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Eucharistic Ad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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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Eucharistic Adoration?
강연 : 성체 조배의 힘
- 로버트 배런 주교 Bishop Robert Barron
친구 여러분, 제가 한 가지 권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가톨릭이든 아니든—성체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 작은 빨간 불빛은 항상 켜져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많은 영적 거장들—풀턴 쉰, 에디트 슈타인, 마더 데레사, 요한 바오로 2세 등—은 종종 성체 주님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수만 명의 인파를 보니 정말 기쁩니다. 이것은 이번 성체 부흥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지표입니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정점을 찍게 될 이 운동을 훌륭하게 이끌어 주신 커즌스 주교님과 펠턴 주교님, 그리고 이 행사를 후원해 주신 두 위대한 교회 지도자분께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저 또한 미네소타 출신으로서 이런 초대를 받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성체성사에 관해 많은 글을 쓰고 강연을 해왔습니다. 성체성사의 식사적 측면, 희생 제사, 실재적 현존, 그리고 미사에 관해 이야기했지요. 하지만 오늘 저녁은 특별히 성체 조배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체 조배에 대한 오해와 풀턴 쉰 대주교의 유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신학생이었던 시절이나 젊은 사제였을 때는 성체 조배가 일종의 소외를 받기도 했습니다. 너무 개인주의적이거나 신심 위주이고 전례적이지 않으며, 미사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뜨린다는 식의 비판이 있었죠. 하지만 그런 주장들은 모두 어리석은 것입니다. 당시 우리는 성체 조배를 하지 않도록 은연중에 권고받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유일하고 위대한 예언자는 바로 풀턴 쉰 대주교님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 세대는 라디오와 TV를 통해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으며 자랐습니다. 종교인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던 저희 아버님조차 쉰 대주교님에 대해서는 "그분이 하시는 말씀과 말씀하시는 방식이 참 마음에 든다"고 하셨을 정도였죠. 아시다시피 쉰 대주교님은 사제들에게 하시는 모든 강연의 끝을 항상 복된 성체 앞에서 거룩한 시간, 즉 성시간을 가질 것을 권고하며 마무리하셨습니다.
쉰 대주교님의 영향력은 인터넷이 없던 제 세대에는 잠시 잊히는 듯했지만, 제가 먼델라인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제자들을 통해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생들은 EWTN 방송을 통해 그분의 옛 강론을 접하며 성체 앞에서 거룩한 시간을 보내라는 권고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제자들의 그 모습을 보며 겸손하게 다시 배웠고, 성체 조배가 얼마나 엄청난 영적 힘을 주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 성체 부흥 운동에서 우리가 쉰 대주교님의 이 권고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약 2주 전, 저는 세인트 폴 신학교에서 피정을 지도했습니다. 그곳의 한 교수님이 쉬는 시간에 저에게 알려주셨지요. 제가 강연하던 그 신학교 경당이 바로 젊은 시절의 풀턴 쉰이 기도하며 성시간의 훈련을 쌓았던 바로 그 장소라고 말입니다. 저는 신학생들에게 이 위대한 인물의 영성을 절대 잊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위대한 불꽃
그렇다면 성체 조배란 무엇일까요? 저의 영적 스승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체 축성 말씀이 발해지는 순간, 마치 새로운 장소에 거대한 불꽃이 지펴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세상에 여러 명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위대한 불꽃이 여러 곳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 로체스터의 새 집으로 이사했을 때, 집안은 온통 짐 상자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대와 감실을 경당에 설치하자마자 바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때 성체를 감실에 모시며 그곳에 불꽃을 지폈고, 그 불꽃은 지금까지 계속 타오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저는 그 타오르는 현존 앞에서 성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불꽃의 이미지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불은 어두운 세상에서 빛입니다.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길을 잃기 쉽지만,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불은 또한 따뜻함입니다. 특히 오늘날 세속화된 세상,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차가운 세상 속에서 성체는 우리를 따뜻하게 합니다.
또한 불은 보호입니다. 야영을 할 때 불은 맹수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줍니다. 영적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적,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 주는 것은 바로 이 불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이 불 가까이에 머무르십시오.
샌프란시스코의 한 신부님이 전해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교가 전혀 없던 중년 여성이 의미를 찾아 헤매다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신부님은 교리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당에 가서 작은 빨간 램프를 찾으세요. 그리고 그 불빛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매일 15분씩 일주일 동안만 머물다 오세요." 일주일 뒤 그녀가 돌아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 빨간 불빛이 대체 뭐죠?"라고 물었을 때, 신부님은 다시 "걱정 말고 이번엔 매일 30분씩 앉아 있으세요"라고 했습니다. 다시 일주일 뒤 그녀가 돌아와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작은 불빛 앞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너무나 평화로워집니다." 신부님은 그제야 그 불빛의 비밀을 알려주었습니다. 교리를 가르치기 전에 그녀를 먼저 불꽃으로, 빛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또한 불은 추위 속의 온기입니다. 오늘날 세속화된 세상, 특히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목적과 의미가 없는 차가운 곳입니다. 성체는 이 차가운 세상 속의 따뜻함입니다. 나아가 깊은 숲속에서 불꽃이 포식자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듯, 성체는 보이지 않는 영적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그러니 여러분, 언제나 이 불꽃 곁에 가까이 머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실재로 현존하시는 그 불꽃 곁에 머무십시오.
성시간의 본질: 바라봄과 기다림
풀턴 쉰 대주교님은 성체 조배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나를 보십니다." 성무일도를 바치거나 성경을 읽고 청원 기도를 하는 것도 좋지만, 본질적으로는 두 친구가 억지로 말을 지어낼 필요 없이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체 주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쉰 대주교님은 또 다른 비유를 드셨습니다. 성시간을 보내는 것은 주인의 발치에 앉아 있는 충직한 개와 같습니다. 주님이 당장 어떤 과업을 주시지 않더라도, 그저 그 자리에 대기하며 주님이 부르실 때 즉각 응답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방사선 치료와 같습니다. 비록 내 마음이 방황하고 걱정에 휩싸여 있더라도, 그 찬란한 현존의 빛 속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은 변화됩니다. 그냥 그 불꽃 곁에 머무르십시오.
성체 조배를 사랑했던 영적 거장들
수많은 성인의 공통점은 바로 성체 주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현대의 위대한 지성인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은 성체 앞에서 바치는 아름다운 기도문들을 남겼습니다. 철학자였던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무신론에서 가톨릭으로 회심한 후 매일 몇 시간씩 성체 조배를 했습니다. 그녀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끌려가 순교의 운명을 마주할 때 그 힘을 주었던 것은 바로 성체 앞에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마리탱은 파리 사크레 쾨르 대성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성체 조배를 하곤 했습니다. 그 성당은 19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성체 조배가 이어지는 곳이죠. 콜카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 역시 매일 성체 앞에서 보낸 그 시간이 세상을 바꾸는 봉사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사회 정의의 수호자였던 도로시 데이는 미사 중에 커피 컵을 성배로 쓴 젊은 사제가 떠난 뒤, 그 컵을 깨뜨려 땅에 묻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담았던 그릇을 다시는 세속적인 용도로 쓸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지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역시 성체 조배의 거장이었습니다. 제가 함께 살았던 시카고의 조지 추기경님 댁에 계시던 수녀님은 과거 폴란드에서 카롤 보이티와 대주교님의 모습을 기억하셨습니다. 성당에서 대주교님이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제대 앞 바닥에 온몸을 대고 엎드려 성체 조배를 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분의 위대한 힘은 바로 이 불꽃 곁에 머무는 데서 나왔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통찰과 보상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모든 아이디어를 생각보다는 기도에서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종종 감실에 머리를 기대고 영감을 청하곤 했습니다. 저는 작년 로마 시노드 기간 중 나폴리에 있는 산 도메니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토마스가 생애 마지막 무렵 성체성사에 관한 위대한 저술을 했던 장소입니다. 토마스는 자신의 글이 성체의 신비에 비해 부족하다고 느껴 십자가 아래에 원고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십자가 속 예수님께서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보상으로 무엇을 원하느냐?"
토마스는 대답했습니다. "Non nisi Te, Domine."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이 대답은 저의 주교 문장이기도 합니다. 성체 조배를 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바로 이래야 합니다.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부나 권력, 명예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원합니다.
'입을 열어 찬양하세'와 말씀의 힘
오늘 밤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은 위대한 찬미가 '입을 열어 찬양하세(Pange Lingua)'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 가사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가사는 "노래하여라, 내 혀야, 영광스러운 몸의 신비를"로 시작합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지성이었던 토마스조차 자신의 언어로는 이 신비를 다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노래'를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의 빈약한 언어를 넘어선 말 너머의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성체와 성모 마리아의 관계를 언급하며, 그리스도가 동정 마리아에게서 그 혈육을 취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스스로를 파스카 양으로 내어주셨음을 노래합니다. 빵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해 당신의 몸이 되는 신비, 즉 '성변화'를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실재를 창조합니다. "빛이 생겨라" 하셨을 때 빛이 생겼듯,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기에 그 실체는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후에 "이것은 더 이상 빵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듯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원천이자 정점인 성체께로 돌아갑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성유를 공경하지만 성유 앞에 엎드려 절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은총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체는 다릅니다. 성체는 단순히 은총의 전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그 자체(Ipse Christus)'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성체 부흥 운동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이 강력한 성사의 중심성을 다시 깨닫기 위함입니다. 가톨릭 신자의 약 30퍼센트만이 성체의 실재적 현존을 믿는다는 통계가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성체의 힘을 다시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셨듯, 우리도 이 성체 안에서 우리 삶의 원천이자 정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불꽃 안에서 우리는 방향을 찾고, 온기를 얻으며, 보호를 받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저녁 이 거룩한 시간을 통해 여러분 모두가 이 위대한 불꽃 곁에 더 가까이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