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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월난양(淨月暖陽)
삼국연의 덕분에, "와룡, 봉추중 한명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방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명성을 천추에 남긴 제갈량과 나란히 이름을 떨칠 정도인데, 일찌감치 죽어버려서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와룡, 봉추가 모두 있었더라면, 유비는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을까?
소설에서 방통은 서천(西川)을 취하는 전투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곳은 "낙봉파(落鳳坡)"이다. 유비의 백마 "적로(的盧)"를 탔는데, 적로는 예로부터 "극주(克主)"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상황은 명장 방연(龐涓)과 극히 유사하다. 이렇게 많은 신기한 점들이 있으므로 방통의 죽음은 "천명으로 정해진 것(天命注定)"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 과연 그러했을까? 사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같다. 방통은 도대체 누구의 손에 죽은 것일까? 이것도 삼국의 수수께끼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誌)>의 기록에 따르면, 방통은 낙성(雒城)을 공격하다가 죽었고, 사인은 유시(流矢)에 맞은 것이다. 이는 삼국연의에서 묘사한 것과 대체로 같다. 단지 소설에서처럼 신기한 세부사항들은 묘사하고 있지 않다. 비교적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점은 방통은 문관(文官)으로 군사장군(軍師將軍)이고, 원래 적의 화살 사정거리밖인 후방에서 유비의 곁에서 함께 지휘하고 있어야 하는데, 왜 화살이 도달할 수 있는 제1선으로까지 나가 있었던 것일까? 알아야 할 점은 옛날에 화살을 쏘았을 때 도달하는 가장 먼 거리는 예측이 가능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일전지지(一箭之地)"이다. 낙성에 무슨 특별한 첨단기술은 없었다. 그렇다면 화살이 어떻게 유비군중의 '2인자'에게까지 도달했던 것일까? 고대의 전투에서 지휘자는 뒤에서 지휘한다. 워험한 장소에 서 있지 않는다. 유비가 정말 방통을 아꼈다면, 어찌 그가 전선으로 나가도록 놔두었을까? 이것이 가장 큰 의문점이다. 혹시 방통의 죽음에 많은 의문점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의문점에 대하여는 근원을 따져보아야 한다. 그럼 방통이 죽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유비가 유장(劉璋)에 대하여 안면을 바꾸고 이빨을 드러내 그의 영토를 빼앗고자 했을 때, 초기의 진격은 매우 순조로웠다. 부성(涪城)을 탈취한 후, 장병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크게 축하연을 연다. 기분이 좋은 나머지 유비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오늘 정말 기쁘구나!" 그러자 방통이 옆에서 유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다른 사람의 영토를 정벌하는 것을 즐거워하다니 그것은 인자(仁者)의 병(兵)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소매를 떨치고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유비와 나머지 장수들은 흥이 깨졌고, 연회는 좋지 않은 기분으로 끝난다.
유비는 왜 화가 났을까? 계속하여 서천을 취해야한다고 주장해온 자가 바로 방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비가 이미 손에 넣은 형주를 포기하라고까지 말하면서 반드시 사천을 차지하라고 했었다. 그리하여 유비는 제갈량을 형주에 남겨두고, 아직 아무런 공적도 세운 적이 없는 방통을 데리고 사천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때 유비에게 "인의(仁義)"하지 않다고 욕한단 말인가? 이 말은 거의 저주의 말이다. 어질지 않은 자가 어찌 천하를 다투겠는가? 유비가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로 쌓아온 것이 "인의"였다. 서주에서 도겸을 구하는 것부터, 형주에서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 차라리 처와 자식을 위험에 빠지게 놔두면서까지도. 이는 유비에 있어서 크게 체면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사람이 바로 방통이다. 그는 어쨌든 유비의 핵심층이고, 유비는 그를 박대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방통의 이번 소동은 모든 장수들에게 밉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전투가 인의의 전투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조주위학(助紂爲虐)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군대도 더 이상 '정의지사(正義之師)'가 아니라는 것이다.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다음 날 유비는 그래도 방통을 찾는다. 그에게 어제 저녁의 일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지를 묻는다. 방통은 이렇게 대답한다. 군신 모두 잘못한 것이라고.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보며 웃었다. 마치 서로 풀어버린 것같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유비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정말 이렇게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마도 이는 그가 방통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도록 준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방통은 단지 "모두 잘못했다" "너도 나를 해쳤으니, 그냥 웃고 넘기자"고 한 것이다. 유비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냉소였을까? 아니면 양해였을까?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보라.
<삼국지>에 기록된 방통을 보면, 정말 어디에 제갈량같은 재능이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 그리고 성격도 괴이하고, 듯은 크지만 재능은 부족하며, 명예를 추구하는데 열심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혐오할 수준이다. 방통이 도대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보자:
한나라때는 관직을 뽑을 때 찰거제(察擧制)를 시행했다. 만일 독서인이 조정에 들어가 관료가 되려면, 반드시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가장 좋은 것은 명성이 날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명사의 추천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명성을 얻기 위하여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당연히 조조이다. 월단평(月旦評)에서 1위를 차지하고, "세지효웅(世之梟雄)"이라는 평가를 받고 기뻐해 마지 않았다.
방통도 마찬가지이다. 형양(荊襄)의 명사들중에서는 사마휘(司馬徽)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방통은 그의 평어를 듣기 위해 먼 길을 걸어 사마휘의 집에 이른다. 그가 도착했을 때, 사마휘는 마침 뽕나무에서 뽕잎을 따고 있었다. 방통은 즉시 그를 조롱한다. 사마휘가 부인이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휘를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막고 변론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상하론(桑下論)"이다. 그후에 "통당남주사지관면(統南州士之冠冕)"이라는 평어를 받는다. 그리고 사마휘는 방통을 '동생(弟)'으로 칭했다.
이는 분명히 방통이 스스로 자아선전한 내용이다. 사마휘가 유비에게 와룡봉추를 추천했다는 것도 더더욱 역사에 근거가 없다. 사마휘가 방통이 그런 말을 하고 다니도록 놔둔 것은 사마휘의 성격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호호선생'이라는 말은 그에게서 처음 나왔다. 후배와 그런 것을 가지고 따질 사람이 아니고, 더더구나 소인과 그런 일을 다툴 사람이 아니다.
유비가 형주를 얻은 후, 널리 관료를 모집했다. 방통도 참가한다. 면접을 본 후에 겨우 현령직을 얻는다. 그리고 연도실적평가에서 형편없는 평가를 받는다. 꼴찌로 쫓겨난다. 재능이 없으면 쫓겨나는 것이 당연하다.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큰 인재를 작은 곳에 썼다는 것인데, 그건 그냥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파면된 후, 방통은 노숙과 제갈량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다시 유비에게 부탁하여 중용된다. 부군사의 직을 얻는다. 이는 노숙과 제갈량의 체면을 봐줘서 내린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방통이 과연 큰 인재라면, 노숙이 왜 그를 동오에 추천해주지 않고, 잠재적인 적수에게 추천해주었겠는가. 노숙이 멍청해서일까, 아니면 손권에 대한 충성심이 없어서일까. 확실히 둘 다 아니다.
부군사가 된 후, 유비에게 마구잡이로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유비에게 형주를 버리고 익주를 취하라고 극력 주장했다. 유비는 반평생을 이곳저곳 떠돌아다녔고, 이제 겨우 형주를 얻었는데, 어떻게 형주를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바보가 아니다. 형주와 익주를 모두 가지면 되는 것을 왜 굳이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한단 말인가? 그리고 익주를 취하는 것은 융중대에서 이미 정해진 방침이다. 방통은 그저 자신의 의견을 참신하게 보이기 위해서 광언을 하는 것이다. 큰 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 그를 무시하면 그만이다. 유비가 어찌 형주를 버릴 수 있겠는가? 오히려 유비는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등 심복을 남겨서 지키게 하고, 방통, 황충, 위연등을 데리고 새로운 투자처인 익주를 치러 나선다.
위진교체기에, 독서인들 사이에 광방불기(狂放不羈)가 유행했다. 그리하여 많은 "광사(狂士)"가 등장한다. 자신의 약간의 명성을 내세워서 사대부들을 멸시했다. 좋게 말하면 위진풍류(魏晋風流)이고, 좀 나쁘게 말하면 그저 유행을 따라 마구잡이로 욕설을 해대는 욕쟁이이다. 북을 치며 조조를 욕한 예형(祢衡)이 바로 그 비조이다. 그리고 방통은 더욱 심하게 했다. 이런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는 않는다. 전설에 따르면, 방통은 생긴 것도 추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실 그의 이런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방통은 집안배경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비와 여러 장수들에게 미움을 사는 짓을 한 후에 전투의 혼란한 상황속에서 방통의 배후에서 화살을 한 발 쏘았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정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