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 만세!” 1919년 3월1일, 민중들의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일듯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거리마다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흰옷과 태극기가 나부꼈다. 3.1 운동은 지도자 몇몇이 아닌 거리의 민중들에 의해 활활 타오른 풀뿌리 운동이자, 폭력 없이 당당하게 주권국가로서 권리를 요구했던 저항운동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당시 일제와 같은 압제자는 없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자 문화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일상을 누리는 2024년. 우리에게 3.1 운동의 저항정신은 그저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과거의 흔적으로 여겨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되새겨보자. 우리는 왜 스스로를 ‘프로테스탄트’(저항하는 자)로 정의하는가. 일제 강점기와 같이 눈에 띄는 거악(巨惡)은 찾아보기 힘들지 모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하고 악한 세상의 문화가 교묘하게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그렇기에 크리스천은 여전히 저항해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시류를 거스르며 저항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해 보자 역사학자 200명에게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80%가 3.1운동이라고 대답했다. 좀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지만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큰 사건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3.1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다. 이 운동 결과 일본이 망한 것도 아니고, 조선이 독립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성공했다. 임시정부가 생겨나는 원동력이 되었고, 비폭력운동으로서 세계에 우리의 존재를 증명했으며,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나면서 백성들의 참여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라와 민족에 대한 개념이 변하면서 민주주의 토대를 마련했다, 왕을 위한 궐기가 아니라 민족 자결주의 영향 속에서 민족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그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3.1운동과 기독교를 생각해 보자 이 운동은 실제적으로 기독교가 주도한 운동이었다. 33인 중, 16명이 목사였고, 태화관에서 불교도인 한용훈의 만세 삼창을 끝으로 33인 모두 연행되었지만,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은 경신학교 출신의 정재용이었다. 전국에서 이 운동이 일어날 때, 집결지는 교회나 기독교학교였고, 앞장 선 사람들도 기독교학교 교사거나 기독교학교 학생들이었다. 교회 안수집사 이상 직분자 50%가 옥고를 치르거나 죽었고, 약 28,000명의 교인들도 옥고를 치르거나 죽었다. 기독교가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선교사들을 통해 교인들에게 설교로 전해졌고, 총회, 노회, 시찰회, 당회라는 기독교 특유의 조직을 통해 전국으로 일시에 확산될 수 있었고, 각종 유인물을 교회 안에서 등사로 찍어 대량으로 살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주장한다. 3.1운동은 기독교가 아니었으면 일어날 수 없는 운동이었다.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당시 기독교인은 인구의 1.5%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거대한 운동을 주도했다. 그런데 오늘 기독교 인구는 20%에 육박 한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력은 그때와 비교해 보면 빈약하다. 슬픈 현상이다. 물론 당시는 독립운동이었으니 당연히 참여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 점을 감안해도 당시와 비교하면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3.1운동 105주년이다. 당시의 과제는 독립이었지만 오늘의 과제는 통일이다. 통일을 이루어야 완전한 광복이요 3.1 운동도 결실을 맺는 것이 된다.
국민이 주인이 되고, 아니 하나님이 주인이 된 나라, 국민에게 참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통일이어야 한다. 그런 날이 우리에게 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고서 누가 통일을 이루게 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반듯이 복음으로 통일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우리는 준비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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