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세계적인 아트페어나 미술 견본시장은 너무 치열한 경쟁의 공간이다. 유수의 갤러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판매한다. 규모 자체가 너무 크다 보니 테마별로 작품을 보거나, 집약된 관람 경험을 얻기란 어렵다.
여기에 반해 호텔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는 動線(동선)도 그리 길지 않고, 한정된 갤러리들이 급부상하는 신인작가들을 주로 선정해 소개한다. 때문에 시장 전반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에 호흡이 부치지 않는다.
김동유, <마릴린 먼로 vs.존 F.케네디> |
호텔 아트페어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앞에서 언급한 브리지 아트페어를 비롯해 마이애미 스코프나 마이애미 아트 바젤과 함께 열리는 아쿠아 아트페어(Aqua Art Fair)는 호텔 룸을 대여해 시작한 실험적인 프로젝트였으나, 이제는 세계적 아트페어로 성장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드라이브 인 모텔이나 작은 호텔을 빌려 전시회를 진행하는 일은 새로운 일이 아닐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7년째 원활하게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일본의 아트 오사카(Art Osaka)와 타이완의 영 타이페이(Young Taipei)도 호텔을 이용한 아트페어로 성장했다. 호텔이 현대미술을 전시하기 위한 아웃렛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술과 관람객 사이의 접점의 다변화, 미술시장의 트랜스포머(변압기) 현상은 지금까지 한정된 고객층을 상대하던 기존 미술시장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컬렉터 층을 개발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특히 호텔 아트페어의 경우, 관람객에게 집과 같은 공간의 편안함과 친밀감을 함께 선사함으로써 미술품 관람의 새로운 경험 방식을 제공한다. 문화공간으로 변모한 호텔의 면모들을 살펴보는 것도 즐거운 관람 포인트가 될 것 같다.
김창열, <재현>(Recurrence) |
호텔 아트페어의 매력
아늑한 실내공간에서 펼쳐지는 미술작품 전시라고 해서 회화작품만 전시하는 것은 아니다. 조각과 미디어 설치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의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호텔 아트페어는 미술작품을 향유하고 이를 구매하는 컬렉터와 작품 판매를 위해 호텔이란 공간을 대여한 판매자 모두에게 매력적이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갤러리들은 고객들에게 ‘미술품을 사서 집에 가져가 직접 걸어본 후 마음에 들면 산다’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미술품 컬렉팅을 시작할 때 갤러리 내부의 인테리어나 판매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기술에 소비자가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런 서비스는 필수적이다.
컬렉터와 예비 소비자들에겐 침대와 콘솔(작은 장식용 탁자), 소파와 책상들이 놓인 호텔 룸은 실제 집의 분위기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호텔 아트페어는 그림을 구입해 자기집 벽에 걸어놓을 경우에 대한 일종의 시뮬레이션이 되는 셈이다. 미술품 구매는 결국 자신의 집에 작품을 걸 때 완성되는 것이므로, 호텔이라는 전시공간에 걸린 미술품에 호감을 느낀 관람자는 구매욕구가 높아지기 쉽다. 이는 미술품 판매자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다.
박서보, <서체 No.6-06 ED.12>(Ecriture No.6-06 ED.12) |
한국에서도 호텔 아트페어가 열린다. 오는 8월 21~23일, 서울 남산의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리는 ‘제2회 아시아 톱 갤러리 호텔 아트페어(AHAF)’가 그것이다.
작년 제1회 아트페어는 일본 도쿄의 뉴오타니호텔에서 열려 호평을 받았다. ‘요시아키 이노우에 화랑’은 호텔 침대 위에 누워있는 실물인형 설치 작업으로, 한국의 가람갤러리는 화장대 위에 배열한 작은 인형들과 동화 소품들로 눈길을 끌었다.
이번 아트페어에서는 한국·일본·중국·타이완·홍콩 등의 주요 화랑 65곳이 모여 아시아 미술시장의 활성화를 목표로 다양한 현대미술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80여 개 객실이 전시공간으로 사용되며, 개별 룸마다 갤러리의 특성을 담아 독특한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했다. 아시아의 젊은 작가들을 육성 및 홍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는 데는 아시아아트네트위원회의 노고가 컸다. 이 위원회에는 판화사진 전문 아트페어인 SIPA를 기획해 미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황달성 금산갤러리 대표, 일본의 저명한 독립 큐레이터인 가토 요시오 등이 참여하고 있다.
2008년 상반기부터 나타난 세계미술시장의 큰 흐름 가운데 하나가 아시아 현대미술 시장의 대두다. ‘SEBETO’(서울·베이징·도쿄)라 불리는 韓中日(한·중·일) 미술시장의 통합화 현상이 견고해지면서 3개국 인기작가들의 그림 값은 상승일로에 있다. 이번 아트페어는 아시아 미술시장의 부상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유나얼, <영혼 음식>(Soul Food) |
눈길을 끄는 특별전
서양화를 전공한 인디음악 가수 겸 작곡가 유나얼은 이번 아트페어에 ‘천국의 이미지’를 테마로 한 판화 및 드로잉 작품들을 선보인다. 유나얼은 전시 기간 내내 호텔 전시공간에 상주하면서 호텔을 자신의 작업 공간으로 변신시킬 예정이다.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여러 권의 사진집을 낸 바 있는 탤런트 조민기는 자신의 호텔 투숙 경험을 사진에 담은
‘그림 읽어주는 여자’ 혹은 ‘그림 자키’로 널리 알려진 화가 한젬마의 특별전 <한젬마의 방>도 눈길을 끈다. 1995년부터 일관성 있게 못으로 표현한 사람의 형상을 통해, 관계로 묶인 사회의 단면을 사유해 온 그녀는 이번에는 카펫과 쿠션, 실내등과 같은 일상소품과 하나를 이룬 인형작업을 선보인다. 미술과 일상이 이음매 없이 연결된 세상임을 다시 확인시켜 줄 듯하다.
이번 AHAF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李禹煥(이우환)의 특별전이 아닐까 싶다. 1956년 서울대 미대를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일본은 물론 파리비엔날레와 카셀 도큐멘타와 같은 국제전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했다.
이번 특별전은 30년 넘게 컬렉터이자 그의 친구로서 그의 그림을 소장해 온 시모다 겐지의 협력으로 성사됐다. 이우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초기작과 과도기적 작품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보석 같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특히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콜라주와 조각, 수채화 작품을 비롯해 <조응>
J.오피(佛), <여학생> |
주목할 만한 작가들
아시아 미술의 한 축을 이루는 일본작가들의 작품도 관심의 대상이다. 인형을 통해 정신적 성장의 풍경화를 그리는 일본작가 히로시 고바야시의 <비상구>와 <청색연>.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푸른 빛깔의 테디베어는 유년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현실의 고단한 삶을 감내할 수 있는 희망을 안겨준다.
오카야마 신야의 도 눈길을 끈다. 그의 그림 속에는 그림책에 나올 것 같은 비현실의 세계, 동물과 인간의 동등한 세계가 있다.
한국 작가의 작품 중에는 홍콩 크리스티 아시아 컨템포러리 경매에서 스타로 떠오른 김동유의 <마릴린 먼로 vs. 존 F 케네디>가 눈에 띈다. 마릴린 먼로와 같은 스타의 이미지를 확대해 그리면서 망점 하나하나로 구성한 그의 작품은 많은 컬렉터의 관심을 끌어왔다.
중진 그룹에서는 박서보의 <書體>(서체) 시리즈와 김창열의 <물방울> 신작도 선보인다. 사진의 치유적 기능을 실험해 온 포토그래퍼 이종록의
호텔이라는 숙소가 문화공간으로 확장되는 만큼 私的(사적) 친밀감을 키워줄 미술소품들도 많이 출품된다. 호텔의 변모와 미술시장의 변화 노력이 함께 만들어 낸 이번 호텔 아트페어는 미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