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예절상식(3)
서얼(庶孼)의 차별
서자(庶子)는 정부인의 소생이 아닌 첩의 소생을 말한다.
서자는 양반의 자식이라도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미의 신분을 따라 가게 됩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양반이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천민이면 서자도 천민이 됩니다. 서자와 얼자의 구분은 서자는 어머니가 양첩으로, 어머니의 신분이 중인, 양반인 첩의 아들을 말하며, 신분은 어머니를 따라 가나, 어머니가 양반가의 자식이라도 문과에 응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얼자(孽子)는 어머니가 천첩일 때입니다. 즉, 어머니가 노비, 기생 등의 천민 이었을 때는 같은 서자라도 '얼자'라고 불렀으며, 아버지가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법적 신분은 종모법에 따라 천민이 된다. 홍길동의 경우 어머니가 노비였으므로 당연히 신분도 얼자이다.
서얼을 대접하는 것은 가문에 따라 다르겠지만, 조선은 법제적으로 일부일처제의 국가로서 첩의 신분은 보장되지 않았으며, 첩의 소생 또한 정처의 자식과는 차별을 두었는데, 이런 차별은 일반 양반가뿐만 아니라 왕가와 종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특히, 주로 중인이하의 계급인 서얼계급은 양반과 같은 모양의 갓을 쓸 수 없었고, 중인계급이 사용하는 갓을 썼으며 갓끈으로 사용되는 재료도 제한되었다.
서얼은 과거시험 응시에도 제한을 두어, 문과응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무과와 잡과에는 응시 가능하나, 승진에 제한이 있어 6품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율곡은 서얼 허통을 주장했지만,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서얼허통, 즉 서얼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이후에는 서얼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이도 현실적으로 서자에게는 가능하나, 고관인 당상관으로 승진은 어려웠고, 어머니가 천민인 얼자에겐 제한이 많았다.
혼인 또한 제한이 많아, 양반과는 혼인이 거의 불가 했다. 특히 조선은 신분제에 민감하여 양반출신의 여자가 노비계급의 남자와 혼인하는 것을 국법으로 다스렸으므로, 서얼계급은 보통 중인계급의 여자들과 혼인하였고, 서얼 딸들의 경우는 더욱 심하여, 첩으로 시집가던가, 어머니를 이어 기생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법제적 일부일처제 국가였기 때문에 서얼은 기본적으로 있으되 없는 것과 같은 존재였다. 첩은 법적으로는 부인이 아니므로 첩의 소생은 성씨는 이어주되, 불필요한 존재들이었다.
특히나 얼자들은 신분상으로도 크게 차이가 있어 호부호형은 불가했습니다. 그래서 홍길동은 호형호제를 못했으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다. 당연히 부친과 정실부인, 정실부인의 자식들에 대해서도 상전으로서 대접해야 했다. 정실부인이 자식이 없을 때조차도 다른 친척의 적자를 양자로 들이거나 씨받이를 받아들이는 한이 있어도, 서얼은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없었다.
☞ 庶(여러 서) 孼(서자 얼)
서얼제도는 중국에도 없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좋지 않던 폐습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도 서자라면 사람들이 무시하고 하대하였던 기억이 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사회가 철폐 된지 오래되었건만 1950년대, 60년대까지도 양반, 쌍놈을 따지었으니 한 번 생긴 불합리한 제도나 인습은 실로 고치기가 어렵다. 오늘날에도 첩이라면 말 자체에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뜻이 있다. 하기는 선진국을 지향하는 지금에도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고 꺼리며 심지어 놀리는 일이 비일 비재하다. 현대인들은 옛날 제도나 풍습은 무조건 불평등하고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이라 비판하지만 앞으로 50년, 100년 후의 사람들은 우리의 시대를 매우 불합리한 비인권적인 사회였다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서얼이라 하여 차별하는 제도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우리가 역사를 인식할 때는 모든 것을 현재의 기준으로만 해석하고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그런 제도나 문화가 만들어진 배경과 당위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두 가지 관점이서 역사를 보아야 할 것이다.
서자는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차별을 받았던 것이다. 얼마 전 ‘정도전(鄭道傳)’ 드라마가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극이지만 요즈음의 사극은 너무 황당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정도가 심하여 나는 사극을 시청하지 않는데 ‘정도전’은 상당히 사실에 입각하여 만들었고 우리에게 역사에 대한 진지한 의미를 생각하게 하였다. 이 드라마에서 이방원(훗날 태종)이 정치적 스승이요 동지였던 정도전을 죽인 것은 세자를 정하는데 정도전이 방원을 지지하지 않고 방석을 세자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석은 첫째부인 한씨의 동복형제가 아니고 둘째부인 강비의 소생이었기에 욕심이 활화산 갔던 방원은 왕권에 대한 욕심으로 정도전을 죽이고 세자 방석을 죽이는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그래서 방원이 왕이 되고서 둘째 부인의 소생은 적자가 되지 못하고 서자로 하여 적통을 이어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더구나 조선의 모든 국가 통치 이념은 철저한 유교주의로 하였다. 유교 예법에는 예무이적(禮無二嫡)이라 하여 부인을 두 명 이상 둘 수 없는 일부일처만을 인정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원칙은 일부일처를 시행하였는데 고려 말 몽고의 간섭과 몽고의 풍습의 영향을 받아 나라의 제도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권문세가들은 많은 부인을 거느리는 병첩(幷妾) 즉 축첩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여러 부인을 거느리니 그 자손이 많아지고 그 자식에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려 하니 토지가 모자라 국가 재정이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권신들도 많은 자식에게 토지를 상속하려니 양민의 토지를 불법으로 침탈하여 백성들은 피폐해 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고려는 망하고 새로운 조선이 건국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고려의 적페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태종 때에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을 만들어 첩의 자식에게는 같은 아버지 자식이라 하여도 상속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의 문과 응시를 제한하여 서자를 차별하였던 것이다.
서얼 차별을 없애자는 주장도 많이 나왔지만 양반의 수는 늘어나는데 관직의 수는 일정하니까 양반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서얼 차별은 조선 오백년 계속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얼 차별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지 못 하는 등 국가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과 갈등을 가져왔다.
첫댓글 지난 과거지만 사람 차별이 심한 사회는 발전의 동력이 소진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지식을 넓혀주신 좋은 글 감사
조선 말기에는 양반이 전 인구의 80%에 달했다니 산업화가 늦을 수 밖에..... 감사
너무 재미있습니다 쉽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재미있게 풀어 주시니 넘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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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猶不及", 조선조 지나친 반상제도, 예의 범절 숭상,등 儒家사상이 사회적 폐단은 물론, 국가의 발전을 더디게 한 요인이었음은 더 말할 여지가 없지요, 감사
성경에서도 아브라함의 첩 하갈의 자식이 쫓겨나는 (유대민족)게 있어요, 본처의 원대로 하라고 하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감사,
신분의 시대가 가고 실력의 시대가 왔습니다.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