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정월대보름
이월 셋째 화요일은 임인년 정월 대보름이었다. 대보름날 잡곡밥을 먹고 달집을 태웠던 유년시절은 아득한 기억 저편에 남은 추억이 되었다. 어릴 적 정월 대보름날 아침이면 어머님은 묵나물무침에 아주까리 잎사귀를 쌈으로 싸 먹도록 준비하셨다. 잣이나 호두를 부름으로 깨물도록 했고 삭은 막걸리를 귀밝이술로 한 모금 마시도록 권했다. 과학보다 더 신비로운 경건한 의식이었다.
새벽녘 잠을 깨어 글을 몇 줄 남기고 잡곡으로 지은 밥과 묵나물로 아침을 들었다. 호두를 대신한 은행열매를 구운 부름으로 돌복숭 담금주로 귀밝이술을 한 잔 비웠다. 평소 즐겨드는 술이지만 이른 아침부터 마음 편히 잔을 비우기는 정월대보름이 유일한 날이지 싶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고향 큰형님에게 전화를 넣어봤다. 코로나라 덮쳐 더 그렇겠지만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어릴 적 봤던 대보름날 동네 풍경이 아슴푸레했다. 어른들은 고깔모자에 청홍의 띠를 어깨와 허리에 두르고 풍물놀이를 했다. 북과 징과 꽹과리와 장구였으니 당연히 사물놀이였다. 여기에 소구를 곁들인 조연들도 따랐다. 동네에서 신성한 곳인 동청과 공동 우물터를 시작해 집집마다 지신을 밟았다. 부엌이나 장독대는 물론 외양간 앞에도 지신을 밟고 멍석을 깔아 주안상을 받으셨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대보름이면 분주한 날이었다. 덩치가 큰 형들은 뒷산에 올라 소나무를 잘라 끌어왔다. 대나무도 잘라와 농가와 산으로부터 떨어진 개활지 논바닥에 달집을 지었다. 힘이 연약한 아이들은 불쏘시개가 되는 볏짚을 안아 날랐다. 겨우내 논둑을 내달리며 날렸던 방패연이나 가오리연들은 대나무 끝에다 매달았다. 저녁 어스름 보름달이 뜨는 순간 달집에 불을 붙였다.
달집이 활활 타면 환호성을 질렀다. 대나무는 불타면서 마디가 타지는 소리는 폭죽 소리로 들려왔다. 청솔 소나무 둥치는 오래도록 불에 타고 잉걸불이 잔불이 되어 가면 다리미에 콩을 볶아 먹기도 했다. 불에 타다 남은 소나무 둥치를 집 뒤란에 두면 부정을 타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어 숯검정이 묻으면서도 끌어다가 집으로 끌어다 놓은 기억이 남은 정월 대보름날 저녁 풍경이었다.
대보름이면 이런 달집 짓는 풍습이 도심에서나 근교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이제 사라졌다. 도계동 의창구청 청사를 짓는 자리는 지역 사회단체가 규모가 큰 달집을 지어 태웠더랬다. 달집을 태울 때면 소방차가 대기하는 정도였다. 북면이나 동읍으로 나가면 웬만한 마을에는 하루 전날에 달집을 지어 놓고 보름날 저녁에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이제 코로나와 함께 사라진 풍속이다.
보름날 아침나절 산책을 나서 동정동으로 나가 북면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지개리 입구에서 내려 대한과 고암을 지나 승산마을을 돌아가도 촌로들만 사는 동네라 인적을 볼 수 없었다. 정월대보름이라도 지신밟기나 달집을 짓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갈전마을 묵정밭에 자라는 쑥부쟁이의 일종인 부지깽이를 몇 줌 캤다. 가뭄에도 겨울 날씨가 춥지 않아 파릇한 잎맥을 유지했다.
겨울을 이겨낸 쑥부쟁이를 캐 배낭에 채운 뒤 두우실 지인 농장을 찾아갔다. 지인은 농장으로 출근해 귀밝이술로 새참을 들고 있었다. 잔을 채워 받으며 밀린 안부를 나눈 뒤 지인은 농막을 나와 남겨둔 포도나무 전지를 마무리 지었다. 나는 밭둑을 거닐며 겨울을 난 채소를 살펴봤다. 그간 겨울 가뭄이 심해 어제 지하수를 퍼 올려 물을 주어선지 시금치나 마늘이 생기를 띠고 있었다.
몇 그루 포도나무에서 가지치기를 마친 지인과 농막으로 드니 이웃 텃밭 농장주가 합류했다. 현역에서 은퇴해 전원생활을 누리는 이웃 농장주는 아침나절 강변으로 나가 파크골프를 치고 왔다고 했다. 준비되어 있던 삼겹살을 구워 맑은 술을 몇 잔 비우면서 세상 사는 얘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더 오래 머물지 못하고 농장을 빠져나와 갈전마을 앞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녹색버스를 탔다. 22.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