도들은 여기 구약 예언자들과 짝을 이루는 신약의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다같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주춧돌'로 삼는 기초를 이룬다." 그리스어 원문(프로페테스)에서 '선포자, 신적 근원에서 알려진 메시지를 만드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내용은 내가 준비한 <성경 이해 보조서>에 '예언' 그리고 '예언자'라는 제목에서 자세히 논의되며, <성경 통찰>(Insight on the Scripts)이라는 개정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선언에는 미래의 사건 및 상황에 대한 예측이 포함될 수도 있고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 (행 15:30-32 비교) 사도들이 직접 말과 글을 통해 선지자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했고, 그들이 알려준 신성한 메시지는 그 후 기록되고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우리 신앙의 토대가 되는 필수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다른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에 의해 알려진 메시지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두 개의 예언의 기록이 있고, 둘 다 동일 인물인 아가보가 기록했기 때문이다.—11:27, 28, 21:10, 11.
79 See Chapters 4, 5 and 12.
79 4,5 그리고 12장 참조
80 Ephesians 4:11-16, NRSV.
81 Hebrews 5:12-14, NAB.
82 1 Corinthians 12:4-25; 1 Peter 4:10, 11.
83 Galatians 6:1, 2, NAB.
83 갈 6:1, 2,개정
84 Only One Way, The Message of Galatians, by John R. W. Stott, pages 158, 159. In Paul’s Idea of Community, page 147, Robert Banks correspondingly points out that in the apostle’s letters to the Ephesians, Philippians and Colossians, “Paul always addresses the whole community. Nowhere [in these letters] does he entrust special responsibilities to any single group vis-à-vis the remainder.” He adds: “Pastoral responsibility can never remain the preserve of a select few but always exists as an obligation upon every member of the community—even if some have a more advantageous position or a greater gift for it, and so can devote themselves more energetically to the task.” (Compare 1 Thessalonians 5:12-14 with 1 Corinthians 16:15-18; 15:58.)
84 존 R. W. 스토트저 <유일한 길, 갈라디안의 메시지> 158, 159면. 바울의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생각> 147면에서 로버트 뱅크스는 사도가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항상 공동체 전체에 대해 연설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편지의] 어느 곳에서도 그는 특별한 책임을 나머지 다른 그룹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는 이어 "목회적 책임은 선택된 소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어떤 사람들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거나 더 큰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항상 공동체의 모든 성원에게 존재하며, 따라서 그 일에 더 열심히 헌신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고린도 전서 16:15-18; 15; 15, 데살로니가 전서 5:12-14:58 과 비교하라.)
85 The English term “office” can, of course, refer to an assigned duty or task, but unfortunately the concept of organizational position and authority more readily comes to mind for most persons. While many translations contain the expression “office” at 1 Timothy 3:1 with reference to a man’s desiring to serve as an overseer, the apostle’s original writing does not contain a term equivalent to “office” but simply refers to “overseership” (episkope). Thus some translations contain renderings such as “If anyone sets his heart on being an overseer.” (NIV) That the apostle immediately follows this by saying, “He desires a noble task,” also shows that it was a work (Greek ergon) or service that was in view, not an ecclesiastical or organizational office or position. Compare 1 Corinthians 16:10, 12; Ephesians 4:12; 1 Thessalonians 5:13.
85 "직분"이라는 영어 용어는 물론 할당된 의무나 업무를 지칭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직적 지위와 권위의 개념이 더 쉽게 떠오른다. 많은 번역본들이 감독으로 일하고 싶어하는 남자의 욕망을 언급하며 디모데 전서 3:1의 "직분"이라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지만, 사도의 원래 글은 "직분"에 해당하는 용어를 포함하지 않고 단순히 "감독직" (에피스코프)을 가리킨다. 그래서 "누군가 감독하는 데 마음을 둔다면" (NIV) 사도가 "고귀한 일을 원한다"라고 즉시 이어서 말한 것은 또한 그것이 종교나 조직적인 직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시야에 있는 봉사(그리스어로 에르곤)였음을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6:10, 12, 에베소서 4:12, 데살로니가 전서 5:13을 비교하라.
86 1 Corinthians 12:5-11, 28, NEB.
86 고전 12:5-11, 28, 개정.
87 1 Corinthians 12:28.
87 고전 12:28.
88 Paul’s Idea of Community, pages 144, 145. [underling mine]
88 <공동체에 관한 바울의 생각> 144, 145면[밑줄은 레이가 그음]
89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Abridged edition), page 938;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I, page 193.
89 <신약성서 신학사전> (요약판), 938면; <신약성서 신학 신국제사전>, 제 1권, 193면
90 Exceptions are the occurrences at Titus 3:8, 14, where the sense is that of applying oneself, occupying oneself with, concentrating on something.
90 예외는 디도서 3:8, 14에 나오는 것으로, 열중하고, 몰두하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의미이다.
91 Paul’s Idea of Community, page 144 [underlining mine].
91 <공동체에 관한 바울의 생각> 144 면[밑줄은 레이가 그음]
92 The infinitive verb form, for example, is used at Luke 10:40 of Martha’s caring for household duties.
92 예를 들어, 동사의 부정사 형태는 누가 10:40에서 마르다가 가사를 돌보는 의무에 사용된다.
93 Matthew 20:25-28, NEB.
93 마태 20:25-28, NEB.
94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goes beyond this basic sense of service in its insistence that all baptized Witnesses are “ordained ministers.” It endeavors to equate them with denominational ministers who hold an office by virtue of ecclesiastical ordination. Contrast the articles in the Watchtower of December 1, 1975 and that of March 15, 1981, which latter article equates baptism with an “ordination ceremony.” See also Crisis of Conscience, pages 231, footnote 13, and pages 357-360.
94 워치타워 조직은 침례를 받은 증인들은 모두 '임명된 봉사자'라는 주장에서 이러한 기본적인 봉사 의식을 넘어선다. 그것은 교직자 임명에 의해 직분을 맡고 있는 교파 목사들과 그들을 동일시하려고 노력한다. 파수대 1975년 12월 1일자와 1981년 3월 15일의 기사들을 대조해 보자. 이 기사는 침례와 "임명식"을 동일시한다. 또한 <양심의 위기> 231면, 각주 13 및 357-360 면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