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아구즈는 멋지게 진열된 폰 하나를 두 칸 전진 시켰단다. 다음은 에르의 차례였지. 하지만 그저 멍한 시선으로 체스판을 바라볼 뿐이었어. 베리아구즈는 그런 에르를 향해 입을 열었단다.
# 방문자 No. 14 [아주 긴이야기] #
"전말이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곧잘 쓸모없는 인간이란 소리를 듣곤했어요. 집에는 아프신 어머니와 억척스런 누나와 어린 동생이 셋이나 있어요. 하지만 많이 가난해서 하루 세끼 끼니를 챙겨먹는 것도 힘든 날이 많아요. 그래서 제가 돈을 벌어서 집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죠. 자요, 첫 수는 이 정도가 좋을 거에요."
에르의 손을 끌어다 잡은 베리아구즈는 흰색 폰 하나를 두 칸 전진 시켰단다. 전부다 가지런한 체스판 위에서 정 가운데 각각 검고 하얀 두 말이 마주보고 있는 모양이 되었지.
"그런데 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보다시피 이렇게 비쩍 마른 몸으로는 힘도 쓰지 못하거든요. 언젠가 한번은 누나의 소개로 장작패기를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일은 보기만 할 때는 꽤 쉬워보였어요. 이렇게 도끼를 들어서 그대로 내리치기만 하면 곧장 장작이 패졌으니까요."
도끼를 들고 내리찍는 시늉을 하며 베리아구즈는 말을 이었단다.
"그런데 엄청 무겁더라구요, 도끼란게. 드는 것도 힘들었고, 정확하게 내리치는 것도 그 무게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어요. 게다가 엉뚱한데 박힌 도끼를 다시 드는 것도 너무 힘들었구요. 결국 그 곳에서 세 시간만에 쫓겨나고 말았죠. 헤헤."
베리아구즈는 나이트를 아까 움직였던 폰 근처로 옮겼단다.
"말을 돌본 적도 있어요. 말을 씻기고 갈기를 빗어주고 여물과 물을 주는 정도의 일이었어요. 이것도 그 곳에서 처음에 일을 설명해줄 때는 꽤나 쉽다고 생각했어요. 고작 이정도쯤이야, 라고요. 하지만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말이 얼마나 큰지 아세요?"
질문을 던지고 한참동안 에르가 답을 하길 베리아구즈는 침착하게 기다렸단다. 창 밖으로 바람이 나무들의 잎사귀를 여러번 흔들었고, 새들이 창을 콕콕 쪼다가 날아가고, 또 다시 창을 콕콕 쪼다가 날아가길 여러번 반복했단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베리아구즈는 조용히 에르를 응시한 채 기다려줬지. 에르의 답을 말이야.
"안다구요?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죠? 말이 얼마나 큰데요. 정말 집채만해요."
아주 조금 에르의 고개가 끄덕였단다. 베리아구즈는 신이나서 마구 팔을 휘두르며 말이 얼마나 큰지 얘기했지.
"그런데, 그 말한테 뻥하고 걷어차였어요. 여기요, 여기. 아직도 시퍼런 멍이 말굽모양으로 남아있다니까요."
엉덩이를 가리키며 베리아구즈가 요란스레 떠들었단다. 얘기는 계속되었어.
"그래서 며칠을 끙끙 앓았어요. 당연히 일하던 곳에서는 쫓겨났구요. 그 밖에도 얼마나 많은데요. 이래뵈도 안해본 게 없을 정도라구요. 하지만, 하지만...결국 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만 깨달았어요. 이런 절 가족들도 한심하게 여겼어요. 배가 고파서 부엌에 들어가 뒤적거리면 몸이 아프신 어머니가 대신 식사를 준비해주시기도 해요. 예전에 냄비하나를 홀랑 태워 버린 적이 있거든요. 제가 무언가를 하면 다들 불안해해요. 뭔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망쳐버리지는 않을까하고요."
하지만 얘기가 계속될수록 베리아구즈는 점차 침울해져 갔단다.
"모두 다 절보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니까, 어느 날부턴가는 저도 제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할 생각도 안했어요. 그저 체스만 뒀어요. 이건 정해진 대로 말을 옮기기만 하면 되니까 조금도 어렵지 않았거든요. 만약 진다고 해도 혼나거나 욕을 먹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덕택에 이곳에서 로벨리아님과 에르님을 만나게 됐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두 분은 절 필요로 해주시니까요. 이곳에서만큼은 저도 쓸모있는 인간일 수 있어요. 그래서 두분께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베리아구즈는 에르의 굳어버린 얼굴을 바라봤단다.
"에르님 차례에요. 이건 내기 체스라구요.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는 지고 만다구요. 에르님께서 이기시면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한 가지 들어드릴께요. 하지만 제가 이기면 반대로 제 소원 한가지를 들어주셔야 해요. 그러니까 제 소원을 들어주는 게 귀찮다면 어떻게해서든 절 이기셔야 해요."
에르의 멍한 시선에 빛이 돌아온 것 같다고 베리아구즈는 생각했단다. 과연,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라 에르는 손을 움직여 체스말을 움직였단다. 베리아구즈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열심히 에르에게 응수해줬지.
"후우, 체크메이트."
베리아구즈는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승리를 외쳤단다. 에르 역시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며 편하게 의자에 기대었지. 두 사람 모두 생각보다 고전을 했던 탓이었어. 하지만 결국 베리아구즈가 이겼단다.
"에르님."
에르는 베리아구즈의 해맑게 웃는 얼굴을 쳐다보았단다. 방금전 자신의 과거를 읊조리며 침울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아니 지금껏 그 어떤 고민도 해본적 없다는 듯한 얼굴을 보며 에르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것을 느꼈단다.
"제가 이겼으니 소원 하나를 들어주시는 거에요."
에르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단다.
"제 소원은 에르님이 방밖으로 나오시는 거에요."
하지만 베리아구즈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르의 얼굴은 순식간에 칙칙하게 변하고야 말았단다. 아직 로벨리아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저는 에르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어째서 이 곳에 몇일 씩이나 혼자 계셨던 건지도 몰라요. 하지만, 에르님. 지금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에르님이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왜 웃는 얼굴을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건지하고요. 로벨리아님 마저도 덩달아 어두운 모습으로 다니니 이 넓은 저택이 꼭 죽어 있는 것 같다구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어. 에르는 그렇게 고집스레 생각하고 있었단다. 마냥 슬프기만 했고, 마냥 아프기만 했기 때문에 도망치고 싶었던거지.
"에르님은 모르시는거군요."
무엇을? 이란 의미를 담은 눈길로 에르는 베리아구즈의 얼굴을 쳐다보았단다.
"이 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에르님을 좋아하는지요."
아, 하고 에르는 소리없는 탄성을 질렀단다. 에르의 가슴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지. 좋아한다, 걱정한다, 이런 건 사실 에르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지만 결코 가질 수는 없는 것들이었거든.
"그래서 모두 걱정하고 있어요. 에르님과 내기체스를 두고 반드시 이기라고 절 떠밀정도로요."
헤헤, 하고 웃으며 베리아구즈가 뒷머리를 슬슬 긁었단다.
에르는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라서, 가슴이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차버려서 그만 뚝, 하고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단다. 베리아구즈는 처음에는 놀라 벙찐 눈으로 뚝뚝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는 에르의 정수리를 바라봐야 했지. 뭔가 잘못말한 건가 싶어서 두근 하고 가슴도 울렸어. 하지만 곧 에르의 결좋은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고 가볍게 흔들어줬단다.
첫댓글 거봐 거봐 내가 베리아구즈가 짱이랫잖아 아싸 좋구나 베리아구즈 계속 그렇게 가는거야...긴 한데 보통 소설 보면 베리아구즈 같은 애는 죽던데....악! 안되 싫어 안되 절대 안되
아아...이제 에르도 복수할 마음이 생긴 건가...
역시 다시 에르는 웃는모양이군요.베리아구즈도 뭔가 해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