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조선의 북진정책을 평가할적에 북진이 원할히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물리적인 원정을 위한 군사력만으로 해결할 사항이 아닌 편입지역의 행정력 유지를 위한 일정규모 인구유입이 필수불가결합니다.
그런문제로 인해서 윤관의 원정도 그렇고 간도문제도 그렇고 두만강 이북을 우리영토로 확실히 하지 못한 이유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의문점이 있는데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과거 고구려나 발해시절 살았던 사람들이 고구려 발해멸망후 도대체 어디로 대대적으로 이동해서 이 지역이 여진족만이 남게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깁니다.
가령 윤관의 여진정벌시에 선춘령 공험진등에 만일 발해유민들이 대거 거주했다고 한다면 이들을 포섭해서 고려국민으로 고려영토로 만들 방법을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조선 세종때 4군 6진개척시에도 마찬가지로 그 북쪽 간도지역에도 만일 발해유민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다면 그들을 포섭해서 우리영토로 만들 생각을 했을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시기에 이미 과거 고구려나 발해유민들의 대다수는 어디로 갔는지 여진족만 남은 상태에서 이 땅을 우리영토로 만들기에 필수적인 인구유입에 어려움을 겪다보니 결국 북진에 제한사항으로 남을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발해시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다는 것인지? 그냥 국가가 망해도 고토에 그대로 남았다라고 보기에는 그 증거가 희박합니다.
제 추측은 이렇습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현재 남북한 영토에 해당되는 지역이 아닌 중국영토로 된 지역에 거주했던 고구려나 발해주민의 절대적 인구수에 대해서 분석하자면 중원으로 통하는 요령성지역을 제외하고는 길림성지역의 경우 인구밀도가 현재 남북한 영토에 해당되는 지역보다 인구밀도가 적었을것이 분명합니다.
고구려시대의 예를 든다면 인구밀집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서부지역, 황해도, 요령성 서부 중원으로 통하는 주요간선축이었을것이 확실하고 그 나머지 함경도지역, 부여의 고토인 길림성및 간도지역은 인구밀도가 적었을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삼국의 인구밀도를 비교한다면 고구려가 제일 인구밀도가 작았을것으로 보여집니다.
거기다가 고구려의 인구밀집지인 평양~요동반도~중원으로 가는 길목의 간선축지역에 거주민들은 고구려가 망한후 태반은 신라로 가던지 당으로 들어가던지 하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고 이 지역이 나중에 발해가 점령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점령을 했다손치더라도 이미 그 이전에 거주민들구성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기에 8세기경에는 이미 인구밀집지상태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발해는 고구려보다는 인구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을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다음에 발해멸망후에 여진족들이 고토에 그대로 남았다 치더라도 고구려계라고 하는 지배층들의 이동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고려로 귀순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냥 고토에 남아서 나중에 금국 건설에 협조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발해국민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때문에 북간도지역은 발해멸망후 저인구밀도지역으로 남았을 것으로 봅니다.
제가 생각하건데 전체 인구수는 발해보다 신라가 월등히 많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고구려 사람들중에서는 현재 남북한영역(고려건국후를 기준해서)으로 흡수된 인구가 태반에 이를것으로 보여져서 인구나 주민상으로만 보자면 태반의 고구려영역의 흡수는 대체적으로 완수를 했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고구려도 남부권역 지금의 남북한 영토내에 들어가는 권역에 인구가 밀집되어서 그렇죠.
고구려멸망후 신라영역으로 들어온 고구려인들의 비중부터 만만치 않았고 고려건국후 후삼국통일까지 합하고 강동6주를 획득하여 압록강 국경을 달성한 시기까지 해서 이미 고구려인들의 흡수통합은 태반은 달성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니 영토상 북진을 하려고 하는 지역은 인구밀도가 적은 곳이라는 결론이 되어 점령하더라도 새로히 인구유입을 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