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공원
강 문 석
달성공원을 처음 접한 건 1970년대 초반이었다. 차도에서는 약간 경사가 졌지만 산을 끼지 않고 시내 한복판에 들어선 거대한 공원은 단박에 탐방자의 마음을 빼앗았다. 공원에 혹해서 당장 그 인근에 살아보고 싶은 욕심까지 들 정도였다. 그 당시까진 대도시라고해도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공원은 드물었다. 그런데다 그때까지 체험한 서울 사직공원이나 삼청공원 부산의 대신공원 그리고 당시 살고 있던 동네의 부산어린이대공원까지 모두 산에 붙어 있었다.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와 대구 처가친척 어른들에게 인사를 갔었다. 그런데 동물원 우리 앞에 군데군데 눈이 수북하게 쌓인 공원을 찾아갈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 때문에 달성공원은 지금까지도 신혼여행 마지막 코스쯤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초로의 인텔리였던 처숙모는 약국을 운영하는 딸 내외까지 불러 직접 우리를 환대해 주셨다. 그때 공원에는 신장 2.25미터인 키다리 아저씨가 근무하고 있었고 그는 마흔 중반인데도 공원을 찾는 어린 꼬마들과 친하게 지내 인기가 있었다.
첫 발을 디딘 후 반세기 세월을 지나며 서너 차례 더 공원을 찾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없었다. 공원엔 희귀 수목들이 많고 넓은 잔디광장까지 있어 휴식을 위해 찾는 시민들이 많았던 것 정도가 기억의 전부다. 대구는 분지로 이루어진 도시라 더위가 심한데도 바다나 도심을 가로지르는 큰 강이 없으니 시민들은 피서지로 공원을 찾는 듯했다. 입구 안내판엔 딱 한 곳 매점이 들어있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대도시처럼 카페나 찻집은 고사하고 그 흔한 자판기 하나도 없었다.
공원 안에 이러한 상점이나 자판기들이 만들어낼 쓰레기를 생각하면 잘하는 일 같았다. 선거 때면 대구 사람들의 정치성향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러한 성향은 짜서 맞춘 듯 나와는 잘 맞다. 일당독재인 고구려처럼 백퍼센트 가까운 몰표를 보이는 백제 사람들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신라 사람들 중에서 대구는 놀라울 정도로 백제에 맞선다. 달성이란 이름은 대구의 옛 지명인 달구벌이나 달불성이 여기서 나왔을 정도로 대구의 본류라 할 수 있다. 달성은 원래 토성으로 삼한시대엔 달불성이었다.
그러다가 1596년 상주에서 경상감영이 이곳으로 이전해 왔고 경상감영은 얼마 안 되어 현재의 경상감영공원이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일제 때는 대구신사가 이곳에 있었다. 1963년 달성은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고 1969년 공원으로 탈바꿈하여 1970년 동물원까지 개장했다. 동물원은 어린이들을 불러들이는 일등공신이지만 현재 이전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공원자리는 본래 달성 서씨의 세거지였다. 세종대왕 때 서씨 문중에서 토지를 국가에 헌납하였다.
세종이 이를 포상하려 했지만 ‘서침’은 포상 대신 국가에서 서민의 환곡을 탕감해줄 것을 건의하여 대구의 상환모곡은 1석당 5승씩 감면케 되어 조선말까지 그 특례가 존속되었다. 대구 부민은 이와 같은 '서침'을 숭모하여 1665년 대구 구암서원에 봉향하였다. 세종이 회화나무를 심어 서침의 마음을 기리게 하였으므로 ‘서침나무’라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나무가 지닌 내력을 알게 되니 장구한 세월 비바람 이기고 튼실하게 자란 수목에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동란 끝난 후 고향 김천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처음 대구를 알게 되었다. 대구에서 발행하는 매일신문에 동시와 산문을 실었고 웅변을 한답시고 또 대구를 자주 들락거렸다. 그래서 소년 시절 서울보다 더 동경하게 된 도시가 대구였다. 하지만 꿈은 빗나갔고 타향으로 떠돈 지 60여년, 온갖 세파에 시달리느라 그동안 대구를 잊고 살았다. 잘 가꾼 명품수목원을 방불케 하는 달성공원 나무들을 사진으로나마 이곳 <산지기나라> 카페에 포스팅하는 것도 대구와의 인연을 밝히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