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고두현의 아침 시편』2024.02.091.
'‘나이를 먹는다’와 ‘나이가 든다’는 것'
어머니와 설날 / 김종해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설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김종해 시인은 밤새 자지 않고 식구들을 위해 떡을 빚으며 도마를 두드리는 ‘어머니의 나라’를 통해 설날 풍경을 되살려냈군요. 그 곁에서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오르는 아이의 꿈, 새해 아침 하늘 위로 날린 방패연, 그 연실을 팽팽하게 끌어올려 주는 ‘어머니의 햇살’이 정겹고 아름답습니다.
오늘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나이가 든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예부터 나이는 떡국으로 먹는다고 했던가요? “쪼끄만 게… 야, 너 떡국 몇 그릇 먹었어?” “여덟 그릇 먹었다. 왜? 어쩔래!”
어릴 적 아이들과 말싸움할 때 흔히 주고받던 소리죠. 저마다 떡국 먹은 햇수로 나이를 따지며 어른들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왜 나이를 ‘먹는다’고 말할까요? 세상에 ‘나서’ 살아온 햇수를 계산하는 방법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나이’의 단위 ‘살’은 ‘설’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옛날엔 ‘몇 살’을 ‘몇 설’이라고 했지요. 한 ‘설’을 지나야 한 ‘살’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이는 생일이 아니라 ‘설날’을 기준으로 셌죠. 설날 대표 음식인 ‘떡국’ 수가 곧 나이를 의미합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도 “아이들에게 나이를 물을 때 ‘너 지금껏 떡국 몇 그릇 먹었느냐?’고 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떡국을 ‘첨세병(添歲餠·나이를 더 먹는 떡)’이라고 했으니 그럴 만하죠.
나이의 어원은 ‘낳’이고, ‘낳’은 ‘낳다’의 어간입니다. 여기에 주격 조사 ‘-이’가 붙어 ‘나히’가 됐고, ‘ㅎ’이 탈락해 ‘나이’가 됐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스스로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할 때는 ‘내’가 주인이고, ‘나이가 든다’고 할 때는 ‘나이’가 주인이지요. 나이를 목적어로 삼느냐와 주어로 삼느냐에 따라 시간의 주체가 달라집니다.
‘나이가 든다’는 말은 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세월이 빨라진다는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 들면 시간이 빨리 흐르는 이유를 프랑스 철학자 폴 자네는 ‘시간 수축 효과’로 설명하더군요. 1년의 시간을 10세 아이는 생의 10분의 1로, 50세 어른은 50분의 1로 느끼기 때문에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 경험을 실제보다 최근 일로 기억하는 ‘망원경 효과’와 과거의 경험상 지표가 줄어드는 ‘회상 효과’, 노화와 함께 몸의 감각이 둔해지는 ‘생리 시계 효과’가 겹쳐진 결과라고 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현실의 시간과 기억 속의 시간이 달리 흐르지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양적인 시간을 ‘크로노스’라 하고, 질적인 시간을 ‘카이로스’라 구분한 것처럼 똑같은 시간도 느끼기에 따라 천양지차입니다.
나이를 ‘먹는’ 것과 ‘드는’ 것의 차이도 이와 비슷하지요. 하지만 자기 내면에 시간이 쌓인다는 점에서는 둘이 닮았습니다. 사람이 성숙해서 내면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연륜(年輪)이라고 하죠. 연륜은 식물의 나이테처럼 여러 해 동안 쌓은 시간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한 살씩 나이를 먹듯이 나무는 나이테를 한 겹씩 늘리지요.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화이트 산에 있는 ‘브리슬콘 파인’으로 5000살이 넘는다고 합니다. 성서에서 969세까지 산 노아의 할아버지 이름을 따 ‘므두셀라 나무’로도 불리지요.
이 나무는 척박한 고산에서 제한된 양분으로 살아갑니다. 나이테도 촘촘해서 100년에 3㎝정도 굵어질 정도로 더디 자라죠. 이렇게 오래 사는 나무는 어려운 환경에 순응하고 시련을 극복하면서 자랍니다. 나이 들어 속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봄마다 어김없이 새순을 밀어 올리지요.
나무가 세월의 흔적을 몸에 새기듯 사람도 살아온 흔적을 얼굴에 드러냅니다. 잘 살아온 사람의 표정은 여유롭고 온화합니다. 오래 쌓은 연륜과 삶에서 체득한 지혜 덕분이지요.
불멸의 업적을 남긴 사람 가운데 60대가 35%, 70대가 23%, 80대 6%로 60대 이상이 64%나 된다고 합니다. 루소의 말마따나 “청년기는 지혜를 연마하는 시기요, 노년기는 지혜를 실천하는 시기”죠.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일화도 이와 통합니다. 젊은 말은 빠르지만 늙은 말은 지름길을 압니다. 제나라 관중이 전쟁 통에 길을 잃었을 때 늙은 말을 풀어 길을 찾지 않았던가요. 결국 우리 삶의 최종 성적표는 나이에 따라 얼마나 내면이 성숙했는지, 어떤 나이테를 자기 몸에 새겼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살짝 걱정도 됩니다. 이번 설에도 떡국을 또 한 그릇 먹는데, 아직 철이 덜 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축적한 경륜이나 지혜가 많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죠.
이젠 설날 떡국을 생각 없이 그냥 먹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릴 때처럼 “너 떡국 몇 그릇 먹었냐”고 함부로 말해도 안 되겠습니다. 그동안 나이를 어디로 먹었느냐고, 얼마나 단단해졌느냐고, 얼마나 잘 익었느냐고 제 몸의 나이테에 먼저 물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