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커피보다는 분위기 있게 앉아 커피 향을 음미하며 즐긴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날도 일을 다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음악을 듣고 있는데, 남편이 생뚱맞게 바짝 내 옆에 와 앉아서 왜 발톱을 깎느냐구요. 그것도 신문지도 깔지 않은 채 딱! 딱! 발톱을 깎는 소리. 발톱은 거실 사방으로 파편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발톱이나 부드럽나, 두꺼운 도끼 발톱이다. 운 나쁘게 밟히거나 찔리면 대형 사고다. 그날도 그렇게 남편은 분위기 없이 내 음악 감상 시간을 종료시키고 말았다. 언젠가는 함박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며 “아! 멋있다 저 눈 맞으며 걷고 싶어.” 하면 이 양반 “오늘 찻길 많이 막히겠구먼. 당신 길 조심해, 미끄러지면 수습 곤란이야.” 어느 비 오는 날엔 내가 “난 비 오는 날이 좋더라, 비 오는 날 둘이서 우산을 쓰고 걸어도 좋고, 그냥 비를 맞으며 걸어도 좋고.” 하니까 “무슨 소리야! 요즘은 산성비라 그 비 맞으면 머리 다 빠져.” 라고 한다. 우리 집 양반, 내 남편은 이렇게 감성과는 담쌓은 멋없는 사람이다. 좌우지간에 낭만엔 죽을 쑨다.
남편은 먹는 걸 좋아해서 지금도 음식 만드는 것은 재미있어하지만 우리가 젊었을 시절엔 요란했었다. 휴일이면 자기가 일품요리를 만들어 맛의 천국을 느끼게 해준다고 하면서 냉면이나 스테이크를 만드노라면 부엌에서부터 재료를 이 방 저 방까지 늘어놓아 어수선하고 집안이 정신이 없었다. 자연히 치울 게 많아지니 식모 아줌마는 질색을 했다. 그러나 냉면 만드는 솜씨 하나만은 좋아 어느 음식점 못지않게 맛있게 잘한다. 우리 애들이 냉면이 먹고 싶으면 아빠한테 냉면 해달라고 졸라댔을 정도다. 어렸을 때 아들이 친구들에게 아빠 냉면 솜씨를 자랑해서 ‘너희 집 냉면집 하니?’ 하는 소리도 들었었단다. 우리 집 양반과 내가 유일하게 의견일치를 보는 것은 딱 3가지, ‘식도락’과 ‘영화감상’ 그리고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첫 번째, 식도락이다. 구전이나 방송을 통해서 ‘소문난 맛있는 집’ 이라거나 ‘별미로 이름난 집’ 이 있다 하면 그 전해준 사람에게 자세히 묻든가 또 방송국에 전화해서라도 그 지역과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한 다음 갈만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먹어보고 오는 것을 재미있어한다. 꼭 먹기 위해서라기보다 먹으러 가는 길에 안 가본 곳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쐴 겸해서 즐겁게 다녀온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영화감상이다. 영화는 가급적이면 극장에 가서 본다.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집에서는 아무리 화면이 큰 TV라도 음향과 그 느낌이 벌써 다르다. 그래서 극장엘 자주 가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올 때면 거의 모두가 젊은 사람들뿐이고 나이 든 사람은 우리뿐인 것 같아 가끔 쑥스러울 때도 있다. 그래서 남편에게 한마디, “여보! 극장에 올 때는 당신 대머리 가려주는 뚜껑(모자)은 꼭 쓰고 오도록 합시다. 예?” “그러지 뭐, 내 머리가 너무 빛이 나나? 하하”
세 번째, 여행하기다. 여행은 국내여행이건 외국여행이건 간에 자주 즐긴다. 한 가지 남편이 웃기는 것이 있는데 예를 든다면 유럽에 있는 ‘다뉴브 강’과 워싱턴의 ‘포토맥 강’을 가끔 뒤바꾸어 놓는다든지, 뉴질랜드의 ‘밀포드 사운드’를 어느새 스위스로 이사시켜 놓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비슷비슷한 것은 많이 헷갈려 하면서도 어떤 때는 또 자기가 옳다고 똥고집을 부린다. 그래서 실랑이를 하며 얼마나 웃는지. 우리가 이러면서 산다. 어찌합니까, 같이 늙어가는 것을.
이제는 자기가 마신 커피 잔이나 물 먹은 컵 설거지통 속에 넣어 달라 소리도 안 한다. 이미 포기했다. 분위기도 모르고 고집불통 우리 남편, 간 큰 남자다. 이렇게 분위기를 모르는 남자지만 그저 지금처럼 늘 건강했으면 좋겠다. 어쨌든 이렇게 건강하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먹을 수 있으며 사지 멀쩡하여 어디든 갈 수 있고,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런 건강을 주신 저 높은 곳에 계신 분께 한없이 감사할 뿐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사는 날까지 서로를 생각하며 더욱더 성실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