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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 안에 이미 살인의지가 들어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살인이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는 것까지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은 세상의 법에 의하여 살인하지 아니하였다고 할지라도 이미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기에 그런 미움들이 모여서 참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공범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29세인데 어떻게 내가 예수를 살해 했느냐고 회복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유대인 청년이 말합니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너희는 신이라고 하니 너희가 이단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을 시인해야 하기에 극구 반대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셔야 예수님을 살해한 죄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죄를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우리 안에 간음이 가득하게 들어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정상적인 결혼을 하고 바람을 피운 적이 없기에 간음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27-28절입니다.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31-32절을 봅니다.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의 배경을 봅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간음하지 말라고 하니 간음을 하면 안 되는 줄둀은 지만 간음하고 싶은 마음이 이 율법을 보니 더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율법을 지키면서도 간음을 할지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것은 합법적으로 이혼하여 아내를 내 보내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모세가 아내를 버리려면 이혼증서를 주라고 한 신명기24:1-2절입니다. “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수치 되는 일이 간음은 아닙니다. 간음이라면 죽이는 것이기에 간음이 아닌 여러 가지 수치 되는 일을 근거로 아내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만 써 주면 이혼이 성사된다고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마태복음 19:3-9절을 봅니다. “봉독”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합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답변을 합니다. 그러자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느냐고 합니다. 모세가 그런 법을 준 것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내어 쫓기 위하여 온갖 구박을 다하느니 차라리 이혼증서라도 주어서 그 여인이 재혼이라고 할 수 있게 하라는 약자 보호차원에서 허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행한 이유 외에는 아내를 버리고 장가드는 것은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10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질문한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제자들이 하는 말이 그렇다면 한번 결혼하고 간음한 이유 외에 이혼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 나름대로 유리하게 해석하여 간음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 여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 당시에 여자가 이혼을 요구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해도 된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주어진 것인데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간음하고 싶은 욕망을 채워온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답변도 간음하면 이혼사유가 됩니다. 그러면 이 간음이 단지 부부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문제입니다. 예레미야 3:1절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행음하였으나 내게로 돌아오라” 음행이든 아니든 버림을 받은 여인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면 이미 더러워졌기에 본 남편이 받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여인을 다시 받아들이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율법이 신명기 24:3-4절입니다.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 하게 하지 말지니라” 이혼 증서를 주고 난 이후에 그 여자를 다시 본 남편이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땅이 더러워진다는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잘 알고 있는데 율법과 어긋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면 땅이 더러워지는데 그래도 돌아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이 율법을 어기는 형식이 됩니다. 그러나 어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원래의 취지를 드러내십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지 율법을 통하여 보여주시면서 간음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하여 내시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버린 아내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 남편이 다시 받는다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버린 적도 없는데 스스로 바람이 나서 남편 되시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온갖 음행을 다한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받아들이는 것은 약속의 땅이 더럽혀지는 것을 감수하고 돌아오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3:2-5절입니다. “봉독”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남 유다도 온갖 곳에 우상이 가득하였습니다. 우상이란 자기를 위한 신이 우상입니다. 그러니 나중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도 온갖 우상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갖 음란과 행악으로 땅을 더럽혔습니다. 그 결과로 기근이 왔습니다. 그러자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부르짖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 노여움을 한 없이 계속하시겠느냐고 하면서도 그 마음은 악을 행하여 그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회개조차 악하다는 말입니다.
계속하여 6-10절입니다. “봉독” 북 이스라엘이 행음을 하였습니다. 온갖 우상숭배를 하였기에 남편 되시는 하나님을 배반하여 간음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혼증서를 주어 내 보냈습니다. 그것이 앗수르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남 유다가 회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이 땅을 더럽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이 남 유다보다 의롭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향하여 부르시는 모습을 봅니다.
북 이스라엘이든 남 유다이든 다 간음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다 버리셔야 마땅합니다.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보내고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아야 그 땅이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받아 주시겠다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런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호세아서에서 나타납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향하여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합니다. 이 당시의 음란한 여인이라면 이방신전의 창기입니다. 그런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식의 이름들을 짓게 하시는데 이스라엘을 흩어버리시겠다는 이스르엘과 긍휼을 입지 못하리라는 로루하마와 내 백성이 아니라는 로암미의 이름을 짓게 합니다. 전부 저주의 이름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호세아2:14-20절입니다. “봉독” 다시 남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다시는 내 바알이라고 하지 않고 내 남편이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알의 이름을 기억도 하지 못하게 하신답니다. 그리고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들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네가 여호와를 알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아 31장에서 새 언약으로 증거 합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어지는 새 언약은 돌 판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자기 피로 이루어내신 새 언약입니다.
요한복음 8:1-11절입니다. “봉독”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질문합니다. 율법 전문가들이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물은 이유는 예수님을 고발한 조건을 얻고자 그렇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나온 그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시며 또한 복음을 증거 하십니다. 모세 율법의 의하면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십니다.
무슨 글씨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7절의 말씀을 땅에 쓰신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쓰셔도 그것을 보지도 않고 거저 예수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면 그것으로 고발하려고 벼루고 있습니다. 용서하라고 하면 모세 율법을 어긴 자가 되기에 고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냥 율법의 말씀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면 자신이 간음하지 않았기에 돌로 쳐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지 간음하지 아니하였다는 그 알량한 의로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돌로 치려고 하는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은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간음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누가 여 이인을 향하여 돌을 던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치라는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다 나가고 나갔습니다.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여자가 정죄를 받지 아니하면 율법은 어떻게 됩니까? 그 율법의 정죄를 죄 없으신 예수님이 대신 담당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할 권세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이 여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지 않습니까? 나는 현장에서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시겠습니까? 나는 마음으로도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시겠습니까?
야고보서 4:4절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며 간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초마다 간음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간음하는 자들을 예수님은 자기 피로 정결하고 거룩한 신부로 만들어내십니다. 이스라엘이 남편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굽을 의지하면 그 나라들조차 망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이 세상을 멸망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신부된 교회라면 간음을 회개하고 신랑 되신 예수님만을 소망하도록 신랑이 만드시고야 맙니다.
첫댓글 신윤식목사는 너희는 무조건틀리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시고, 이장우목사는 오랫동안 열심히 공부한 것을 대학교수식으로 강의하여 설명은 잘 하시나 여운이 남는 것이 없고, 김성수목사는 머리가 좋아 깊이 들어갔으나 오랫동안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라 여운이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여운이란 말을 띄어놓고 설명을 안하는 부분)
김성수 목사도 사랑의 진리를 깨달으려고 했으나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 여운이 주로 사랑의 진리쪽입니다.
신목사 김목사 이목사 또는 니고님의 글을 듣고 읽고 동감하고 이해한다고
진리를 아는건 아닙니다
이 시대 최고의 목사 분별사 우리의 니고데모!
니고데모 외에는 진리를 아는자 없음
@관찰자 우리가 안다고 하면 그분은 널 모른다 할겁니다
@얼토당토 님과 관찰자님이나 서머나주의가 가장 싫어하는 신사도 은사자를 내가 계시를 받아서 맞추었는데 기도응답도 아니고 갑자기계시가 주어졌으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요. 또는 순교하는 성도는 누구 책임일까요? 나는 그 계시를 통해 간구하는자에게 베푸는 사랑의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의 존재라는 기초진리를 깨달은지 4년만에 구체적인 진리를 깨달은 겁니다. 모두 계시로 깨달은 것입니다. 제 것이 아니죠. 저는 전달자일뿐입니다.
@찬송가복음(니고데모) 계시든 개시든 말씀을 쬐금만 알면 신사도니 무당이니 알지 않을까요?
전달자면 그냥 전달만 하면 할일은 다한거죠
나 전달하는 전달자다! 라고는 광고 하는것도 우습지 않나합니다
@얼토당토 사람들이 질투심으로 말을 알아듣지 않으니까 그런겁니다 말만 알아들으면 됩니다 사랑의 진리와 착한행실만 알면 되죠
@찬송가복음(니고데모) 귀를 열어주는건 님이 할일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일이죠
아시는 분이 왜그러십니까?
@얼토당토 이장우목사가 나한테 한 말이군요. 그럼 목사들은 왜 전하죠. 그분이 하시는 일인데.
이목사에게 답한 말은 다르게 했습니다
@찬송가복음(니고데모) 그리고 님도 내가 답답한가봅니다. 좀 더 진지해지는 것 보니.
그러나 관찰자님은 내 증인이고 동역 비슷하게 했었기도 나를 잘 아는 것이고 님은 본적이 없으니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지식도 대부분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님은 더 말할 필요도 없죠
그러니 님은 보이는 것만 믿어도 됩니다 사실만 보면됩니다 자꾸 생각하면 진리에서 멀어진뿐입니다
@찬송가복음(니고데모) ㅎ 내식구나 친구들 그리고 직장동료들 다들 나를 보면 답답해 할겁니다 어느 누구를 보면 부러운 사람도 안그런 사람들도 왜 저렇게 살까? 나같으면 안그럴텐데 하지않나요?
@얼토당토 반대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죠. 얻어갈것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자기들 말을 듣기를 좋아하지 제말을 듣기는 싫어합니다
@찬송가복음(니고데모) ㅎ 네 제가 노래선물 드릴께요
https://youtu.be/DLOth-BuC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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