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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5월 5일 부활 제5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요한. 15,1-8)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remains in me
and I in him will bear much fruit,
because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말씀의 초대
바오로(사울)의 회심을 사도들은 모르고 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며 교회에 필요한 사람임을 역설한다. 이후 바오로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는 유다인들과 논쟁하며 예수님을 증언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없애려 든다(제1독서). 말로만 사랑을 외치지 말고 행동으로 드러내라고 하신다. 그래야만 진리에 속한 사람이 된다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자비로 대해 주시고 그의 허물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신다. 수많은 포도송이가 달려 있는 나무다. 하지만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 머물지 않으면 영적 에너지를 체험할 수 없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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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맺지만, 떨어져 나간 가지는 말라 버린다.’ 포도나무의 비유의 핵심은 이 말씀에 있습니다. 어떤 삶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인지요?
사는 것이 불안하기에 ‘신비스러운 힘’을 찾습니다. 굿을 하고 부적을 지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시도하려 애씁니다.
조상의 묘를 탓하는 이도 있습니다. 터가 좋으면 복이 오고, 터가 나쁘면 화가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멀쩡한 묘를 옮기기도 합니다. 이 땅에 사는 자체가 좋은 터와 나쁜 터를 함께 밟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하는 행동입니다. 사람의 앞날은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평범한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불안을 극복하는 첫걸음입니다.
모든 나무는 뿌리에서 오는 ‘생명의 물’을 받아야 자랍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은총’을 받아야 건강한 삶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요행에 매달리면 불안은 곁에 있기 마련입니다. 잘려 나간 가지는 ‘뿌리의 힘’을 흡수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 기쁨보다 구속으로 느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원인은 포도나무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사노라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많습니다. 옛 어른들은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최선을 다할 뿐 그 결과는 하늘이 이루어 주시길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일을 할 때 커다란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수고.땀.아픔으로 맺는 열매
-배광하신부-
◎포도나무
이른 봄부터 피정의 집 뜰 안에 있는 포도나무의 가지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지를 쳐 주어야 새순에서 열매가 맺기 때문입니다. 가지치기 전에는 묵은 나무껍질을 벗겨 줍니다. 하얀 포도나무의 속살이 꽃샘추위에 안쓰럽지만 더 예쁜 싹과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아픔을 참아야 하는 고통도 따르는 법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먹는 모든 농산물이 그렇듯이 포도 역시 우리 입에 들어가기까지는 결코 녹록치 않은 수고와 땀과 아픔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먼저 껍질의 벗기움입니다. 이는 자신의 모든 속내를 겸손되이 드러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감추임이 없는 진실된 삶을 살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의 삶이 오늘의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은 포도나무에서 배울 것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입니다.
깨끗이 껍질을 벗겨낸 포도나무에 이번엔 거름을 줍니다. 거름은 모두 짐승의 배설물입니다. 냄새가 코를 찔러도 참아야 합니다. 때로는 그 냄새를 고향의 향취라고, 시골다운 맛이라고 위안해 보기도 합니다. 열매는 그 더러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감히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남들이 더럽다는 것을 만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기의 똥오줌이 묻은 기저귀를 손으로 만져 갈아 끼울 수 있어야 하고, 설거지가 끝난 뒤, 더럽게 느끼는 오물을 집어 쓰레기통에 넣을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변기가 막혔을 때, 그 역겨운 냄새와 더러움을 참고 뚫을 수 있어야 어른인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거름의 더러움을 귀한 양분으로 바꾸어 포도 열매에 공급합니다.
이제 포도나무는 가지치기의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필요 없는 곁가지들을 너무 많이 달고 살았습니다. 그것을 잘라내면 당장은 불편함과 아픔이 따르겠지만, 충실한 미래의 열매를 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작은 불편함과 수고로움, 아픔을 참지 못하고 곁가지를 그냥 두었을 경우 열매가 실하게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맺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포도나무는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을 온 몸으로 견디며 가지와 열매를 지킵니다. 포도나무의 일생은 모든 것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삶을 너무도 닮았습니다.
◎열매 맺는 가지
진정 포도 열매가 우리 입까지 오는 데에는 이만저만 잔손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 가지들은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혹은 무거워지는 포도 열매로 인하여 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줄기에 붙어 있도록 철사줄에 일일이 묶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를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붙어 있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어디 포도나무와 온갖 과일나무뿐이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인간사의 모든 관계 역시 이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부부 사이도 붙어 있지 못하면 갈라서게 됩니다. 사이가 좋아야, 사랑해야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관계가 원수 지경이 되면 마주 보는 자체가 지옥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에게 붙어 있을 때, 행복의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부족하다 하여도 그 부모를 업신여기고 떨어져나간 자식치고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가족이건 직장이건 그 모든 관계에 있어 지속적인 붙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반드시 예수님께서 계셔야 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혼율을 가진 불명예의 국가입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 부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신앙 안에서 잘 살아 보려는 노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 부부 사이에는 반드시 예수님께서 계시어 갈라지지 않게 끌어당기시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포도를 먹을 때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열매가 꽉 찬 것보다는 못생겼더라도 듬성듬성 맺혀 있는 포도가 훨씬 맛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인간 세상의 모든 일들도 멋있고 잘난 사람보다는 못나고 부족한 사람들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도 당신 자신을 “바보야”라고 하셨는지 모릅니다. 우직한 바보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따르는 바보들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어린아이처럼 매달려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
-이기양신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늘 불렀던 성가가 예수님께서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주신 말씀임을 알게 되면서 새삼 그 뜻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제자들을 염려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내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셨는데 심지어 죽을 위험이 닥치는 극한 상황이 오더라도 결코 나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머무르라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 곁에만 있던지 24시간 내내 성당에서만 살라는 말씀일까요?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있습니다. 결혼은 몸과 마음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결혼이 몸과 마음의 결합이라고 해 이 신혼부부가 하루 종일 붙어 지내야만 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남편은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하고 아내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거리와 시간상으로 서로 떨어져 지내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신뢰와 사랑이 있으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신뢰와 사랑이 없으면 남처럼 멀리 느껴지는 법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라는 말씀은 믿음과 사랑으로 일치돼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주님 말씀과 사랑을 담고 지속적 교류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주님과의 믿음과 사랑이 주일에, 그것도 미사 시간에만 잠깐 이뤄지고 성당을 나가면 나도 모르게 그 끈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머무르는 것이 아니지요.
신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당을 떠나서도 주님 말씀과 사랑을 되뇌이면서 현실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머무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멀리 떨어져 있어도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1요한 3,22)라고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청하는 것을 다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고,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뤄질 것이다"(요한 1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시한부 인생이 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폐혈전증, 신부전증, 간경변 등 무려 십여 가지도 넘는 병을 앓는 그 사람에게 의사는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절망하지 않고 먼저 거리에 버려져 있는 환자들을 자기 집에 불러 모았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그 사람들을 목욕시키고 옷을 빨아주며 먹을 것을 줬습니다. 잠도 함께 잤습니다. 그러자 환자들이 자꾸 불어났으며 식량도 부족했고 잠 잘 방도 모자랐습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일을 지속할 힘을 얻었습니다.
과로로 여러 번 쓰러졌으나 그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병 때문에 일을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빚도 많이 졌고 설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생명이 다하는 시간까지 자기보다 어려운 환자들을 돌봐줬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는 나이 서른에 죽었습니다.
그가 쓰러졌을 때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는 '가톨릭 대상'이라는 큰상을 그에게 안겨 줬습니다. 교구장이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직접 주례한 장례미사에 신자들은 물론 많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참석해 고인의 뜻에 추모의 정과 사랑을 드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근영이었고 세례명은 안토니오였습니다.
세상에는 선고된 죽음 앞에서 절망과 두려움에 떨며 한없이 포악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며 불꽃같이 빛나는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삶도 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 한 복판에서 우리가 추구할 것은 오직 하나, 주님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나는 참포도나무이다
-구요비 신부-
리나라에‘포도나무’가 들어오고 포도 재배가 자
리 잡는 과정에 선교사 신부님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지금의 안성(安城) 포도가 불란서 신부에 의해 번식
되었고, 1910년대에 지금의 대학로가 자리 잡은 동숭동 일
대는 넓은 포도원 농장이었다. 선교사들은 포도 농사를 통
해 가난한 교회의 살림을 꾸려갔던 것이다. 이 배경에는 무
엇보다도 이분들의 백성에 대한 목자적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농부인 하느님 아버지와 참포도나무인
예수님 사이에(1절), 그리고 포도나무인 주님과 그 가지인
우리 인간 사이에(5절) 이 사랑이 깊게 배어 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구세사 안에서 이스라엘로 대변되
는 인간은 광야에서 마구 자라온 야생 포도나무와 같다(이
사 5,1-7). 하느님은 이 포도나무를 지극 정성으로 키우고
돌보아 주시지만 그 결과는 늘 실망과 후회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걸어온
기대와희망을성취하는분으로자신을소개하신다:‘ 나
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포도나무는 예수님의 운명을 담고 있다. 포도 농사꾼은
겨울에 죽은 가지들을 잘라내고, 이때에 좋은 나뭇가지도
전지(剪枝)하는데, 이는 수액을 모으고 많은 포도송이를 소
출해 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가지치기가 없을 때 포도나무
는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하게 자랄 뿐이다. 농부들은
가지치기를 할 때 포도나무가 아파서 운다고들 말한다. 포
도의 수액은 나무의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가 가장 많이 흘
러내린다. 어디 그뿐이랴?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맛깔진 포
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부서지고 으깨어져야 한다.
예수님 자신이 이런 운명을 사셨다. 십자가 나무 위에서 피
흘리는 참혹한 고통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을 위한 포도주
가 되셨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
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
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라
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자신인 참포도나무에서 하느님 나
라의 잔치에서 마실 새 포도주가 빚어진다.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는 일치의 기쁨과 행복을 십자가
의성요한은이렇게설명한다.“ 향기로운포도주를마심
은 하느님과의 친교가 영혼 전체 안에 실제적으로 펼쳐지
는 것이며, 영혼이 하느님 안에 변화되어 사랑하는 님(하느
님)이 나를 당신의 사랑 안에 두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마시
게 하신다”(영적찬가 26).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인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라!”하
고 여덟 번이나 반복해서 호소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
라!(4절)’는 말씀은 바로 기도 생활의 중요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다. 기도란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과 함께 살려고 하는
신앙 행위가 되어야겠다. 이는 주님이 내 안에 머무르시도
록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모시는 데서부터 시작된다(7절).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정신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음미하고, 기억하고, 갈망하고, 관상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애경 수녀-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재질이나 형태가 짧고 굽었으며 나뭇가지는 가늘고 뒤틀렸습니다. 숲 속의 백향목이나 상수리나무, 잣나무에 비해 목재로는 가치가 없기에 어떠한 물건도 만들 수 없지만 포도나무의 진가는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 소출에 관한 한 포도나무는 다른 모든 나무를 압도할 만합니다. 이처럼 포도나무가 알찬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목재용으로도 가치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사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고”(요한 15,1), “너희는 가지”(15,5)라고 표현하십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유기적인 생명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지면 말라 죽게 됩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포도나무의 땔감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요구하시기에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15,2) 하십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가지인 우리를 향해 기대하시는 열매는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내가 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살 수 있습니다(15,4 참조).
가지는 나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생명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가지는 절대로 스스로 자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모든 능력과 양분과 생명을 공급받는 존재입니다. 사도 요한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요한 5,12) 하며 ‘생명의 관계’로 연결시킵니다.
예수님을 떠난 것은 생명을 떠난 것이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생명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한테서 멀어집니다. 좀 더 출세하고 좀 더 부자가 되고, 너무도 젊은 날에 예수님께 매이는 것이 억울하며, 예수님만 믿고 살기에는 아쉬움이 많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생명을 가슴에 안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이고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농부는 나무와 가지를 위해 많은 것을 공급합니다. 때에 따라 물도 주고 역겨운 퇴비를 주고 병충해를 막기 위해 약을 뿌리기도 합니다. 볕이 들지 않으면 아예 삶의 자리를 옮겨 심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것들이 가지에는 견디기 어렵고 숨 막히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가 주는 것은 어느 것 하나 가지에게 해로운 것이 없습니다. 열이면 열 다 유익한 것입니다. 농부의 기대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지의 처지에서도 오늘이 고통스럽지만 믿는 마음으로 인생의 농부이신 하느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께 절대 신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농부이신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가지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 묶인 사람들입니다. 나뭇가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연한 순이 땅속에서 솟아오를 때 줄기가 커지면서 첫 번째 가지가 돋아납니다. 그리고 연이어 가지가 돋아납니다. 그런데 가지의 위치를 보면 첫 번째 가지가 제일 먼저 나왔으면 당연히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마땅한데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첫 번째 가지가 맨 밑자리에 있습니다. 두 번째 가지가 그 위에 세 번째 가지는 두 번째 가지 위에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언제나 가장 위쪽에 돋보이는 자리는 가장 약한 가지가 차지합니다. 만일 첫 번째 가지가 자신이 오래되고 굵으니 윗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 나무는 거목이 될 수 없습니다.
나무가 세월이 흐를수록 강풍에 견디는 거목이 되는 것은 크고 강한 가지들이 밑자리에서 버텨주기 때문입니다. 진정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나무라면 지난해 맨 윗자리에 있던 가지는 어느덧 새로 솟아난 가지 밑에서 그 가지를 버텨주는 밑가지가 되어 있습니다. 나무의 모든 가지는 예외 없이 다른 가지의 밑가지가 되어줍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은 결코 인간 세상의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한 구원의 밑가지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밑가지의 삶을 사셨고 결국 오셨던 목적 그대로 십자가 위에서 희생의 밑가지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밑가지가 되셨던 예수님께서는 가지인 우리에게 밑가지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아마 우리가 맺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런 종류의 ‘열매’를 맺는 나무에 붙어서 같은 열매를 맺기 싫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기대일 것입니다. 겨울의 포도나무는 죽은 나무 같고 가지도 그러합니다. 다른 나무와 달리 푸른 입사귀 하나 없이 각질이 많아 생명이 없는 나무 같습니다. 농부도 손을 놓아버린 듯한 나무요 볼품없는 가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희망도 기대도 없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포도나무에게 언제까지나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 같은 가지에도 새싹이 돋아날 새봄이 올 것입니다. 한여름의 포도를 기약하면서 약한 가지들은 길게 뻗어나갈 것입니다. 때가 되면 여전히 농부이신 하느님의 움직임이 시작될 것이고 이것이 농부의 기쁨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가지가 되도록 농부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전삼용신부-
예수님은 포도나무시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지가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영양분이 스며들어 와서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무슨 열매를 맺게 됩니까? 바로 성령의 열매인 마음의 행복(사랑, 기쁨, 평화)이 달리게 됩니다. 포도나무로부터 오는 수액은 바로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으면 성령님이 오시지 않고 성령님이 주시는 사랑과 행복의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것일까요?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인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라고 하셨고 어떤 분은 “기도는 숨쉬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기도 하지 않는 영혼은 열매도 맺지 못하고 말라 비틀어져 땔감으로나 쓰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불가마에 들어간다는 뜻이죠. 기도해야 예수님 안에 머무를 수 있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항상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좋은 열매를 맺고 하는 일도 다 잘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교만해져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처음엔 주님께 의탁하다가 나중엔 교만해져 주님께로부터 떨어져나간 예들을 이스라엘의 첫 세 명의 위대한 왕들의 역사를 보며 묵상해 봅시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사울입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을 따라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웁니다. 기름이란 바로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사울이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는 무엇을 해도 잘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교만해집니다.
불레셋 군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 겁을 먹게 된 것입니다.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뜻은 더 이상 하느님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싸워 이기겠다는 의미이고 오늘 복음대로라면 포도나무에서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는 사제요 예언자인 사무엘을 기다려서 제사를 드려야 했으나 군사들이 하나 둘 도망가는 것을 보자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사제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하느님께 제사를 지냄으로써 아주 하느님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막 도착하였을 때는 사울이 제사를 다 끝마친 상태였습니다. 사무엘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면 당신의 왕조를 길이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이제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왕조를 넘길 것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말렉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에 아말렉의 한 족속인 켄 사람들이 옛날 자신의 조상들에게 잘해 주었다는 명목으로 살려주고,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서 인질로 잡아 오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죽이라고 했는데도 좋은 짐승들과 귀한 것들은 아까워서 죽이지 않고 가져왔습니다. 매우 교만해져서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뜻대로 적당히 해석하여 자신의 맘대로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고 결국 얼마 뒤에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세 아들들과 함께 전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망하게 되는 것은 이렇듯 하느님께 꼭 매달려 있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 믿고 무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왕이 다윗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내려 그도 승승장구했습니다. 어렸을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인인 골리앗을 이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정으로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임으로써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자신 아버지의 후궁들과 관계를 맺고 아버지와 후궁들에게 수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실수는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다시 승승장구 할 수 있었으나 또 병적조사를 행함으로써 하느님께 큰 벌을 받게 됩니다. 병적조사란 자신의 병사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는 것으로써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사울의 잘못을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계산하며 살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도 사실 계산하며 살기 때문에 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산함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이 줄어들게 만듭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하느님 앞에 올바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의 지혜를 청함으로써 세상 모든 돈을 다 긁어모았지만 나중에는 우상에 빠져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의 지혜를 주시어 그 유명한 아기의 참 어머니를 찾아주는 재판도 하였고 국정도 잘 이끌어 매우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만에 빠진 그는 이제 자신의 머리를 믿고 하느님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위의 나라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700명이나 되는 왕비와 300명이나 되는 후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제사도 바치고 향도 치며 하느님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인 쾌락과 자신의 머리를 믿은 교만과 하느님 나라보다는 현세의 돈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에 그의 나라 열두 지파 중 두 지파만을 아들에게 물려주게 되었고 왕국은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 대표적인 세 왕들 이전도, 이후도 성경은 단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하느님을 잊고 내 힘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열매를 돈을 잘 버는 것, 인기가 좋아지는 것, 순간적인 쾌락 따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성령님의 열매가 없으면 돈이 많아도 고통스럽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통령들이나 대기업 회장들이 결국에는 어떤 일들을 당하게 되는지 우리는 잘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연예인들이 인기가 있어서 좋아 보이지만 지금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잠을 설쳐야 하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끔 자살하거나 마약이나 이혼, 그리고 연예계의 더럽고 비정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그 삶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백수가 편할 것 같습니까? 육체적으로는 편하겠지만 마음 적으로는 언제나 가시방석과 공허함 뿐일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세상적인 행복이 아니라 마음의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돈을 다 잃어도, 건강을 잃어도,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다해도 빼앗길 수 없는 참다운 행복이고 하느님나라로 들어가는 티켓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머무셨기에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내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이들은 그분께 청하는 것 또한 무엇이나 얻어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만이 아니라 내 곁의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지이고 그 분은 포도나무이십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해보며 마음에 새깁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랑이 남긴 말
-김찬선신부-
저는 저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특히 사랑과 관련하여 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무관심하거나 피하는 사람을 오지랖 넓게 관심 가지는 것을 보면 사랑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사람들과 있었던 일들이나 추억 같은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제게 사랑이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저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은
저와 있었던 일들을 거의 다 선명히 기억하고
제가 한 말도 많이 기억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난감합니다.
가장 난감한 때는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을 때입니다.
온 아이들의 3분의 1밖에 기억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두 반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였기에 그
렇게 기억이 없을 수는 없는데......
아이들은 저를 알아보고 이 얘기 저 얘기하는데
저는 그 아이와 관련된 기억이 전혀 없었습니다.
너무도 당황스러워 그 동창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이후 저는 사랑의 죄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의 죄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집착이나 애착하지 않고 훌훌 떠날 수 있는 것,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 지향적 현재를 살 수 있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총이지만
진실한 사랑에 있어서는 늘 배반하는 죄인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어찌 그의 존재가 내 안에 남아있지 않고
그의 말이 제 안에 남아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그가 한 말이
보석보다 귀한 보물로 간직될 것이고
두고두고 힘을 주는 격려가 될 것이고
일생을 버티고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버팀목이 될 것이고
두고두고 지키고 실천하는 계명이 될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좋은 이야기도 계속 들으면 듣기 싫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설마 그럴까 라는 생각을 많이 가졌답니다. 왜냐하면 좋은 말은 언제 들어도 좋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이번에 좋은 이야기도 짜증이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에 제가 제일 많이 듣는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손에 깁스를 해서인지 만나는 분마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
“신부님, 손은 왜 그러세요?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신거에요?”
이 말이 저를 약 올리려고 하는 말일까요? 아니면 제 기분을 나쁘게 하려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저를 생각해서 하시는 말이며, 사랑이 담긴 염려의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늘 똑같은 말을 듣다보니, 그 소리를 이제는 제발 듣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나더군요.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과연 하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없겠지요. 따라서 제가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특히 미사 때 먼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제가 폼 나게 일대 백으로 싸우다가 이렇게 팔이 부러진 것 같지만, 사실은 자전거 타다가 어이없이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팔이 똑 하고 부러졌네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미사 후에 전혀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전거 성토대회가 열립니다. 자전거가 위험하니까 다시는 타지 말라고, 또한 안전한 운동을 놔두고 위험한 자전거를 탔냐고들 말씀하시지요. 그럼 또다시 그 과정을 설명해야 합니다. 자전거 타고 있는데 바로 옆으로 자가용이 지나가서 자전거가 흔들렸다고, 그래서 서려고 했는데 착용하고 있던 자전거용 신발이 빠지지 않아서 구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제가 재미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네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도 거의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었지요.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말씀하셨고,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그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가르치기가 힘들었을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화 한번 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종 비유를 통해서 풀어 말씀하고 계시지요. 오늘 복음을 봐도 그렇지요.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쉽게 설명해 주십니다.
당시의 배웠다는 학자들처럼 어렵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쉽게 설명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똑같은 질문을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받아주셨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만 보아도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네요. 그런데 우리들의 사랑은 어떤가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사랑을 키워나가셨으면 합니다.
똑같은 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짜증내지 맙시다.
"내 안에 머물러라”
-이수철신부-
수도원에 살아도 때로 마음이 허무함에 젖어들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 마음 허전하기에
차 한 잔 하며 가만히 밖의 신록의 산야를 바라보는 순간
고요한 기쁨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저절로 흘러나온 글이 있습니다.
주님은 임으로 바꾸고,
제목은 ‘이렇게 좋으신 임 찾아오시는데’로 정했습니다.
“햇살 은총 가득,
신록으로,
찾아오시는 임이신데
부드러운 미풍,
은은한 향기로,
찾아오시는 임이신데
온갖 꽃들,
환한 웃음으로,
찾아오시는 임이신데
내 누구를 기다리겠는가?
내 누구를 찾아 나서겠는가?
이렇게 좋으신 임 찾아오시는 데.”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이라 할까요?
좌우간 글 써놓고 큰 위로와 평화를 느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는데 누구를 기다리겠으며,
누구를 찾아 나서겠습니까?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주님의 참 좋으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주님 안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주님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위로와 기쁨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해갈되는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이 주님 안이 내 생명의 제자리입니다.
이 자리 찾지 못해 모두들 계속 방황입니다.
평생 주님 안에서의
제자리 찾지 못하고 헤매다 세상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엉뚱한 자리에서 아까운 정력과 시간 탕진하면서
마음의 공허를 채우려하지만 더욱 깊어가는 마음의 허무일 뿐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 막연한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비로소 주님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주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위장된 거짓 사랑도 많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이 안전하고 영육에 평화와 건강을 줍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 한다는 것,
바로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가 있습니다.
혹 마음이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되며,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저의 말이 아니라 오늘 2독서에서 사도 요한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고마운 것은 뒷부분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주님과 일치의 관상 상태를 말해 줍니다.
바로 이 때
허무의 심연은 사랑의 충만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불평과 불만은 감사와 찬미로 바뀝니다.
이런 일치의 상태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과의 일치 상태의 관상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내적 힘이, 일이나 활동이,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오늘날 그 흔한 중독을 치유해줄 뿐 아니라 중독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사실 주님 안에 머무는
관상보다 더 좋은 웰빙(well-being)도 웰다잉(well-dying)도 없을 것입니다.
바르나바와 사울이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주님과 일치의 관상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주님 없이 하는 일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수고는 많이 했는데 남는 것은 하나도 없고 마음은 허무로 가득할 뿐입니다.
저절로 코헬렛(전도서)의 말씀 새어 나올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현세의 삶에 전념하는 이들,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 하는 탄식 소리가 새어 나오기 전,
아직 힘 있을 때 생명의 하느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진리를 뼈저리게 통찰한 시편 저자의 고마운 고백 들어보십시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고,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며,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헛되리로다.”
괴연 여러분은 주님 안에 머물러 계십니까?
내 관상의 열매들이자 성령의 열매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겸손,
희망,
믿음의 열매들은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주님 또한 우리 안에 머무르므로 풍성한 관상의 열매들이요,
진정 이게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요 행복이 됩니다.
비로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가 되고
우리의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가시적 장소와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것도 훈련을 통한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이 물질주의가 만연된 세속화로 치닫는,
영성은 점점 약해지고 온통 육신의 욕망만 팽배한 세상에서
참 사람으로, 하느님의 자녀인 관상가로 살기위해,
주님 안에 머물러 참 나를 찾는
미사시간, 피정시간, 기도시간, 묵상시간, 성서공부의 마련은 필수입니다.
이 복된 미사시간,
주님 안에 머물면서 참 나를 찾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아버지의 포도 사랑1
-노성호 신부-
저희 아버지는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이苛求? 그래서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 말씀을 묵상할 때면 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신학생 때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잊지 않고 찾는 아버지의 포도밭은 정말 장관입니다.
그 포도밭을 보면서 아버지께서는 열심히 땀 흘려 일하시는데, 나는 신학교
생활을 게을리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포도 수확철이 되면
탐스럽게 익은 포도송이들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면서 따고 포장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쩌다 실수로 알맹이 한 알이라도
떨어뜨리면 그 한 알까지도 아끼며 버리지 않으셨던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나 다른 나무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나무에게는 가차없이 결단을 내리십니다. 마음이 참으로
아프셨을 테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탐스런 열매들을 맺었던 나무들이 밖에 버려지면서 점점 말라 가고, 나중에는
불에 태워지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아버지는 늘 변함없는 사랑 속에 똑같이
거름과 물로 모든 나무들을 가꾸셨는데, 왜 어떤 나무들은 재로 변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 나무들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을까요?
그 답을 정확하게 찾을 수는 없지만, 아버지께서 가꾸어 놓으신 포도원을
갈 때면 언제나 같은 질문을 해 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박아미 수녀-
◆오늘 복음에서 나(예수)-아버지(하느님)-너희(제자들)의 관계가 포도나무·농부·포도나무 가지라는 상징으로 엮여 있다. 포도나무로 표상되는 예수께서는 가지에 생명수를 공급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액을 빨아들이시고, 농부이신 하느님은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고 손질하는 등 쉼 없이 노동하고 계시다. 가지는 단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포도 열매가 나무 둥치 아닌 나뭇가지에서 열린다고 볼 때 우리의 협력 없이는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될 수 없음도 보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대로 “너 없이 너를 창조하신 분께서 너 없이 너를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안에 머물다(mevnwevn)’라는 표현에서는 참다운 인격적 관계 맺음을 배울 수 있다. 한 성서학자는 이를 자궁에 태아가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로 묘사하면서, 제자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함은 선택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곧 예수 안에 머물지 않는 이상 그는 제자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 ‘안에(evn)’ 머물기 위해서는 그 대상보다 작아야 한다. 내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기 위해 그분보다 작아야 하듯이 주님 역시 내 안에 머무시기 위해 나보다 작아지는 길을 서슴지 않고 택하신다. 미사성제 때 사제의 한 말씀에 순종하시어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시고 내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자그마한 모습으로 때로는 쪼개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신다. 내 삶의 걸음이 더딜지라도 결코 강요하지 않으시고 나의 때를 기다리면서 보조를 맞춰주시는 작고 섬세한 분이시다.
‘머물다(mevnw)’의 사전적 의미는 ‘도중에 멈추거나 일시적으로 어떤 곳에 묵다’로 나와 있다. 누군가와 온전히 머물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판단·시간 등을 멈추고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인간적·영적 의미에서 더 큰 세계에 나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나를 적응시키는 것은 죽음만큼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주님이 가셨고, 바라시는 길인 것을….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제자가 된 우리는 주님 말씀으로 계속 성장해야 한다. 일시적인 것들을 상대화하면서 말씀에 꾸준히 잠기다 보면 열매는 반드시 맺히리라.
든든한 지주이자 뿌리이신 주님
-양승국 신부-
새벽시장에서 일하시는 한 형제님을 만나 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때 경기가 좋던 시절도 회상하셨습니다. 장사가 너무나 잘 돼 돈을 일일이 셀 시간이 없었답니다. 할 수 없이 그날 번 돈을 큰 보따리에 집어넣고 발로 꾹꾹 밟았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아이들 못 보게 하고는 흐뭇한 얼굴로 돈을 세던 그런 시절도 있었답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경기가 너무 좋지 않아 현상유지만 해도 다행이랍니다. 그래도 한밤중에 물건을 구매하러 올라오는 지방 상인들을 맞이하려 저녁 무렵 가게로 나가셔서 새벽까지 가게를 보신답니다.
계속 건네시는 말씀이 저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여명이 밝아올 무렵, 잠시 가게 문을 닫아건답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향하는 곳은 침대도 아니요, 사우나도 아니요, 성당이랍니다. 새벽미사가 시작되기 전 그 어둠을 뚫고 몇몇 신자상인들은 성당으로 모인답니다. 그 이른 새벽녘에 미사 전까지 성체조배를 하고, 또 레지오 마리애 회합도 하신답니다. 그런 고된 일상 가운데서도 그분들이 늘 챙기는 곳은 어려운 복지시설입니다. 뭣 하나 더 해주지 못해 늘 안타까워하십니다.
고달픈 일상생활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과 끈을 놓지 않으려는 그분들 삶에서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시댁 식구들이 사이비성이 농후한 종교를 믿는 집안에 시집가서 오랜 세월 무지막지한 고초를 겪으셨던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박해가 컸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은 그녀 삶에서 목숨과도 같은 부분이었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천주교와 무슨 악연이 있었던지 그녀의 입에서 천주교 '천'자만 나와도 '재수 없다'며 벼락같이 화를 내고 노골적으로 천주교를 반대했습니다. 주일이 되면 시어머니는 강제로 그녀를 끌고 자신들의 집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절대로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시집 식구들의 물샐 틈 없는 감시체제 하에서도 그녀는 은행이나 시장을 오갈 때 생기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살짝 살짝 가까운 성당을 찾아 성체조배를 하는 등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해나갔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그러다가 발각돼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 오랜 세월,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녀가 받아왔던 고통이나 수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참을 수 없는 핍박 속에서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오신 그 자매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이란 때로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오랜 고통의 세월을 잘 참아온 그녀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시댁 모든 식구들의 천주교 입교라는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주시더군요.
그녀의 독특한 신앙여정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아주 부족한 저이지만 늘 애타게 갈망하는 소원 한가지가 있습니다. 세파에 흔들리는 아이들의 든든한 뿌리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든든한 뿌리인 저를 통해 비쩍 마른 아이들이 왕성하게 영양분을 흡수해서 보란 듯이 한번 일어서게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바람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백성들의 든든한 지주이자 굳건한 뿌리가 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분은 영양결핍증세가 심각한 우리에게 매일 영양분을 공급해주시는 생명의 뿌리입니다. 죄와 악행으로 시든 우리 영혼의 가지에도 다시금 생명의 수액을 보내주시는 구원의 근원입니다. 가지가 뿌리 없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주님 없는 우리 삶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떠한 시련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주님 안에 머물러 있기를 기원합니다. 모진 신앙의 박해 가운데서도, 끝도 없는 방황과 좌절 사이를 걸어가면서도,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끝까지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참된 열매 맺어
-김영수 신부-
농사를 짓는 농부는 세 가지 부류로 부릅니다. 첫째는 게으르고 무책임하여 논밭에 잡초가 잔뜩 자라게 하는 농부입니다. 이를 일컬어 하농(下農)이라 합니다. 둘째는 알뜰하고 부지런하여 알곡을 착실히 기르는 농부입니다. 중농(中農)이라 부릅니다. 셋째는 알곡 농사를 짓기 전에 먼저 알곡 농사의 근본이 되는 흙을 먼저 가꾸는 농사꾼을 일컫습니다. 이런 농사꾼을 상농(上農)이라 부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드러내 주시는 멋지고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농사일을 사람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상농이라 함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한 사람 한사람이 각각 제구실을 하도록 길러주는 것을 뜻합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농부 중에서도 으뜸인 상농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있게 하시고 훌륭한 농부가 좋은 결실을 위해 능숙하게 농삿거리를 돌보듯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을 다듬고 보살피십니다.
아버지의 뜻은 포도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열매를 맺는 가지를 손질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내시는 것은 포도나무가 더욱 많은 결실을 거두도록 가꾸시는 돌보시는 사랑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다고 하여 모두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나무에 붙어 있어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서 쓸모없이 붙어 기생하는 가지가 있고, 열매를 맺는 가지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의 차이는 포도나무이신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머물지 않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지들이 당신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안에도 열매를 맺는 가지도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삶은 많은 열매를 맺지만, 내 뜻과 내 만족을 위해 사는 삶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쓸모없는 가지가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더 좋은 결실을 거두기 위해 때때로 우리 안의 쓸모없는 가지들을 잘라내시고 손질하십니다.
그러나 내 안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내는 일은 두렵고 아픈 일이기도 합니다. 하여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내 버리는 일이 주님의 보살핌이 아니라 나를 잃어버리는 고통으로 여겨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한 여인이 큰 고통을 당하여 하느님이 참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것일까,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포도원 옆을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포도밭은 여름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농부들이 큰 가위로 포도나무 가지를 싹둑싹둑 잘라내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 모습에 놀라서 농부들에게 물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를 그렇게 무참하게 잘라버리십니까? 그 가지들이 너무나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농부가 말했습니다. “이 가지들은 잎만 무성하지 열매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가지는 양분만 빨아먹게 되어서 열매를 맺는 가지마저 튼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는 가지가 더 잘 자라도록 잘라내는 것이랍니다.”
그제야 여인은 깨달았습니다. 농부가 가지치기와 손질을 그만두고, 경작을 멈추는 것은 포도나무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시련은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더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 위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만 무성한 가지를 잘라내고 가꾸시는 사랑의 손길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각자의 삶 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 안에 머무르게 하십니다. 나약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힘을 받아 놀랍게 변화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름으로써 변화되고 참된 삶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내 안에 헛된 욕망과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잘라내 버리는 용기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견디어내는 고통, 사랑하기 때문에 겪어내야 하는 희생은 하느님 뜻을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 안에 변화된 삶을 위하여 자신이 잘려 나가는 아픔을 겪어야 할지라도 그것은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가 제자리에서 제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 주시는 사랑의 보살핌이심을 믿고 예수님 안에 머무를 때에만 참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참 행복이 없다.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불완전한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니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주님과 일치해서 그분에게서 생명의 기운을, 힘을 받아야 한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 그분께 일치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와 성사와 말씀을 통해 그분께로 가야 한다. 끈떨어진 연(鳶)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1. 가장 높은 ‘행복지수’의 나라는?
“나는 행복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 어떤 국제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놀랍게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가장 많은 나라는 1997년에 GNP가 $260밖에 되지 않는 '방글라데시'였습니다. 반면에 세계적인 최첨단 복지국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스위스($ 44350) 노르웨이($ 34510) 덴마크($ 32100) 등은 모두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젠가 김 추기경님께서 피정 지도를 하시면서 자신이 한번은 오스트리아(국민소득 $ 28110)의 한 작은 교구에 사제서품이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주변 환경이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답게 잘 정리되어 있어서 그곳 주교님께 “이곳은 정말 지상천국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주교님의 말씀이“추기경님, 그렇지 않습니다. 자살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알콜 중독자, 마약중독자, 에이즈 환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2. 소유와 쾌락이 행복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고 물으면, 아마 많은 이들이 “돈만 많이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텐데.... '로또 복권' 한번만 당첨만 되면....”하고 생각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빈부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매일 끼니를 걱정하는 극빈 계층의 사람들이나 사글세방도 얻지 못하고 지하도를 찾는 노숙자들이 많다. 이들은 50-6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나, 소형 아파트보다 더 비싼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돌이라도 던지고 싶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그것이 바로 행복의 보증이 될 수 없음을 잘 알아야 한다. 1억을 가지면 10억이, 10억을 가지면 100억이 부러워지게 마련이다. 불만은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소유를 통해 배(腹部)를 채워도,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서로 위하고 아끼는 마음과, 참고 절제하는 자세가 없을 때, 가슴은 공허하고 인간은 항상 불만과 불평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촌에서 미숫가루만 먹던 사람이 도시에 와서 '밀크쉐이크'를 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힐 정도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자꾸 먹으니까 점점 맛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인간의 감각은 처음에 느끼던 쾌감을 계속 느끼기 위해서는 그 자극을 점점 배가(倍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연인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함께 있기만 해도, 손만 잡고 있어도 황홀하고, 결혼 초에는 한시바삐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안달을 한다. 그런데 6-7년 살고 나서는“신부님, 요즘은 저희 집 사람을 봐도 어머니인가 누이동생인가 아무 느낌이 없어요! 집에 들어가기도 싫고 ......"하면서 고민을 틀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끊임없이 더 맛있고 더 신나고 짜릿한 것을 열심히 찾아가면 결국 마약중독에로 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찾아낸 것 중에 가장 큰 자극이 마약이니까. “보속이 없는 쾌락은 없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참고 절제하고 기다리지 못하면 우리는 감각의 굴레 속에서 망하고 말 것이다.
3. 돌감나무에도 단감이 열릴 수 있다
돌감나무에 단감을 접붙이면 단감이 열린다. 같은 생명을 나누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인간은 그 자체로는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해서 그분의 기운을 받고 그 영의 힘을 받지 못하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다움을 지닐 수 없는 것이다.
포도나무이신 그분에게 붙어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우리는 성사를 통해 자주 그분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산다.”고 하셨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자주 그분 앞에 나를 비춰봐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맘에 모시고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과 의논하며 함께 사는 생활이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판단하고 그분처럼 행하게 될 것이다. 끈 떨어진 연(鳶)은 바람 부는 대로 떠돌게 마련이다. 우리도 주님과 내적인 일치를 잃어버리면 인간다움을 잃고 추락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기도가 그만큼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곁에 머무름만으로도 충분한 배움
- 김진규 신부-
하나의 생각: 스위스의 한 성당 안에는 손과 발이 없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 있다고 합니다: “나에게는 더 이상 손이 필요치 않다. 이제 너희들이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어야만 하는 나의 손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발이 필요치 않다. 이제 너희들이 나의 발이다.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서 나에 대해 말해주어야 하는…”
손과 발이 없는 예수님이라…. 그리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복음 속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라는 생각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겠지요?
또 다른 생각: 사람은 하루에 6만 가지 이상을 생각할 수 있지만, 재미있는 것은 90% 이상이 전날과 똑같은 근심과 걱정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똑같은 근심과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들이라… 안타까운 일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인도 사람들 90% 이상, 일본 사람들 20% 정도만이 행복하다고 느낀다는데, 그래서 행복의 수치와 물질은 비례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물질만능으로 찌들어 사는 우리들. 우리에게 “쉼”이란 그리 유쾌한 말이 아닌 듯 여겨지고, 한국의 관용어(?)가 되어버린 “빨리 빨리”,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의 “느림의 미학”은 이미 무색한 용어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속에서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라는 오늘 복음 말씀도 과연 몇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조금은 여유롭게, 바쁘게 지나가는 길을 멈추고 차 한잔을 마시듯, 일상을 벗어나 조용하게 성당 안에서 주님을 찾으며 그 안에 머무름은 오늘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시대에 뒤쳐진 무기력함을 의미하는 일이겠습니까? “머무름없이 머물라”는 역설의 의미와도 같이, “머무름”이란 “게으름”이나 “안주(安住), 혹은 집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진(精進)을 위해 집착을 버리고 잠시 쉬는 동안의 자신성찰(Kenosis)이며, 그것은 더욱 풍요로운 삶을 위한 지혜로운 쉼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 걱정 다 잊고 잠시 쉬면서 함께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친구처럼, 주님과의 머무름,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지혜로운 쉼”입니다. “진정한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그의 곁에서 스스로 배울 뿐이다. 태양은 누구에게도 자기 빛을 주지 않는다. 다만 만물이 그 빛을 받아 스스로 자라갈 뿐이다.”(비노바 바베)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그대들은 가지입니다.”
-서공석 신부 -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그대들은 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입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5,2)고 말하고, 예레미아는 하느님이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다.”(2,21)고 말합니다. 시편은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지켜 주소서.”(80,15)라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곧 하느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단어로 잘 알려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포도나무이시고, 하느님은 그 나무를 손질하는 농부이시며, 신앙인들은 포도나무 가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심으신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하느님의 손질을 거쳐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인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살도록 배웠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계획하고,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법을 터득하였습니다. 그것을 잘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일컫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우리가 속하는 집단을 위해 우리는 계획하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어디를 갈 때는 목적지까지의 계획을 세우고, 합당한 교통수단을 택해서 거기에 도달합니다. 물건을 구매할 때도, 계획한 상점에 가서 계획한 물품을 구입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집단을 위해 계획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계획 없이 접근해야 발견할 수 있는 대상도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 작품의 세계 안에 그냥 빠져들고 심취합니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받은 감동으로 우리 자신이 달라져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문학작품을 읽거나, 음악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계획 없이 접근합니다. 감상과 감동은 우리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대상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는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우리 자신이 만든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열어주는 세계에 빠져들고 감동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접할 때도 같은 자세가 요구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계획을 포기하고,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들이 열어주는 세계 안에 빠져들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를 위해 유익하게 활용하겠다는 계획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면서 예상했던 교훈만 복음서에서 얻을 것입니다. 이 때 복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세계에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 계획대로 한 수를 배웠다는 성취감은 있을지라도, 복음서가 열어주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보지는 못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수액(樹液)을 받아 나무의 생명을 살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연결되어 그분의 생명을 배워서 살라고 초대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챙기면서 사는 생명에서 탈피하여, 예수님이 보여주신 생명을 받아 살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생명이 하느님 나라의 생명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에서 발생하는 삶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는 모습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 가련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고 자주 말합니다. 베드로는 설교에서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 주셨다.”(사도 10,38)는 말로 그분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겨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가련히 여겨 마귀를 쫓으며, 측은히 여겨 죄인으로 지탄받는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는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당신이 성공하기 위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층의 총애를 받아 종교지도자로서 출세의 길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전통 따라 관행 따라 무난하게 살아서 그들의 칭찬을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소중한 것은 그분이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분은 전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확신은 유대교 사회에서 외면당하였지만, 그분은 그것을 한(恨)으로 가슴에 품지도 않으셨습니다. 자비와 사랑은 한이라는 응어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분은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 생명의 진실에 감동하고 심취하셨습니다. 그 점에서 그분은 여니 인간과 다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위한 끊임없는 계획에 골몰하여 삽니다. 예수님은 아무 계획 없이 하느님 생명의 진실을 따라 사신 분입니다. 신앙인의 기도는 자기 자신을 열어서 그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진실이 자기 행동의 주체가 되게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에서 들은 요한 제1서는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당신 행동의 주체로 삼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예수님에게서 큰마음을 배워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기 자신의 일에 골몰한 마음보다 더 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태어나 살다가 그것을 대자연에 돌려주고 어디론가 가는 생명입니다. 어차피 잃어야 하는 세상이고, 내어 주어야 하는 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과 그 실천만이 하느님 안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우리가 계획하여 획득하는 명예와 재물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잘린 가지’의 운명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워 하느님 생명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계획들을 다시 평가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 실천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작은 실천으로라도 그 세계 안으로 한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이 자를 것은 자르고, 키울 것은 키워,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열매를 맺어 하느님의 진실이 우리 안에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으로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의 내용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대한 내용이다. 복음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잘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평범한 내용 같지만 그것은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제1독서: 사도 9,26-31: 교회는 주를 두려워하며 그 수효가 차츰 늘어났다
사도 바오로는 회개한지 3년이 된 후(갈라 1,18-24 참조). 예루살렘 공동체에 함께 하려고 하였으나 어려움을 당했다. 박해자였기 때문에 두려워하였던 것이다(26절). 그러나 바르나바가 바오로를 소개하고 주 예수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하여 해결이 되었다(28절). 저자인 루가는 초기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즉 교회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령의 격려"로 성장된다. 교회는 같은 목적을 위해서 다양성 안에서 단일성을 추구하는 조화있는 성장의 개념이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보다도, 주님께 대한 성실성, 즉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화하시는 성령의 힘, 즉 성령의 격려로써 가능하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역시 이것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에 공식적으로 가입하려고 한 것은(1고린 9,1), 성령의 특은이 교회 밖에서나 교회를 거슬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모든 카리스마를 다 해도 그 그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위대한 바오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제2독서: 1요한 3,18-24: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이에 대한 삶의 모습은 '말로써가 아니고 행동과 진실에 의한 상호신뢰와 참된 사랑으로' 하게 되면(18절), 하느님께서는 '성령과 믿음으로 가득 차서'(사도 11,24)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인식하고 분별할 능력이 있는 바르나바와 같은 사람을 항상 보내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가지도 자기 탓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간에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신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당신 피를 통해 새로운 계약을 세우시며(마태 26,27-29)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고 선포하신다(1절). 이제 주님의 포도밭은 이미 그리스도이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포도밭의 상징을 통해 표현된 사랑과 충실성의 완전한 충만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홀로 '참 포도나무'가 되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지들'인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살도록 그들을 당신의 생명에 살도록 그들을 당신에게 결합시키신다(4-6절). 포도가지들의 "공동체적" 운명은 우리 모두가 풍요한 결실을 맺기 위해 원 그루터기의 무진장한 생명력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주님의 말씀의 "떠나지 말라"는 본래 "머물러 있다"라는 말이다. 이는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에 같은 생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듯이 똑같은 생명에 감싸여 있음을 느끼는 데서 생겨나는 일치, 수렴, 용해, 우정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떠나지 말라"는 말은 일방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호적인 의미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체에 대해 말씀하셨듯이 같은 생명을 함께 실현시킴을 의미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5,56). 그리고 이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이제 그 가지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을 만큼 "열려져" 있어야 하고, 둘째로 "열려진" 것 뿐 아니라 "결실"을 맺어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8절). 즉 믿음과 사랑의 결실을 맺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경우에 말과 머리로만 그리스도께 일치하고 있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이는 우선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비극은 우리의 불충함에서 기인됨을 알아야 한다. 이 "포도밭"이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말라버린 가지는 잘라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6절). 그리고 또 말씀하신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2절). 여기서 주님의 "포도밭"에 대한 "심판"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리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를 쳐준다. 첫 번째 경우는 단죄하는 의미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멀어져 멸망하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비록 시련과 고통은 따르지만 사랑의 심판이다. 그것을 통하여 더욱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어떻게 일치를 이루고 그 생명에 함께 하고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 오늘 이 독서와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삶 속에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초기 교회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보아진 것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그래서 기쁜 하루가 되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다
- 허영엽 신부-
저는 이번에 아버지와 화해했습니다. 지난 15년간 잘 때도 아버지 방 쪽으로 누어서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아버지가 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돌같이 굳었던 마음이 성경공부를 통해 살같이 부드럽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평생 받았을 내적인 고뇌와 고통, 외로움에 대해서도 눈이 떠졌습니다.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속내는 한없이 약하고 외롭고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항상 눈물이 흐릅니다. 이 모든 변화가 하느님께서 해 주신 것이 맞죠? 신부님.”
얼마 전 주말에 ‘청년 성서 모임’ 연수를 지도했는데, 그 중 연수에 참석했던 한 젊은이가 저에게 보낸 메일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만큼 더 큰 기적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바쁜 시간을 내서 열심히 성경공부와 기도, 봉사에 열중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는 젊은이들과 함께 근 십여 년 성서연수를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이 힘있게 살아 움직이는 현장을 체험했습니다. 젊은이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은 사제인 저에게도 큰 축복이고 행운이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로, 신앙인들은 가지로 비유하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더할 수 없는 밀접한 생명의 관계입니다. 이처럼 신앙인들은 생명을 보존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후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의 말씀은 그분의 비장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그렇습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열매를 맺게 됩니다.
포도나무인 주님에게 가지처럼 붙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말씀을 생활의 지표로 삼아 말씀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의 실천은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이렇게 생활 속에서 우리가 맺는 성령의 열매로 세상은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 우리가 세상 안에서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서 하느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포도나무가 포도나무가지는 아니다
-배하정 신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A. De Mello 신부님의 "종교박람회"라는 책에 이런 내용의 글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독수리 알을 발견하여 자기 집 뒤뜰에 갖다 놓았더니,
독수리 새끼가 다른 한배 병아리와 함께 알을 까고 함께 자랐다.
일생 내내 이 독수리는 닭이 하는 짓을 하며 스스로 닭이라고만 여겼다.
땅바닥을 긁어 벌레를 잡아 먹고 꼬꼬댁 꼬끼오 소리를 내며 날개를 푸드덕거려 공중으로 두어 자씩만 날곤 했다.
세월이 가고 독수리는 매우 늙었다. 어느 날 무심코 쳐다보니, 멀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큼직한 새가 떠돌고 있었다. - 튼튼한 금빛 날개를 좀처럼 퍼덕이는 일조차 없이 세찬 바람결 속에서 우아하고도 위풍당당하게.
늙은 독수리는 경외심에 차서 쳐다보며 이웃 닭에게 물었다.
"저분이 누구지?"
"저분은 새들의 왕이신 독수리님이야."
이웃 닭이 말했다.
"하지만 딴 생각일랑은 말라고. 너나 나나 그분과는 달라."
이리하여 독수리는 아예 딴 생각일랑은 하지 않았고, 끝까지 자기는 닭이라고만 여기다가 죽었다.』
독수리는 자신을 독수리가 아닌 닭으로 착각하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듣게 되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포도나무가 포도나무 가지는 아닙니다. 우리들은 아버지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그 이상의 것도 아니고 그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포도나무가 포도나무 가지가 아닌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주인공인냥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을 그만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과 나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고,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세상이 존재하고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의존적이며 나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현실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바벨탑을 쌓으며 자신의 나라를 이루려고 발버둥치는 모든 이들이 이 복음 말씀을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창조물은 창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될 수 없습니다. 독수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평생 자신을 닭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평생 자신을 닭이라 착각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이여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절대로 주인이 아님을 고백하며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