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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연소적도군(燃燒的島群)
화기(禍起)
명나라 만력19년(1591년) 팔월, 섬서 영하진(寧夏鎭).
서북의 하늘은 음울했다. 두터운 먹구름이 이 변방도시를 뒤덮고 있었으며, 성안의 분위기는 숨을 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억눌려 있었다.
벼슬에서 이미 물러난 대명의 전 부총병(副總兵) 발배(哱拜)는 집안의 대청에 단정하게 앉아있었고, 손에는 자신의 양자가 구금되었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가 꽉 쥐어져 있었다. 그의 얼굴색은 굳어졌고,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마음 속은 비분으로 가득찬다.
"당형(黨馨) 이 필주가 사람은 너무 업신여기는구나!"
발배는 순간 분노가 폭발했고, 주먹을 들어 탁자를 내려쳤고,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이 바닥에 떨어진다.
창밖의 칠흑같은 하늘을 바라보던 발배는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이 여러 해동안 인욕부중(忍辱負重)해왔는데 결국은 노구(虜寇)라는 악명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발배는 이름만 들어도 한족(漢族)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원래 몽골인이고, 일찌감치 명나라에 투항한 사람이다.
군사분야에서 명나라조정은 일관되게 이로제로(以虜制虜)를 시행했고, 발배는 군대통솔과 전투에 뛰어나서 우수한 인재였다. 발배는 특히 몽골부락의 후방을 급습하는데 뛰어났고, 동족이라고 하여 조그만치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몽골부락에서는 심지어 이런 말들이 돌았다: 발배가 온다라는 말만 들리면 몽골의 어린아이들은 밤에 감히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그렇기 때문에, 발배는 명나라의 변방군내에서 점차 두각을 드러냈고, 전공으로 참장(參將)으로까지 승진하여 독자적으로 군대를 거느리게 되며, 더더욱 2천여명에 이르는 정예 가정(家丁, 사적병력)까지 거느리게 되녀 실로 실력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력17년에 이르러, 발배는 나이가 많아 은퇴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발승은(哱承恩)이 그의 직위를 물려받는다.
발배는 비록 조정의 응견(鷹犬)이었지만, 대명의 문관들이 보기에 오랑캐는 어쨌든 오랑캐이다. 강산은 쉽게 바뀌지만, 본성은 바뀌기 쉽지 않고, 발배도 예외는 아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명은 이문제무(以文制武, 문관이 무관을 제압하다)의 제도를 실행했고, 한족인 무장까지도 탄압을 받으니, 이민족 출신의 발배는 자연히 더욱 핍박받았다. 당초 병부상서 왕숭고(王崇古)는 발배에게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직위를 주어 경성을 수비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그가 오랑캐신분이라는 점을 들어 극력 반대한다.
그뿐 아니라,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발배의 관료로서의 길은 험난했다. 여러 관리들이 반복하여 요청해서 겨우 참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직을 떠난 후, 원래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야할 발배에게 그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상대를 만나게 된다. 바로 신임 영하순무(寧夏巡撫) 당형이다.
만력17년, 명나라조정은 당형을 영하순무로 보낸다. 당형이라는 인물은 가혹한 성격과 관료기질로 유명했다. 그래서 별명이 "당팔십(黨八十)"이었다. 장거정(張居正)의 그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약간의 작은 재주는 있으나 많지 않다. 사람됨이 가혹하고 잔인하다."
이 당팔십이 영하에 오자마자 관리들 명부를 훑어보고나서 바로 발배를 찍는다.
투항해온 오랑캐로군. 그런데 영하에서 여러 해동안 있으면서 기반이 탄탄하며, 집안에 2천의 가정( 집안의 하인이란 뜻으로 명나라 장군들이 거느렸던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다니. 영하에 이런 인물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그리하여 당형은 중점적으로 발배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전에 누군가 발배가 부하들이 거짓명목을 붙여 군량을 빼돌리는 것을 종용하고 있다고 고발한 바 있다. 이전의 순무들은 그런 류의 사건은 변방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겨서 추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당형은 그것을 문제삼아, 발배를 아주 낭패하게 만든다.
사건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당형은 다시 발배에게 과종(瓜種)을 요구하고, 발배는 즉시 사람을 시켜 보낸다. 당형은 그 과종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과종을 가져온 자를 죽여버린다.
발배는 비록 분노했지만, 당형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결국 재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즉시 두 명의 양자를 통해 백은 400냥, 사리피(猞猁皮) 40장을 보내어, 돈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당형은 오히려 화를 내며 발배의 양자에게 곤장을 치고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얼마전에 아들 발승은은 민녀를 강제로 취했다는 이유로 당형에게 채찍질을 당했고, 양자인 발운(哱雲)등은 당형에게 구금을 당했다. 이제 승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발배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대명을 위해 오십년간이나 목숨을 바쳐 싸웠는데, 지금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실로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제일 첫부분의 장면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발배가 당형에 의해 짓눌려지고 있을 때, 영하의 변방군 보통병사들도 살기가 마찬가지로 힘들어진다.
명나라 중엽 이후, 위소(衛所)의 둔전제도(屯田制度)는 이미 무너졌고, 변방의 둔전은 보편적으로 호족들이 차지해버렸으며, 변방군의 병졸들은 상활이 힘들었다. 조정의 재정마저 고갈되면서, 변방군의 군용자금은 적시에 지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도어사(都御史) 유린(劉麟)은 일찌기 가정제(嘉靖帝)에게 이런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정덕7년에서 가정4년까지, 대동(大同)등 변방군인의 13년의 군용자금이 절반이상 지급되지 못하고 있다."
꼬박 13년, 정말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이다. 영하도 마찬가지로 변방도시로, 자연조건은 더욱 열악하니,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았을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당형이 부임한 후, 병졸들을 보살펴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욱 가혹하게 대한다. 병졸들이 조그만치의 잘못만 저지르면 군법으로 처리하고, 세금과 노역이 조금만 늦어지더라도 곤장을 때렸다.
만력19년말, 당형은 영하의 병졸들에게 만력17년부터 19년까지 밀린 세금을 일시불로 납부할 것을 명한다. 만일 납부하지 않으면 매달의 급여에서 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형은 심지어 병졸들이 겨울의복, 초료(草料)를 살 돈을 고의로 지급하지 않고 미뤘다. 그리하여 군내의 인심이 흉흉해진다. 모두 당형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보통병졸들은 인내하며 참고 있었지만, 잘나가던 발배의 가정들은 그런 괴롭힘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금방 유동양(劉東暘)을 우두머리로 하는 가정들이 반란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유동양은 용맹하고 사나운 사람이고, 가정들 가운데 명망이 높았다.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따른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당형에게 채찍을 맞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발승은을 찾아갔고, 두 사람은 즉시 의기투합한다.
그후 두 사람은 80여명의 동료를 모아서 관제묘(關帝廟)에서 피를 뽑아 맹세하고, 유동양을 우두머리로 내세워 시기를 정해 거병하기로 결정한다.
군대내의 움직임에 대하여 당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뿐아니라, 자신감에 넘치던 그는 망양보뢰(亡羊補牢)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기름을 붓는 행동을 한다.
정월 이십오일, 군대내에서 다시 한번 병졸들이 급여를 지급해달라고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현장은 분위기가 험악했다.
여러 장수들이 속속 당형에게 급여를 지급하여 병졸들을 다독이자고 말했지만, 당형은 막료의 말을 듣고, 병졸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협박하는 것과 같은 나쁜 악습을 절대로 조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장수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군사분야의 1인자인 영하총병(寧夏總兵) 장유충(張維忠)은 사람됨이 유약하여 병사들을 위해 나서지 못했고, 그저 당형의 분부만 따르겠다고 할 뿐이었다.
당형의 이런 행동에 대해, 나중에 반란을 평정하러 온 명군이 성아래 도착하자, 발승은은 성위에서 이렇게 소리친다: "순무가 착취하고 압박하여 군중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으니, 이는 당형이 스스로 죽을 길을 찾은 것이다!" 심지어 만력제(萬曆帝) 주익균(朱翊鈞)조차도 "변방군인의 빈곤과 고통을 순무가 전혀 보살펴주지 않아서 군사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순무는 기껏해야 도화선에 불과하고, 문제의 근원은 역시 대명조정에 있었다.
반란평정에 참여한 감군어사(監軍御史) 매국정(梅國楨)은 이렇게 정곡을 찔러 분석했다:
"홍무제때부터 가정제때까지 몽골이 매년 침범하고, 조정은 매년 방어하였는데, 그때 각군은 비록 전투와 방어에 고생이 많았지만, 군용자금이 지급되지 않는 고통은 없었다. 가정제때부터 융경제때까지 평화협상이 이루어지면서, 군대의 대비가 느슨해졌지다. 각군에서 비록 군용자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힘든 훈련이나 전투는 없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겉으로는 조정과 몽골이 평화롭지만, 실제로는 항상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평화협상을 위해 군용자금을 지급하지 않고 그 돈을 몽골에 지급하고, 전쟁대비한다면서 병사들은 매일 훈련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공을 세우거나 상을 받을 기회는 없다. 조정은 장병을 보살펴주지 않고, 그저 급여를 끊기만 하니, 그들의 생활이 힘들어졌고, 승진은 기대할 수도 없다. 오늘의 화가 일어난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이렇게 하여, 한 차례의 군사정변의 여러 요소들이 뭉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월 이십팔일, 마침내 반란이 일어난다.
분노한 반군은 물밀듯이 관아로 몰려가 소리친다: "변방군인이 무엇을 잘못했느냐. 당형은 그런데도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다. 이건 우리보고 죽으란 말이냐?"
연도의 병사들도 속속 호응하여 반군의 규모는 신속히 늘어나고, 영하의 국면은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
반군은 금방 당형등 영하의 조정관료들을 포로로 잡는다. 그리고 그에게 21가지 죄상을 열거하였고, 당형과 그의 인척인 부사(副使) 석계방(石繼芳)은 함께 처형당한다.
반군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당형의 시신을 해체하여 개에게 먹였다. 총병 장유충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역시 반군에 주살당한다. 두 사람의 수급은 사패루(四牌樓)에 걸려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했다.
순무와 총병을 주살한 후, 반군은 즉시 각 관아의 인신(印信)을 수거하고, 성문을 걸어잠그고 죄수들을 풀어주며, 병사들이 약탈방화하도록 방임한다. 영하성에는 불길이 치솟는다.
영하성을 점령한 다음 날, 유동양은 자칭 총병관이 되고, 발배를 모주(謀主)로 모시고, 발승은과 허조(許朝)를 좌우부총병으로 삼고, 사문수(士文秀), 발운을 좌우참장으로 삼는다. 발배수하의 2천여 가정을 핵심전력으로 하여 명나라조정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반군의 기세가 크고, 여러 아들과 휘하의 가정들이 모두 반군에 가담하자, 혼자 국외인으로 있을 수 없게 된 발배도 할 수 없이 이 반란에 앞장서게 된다.
잘하면 자신이 제2의 이원호(李元昊, 영하를 기반으로 하여 송, 요/금과 삼족정립을 이룬 서하의 창업군주)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외원(外援)
만력20년(1592년) 삼월중순, 섬서 영하진
부총병의 저택내에서 발배는 집안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눈에는 초조와 불안의 빛이 드러났다.
며칠전, 그는 사람을 몽골각부의 수령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지금 그는 몽골의 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몽골의 영장(營帳)내에서는 천아도사부(祆兒都司部)의 수령 착력토(着力兎)는 곰가죽의자에 느긋하게 앉아서 영하의 반군이 보내온 사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발배가 도움을 청한다는 말을 듣고, 착력토는 속으로 기뻐했다. 얼굴은 여전히 굳히고 있었으나, 입가에는 부지불식간에 미소가 드러났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라는 것을 이때 영하로 출병하면, 이득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어서 부족에게 큰 이득이 될 것이라는 것을. 또한 국면을 혼란시켜, 명나라조정과 대항할 자본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생각해본 후에, 착력토는 호쾌하게 발배반군에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응답한다.
영하에서 반란이 발발한 후, 반군은 즉시 사방으로 출격했고, 영하각지에서는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명군을 보면, 반군이 명군장령을 여럿 죽이면서, 영하의 명군은 지휘계통이 마비되었다. 반군의 공격에 명군의 거점이나 영병은 혼란에 빠지거나, 도망치기 바빠서, 하나하나 무너지게 된다.
금방, 반군은 하서에서 옥천에 이르는 47개의 보(堡)를 점령하고, 심지어 황하를 건너 화마지(花馬池)까지 쳐들어가, 섬서가 크게 흔들린다.
비록 처음에는 반군에게 정신없이 당했지만, 일반 명나라 조정이 놀란 와중에 정신을 차리자, 반군을 상대할 힘은 충분했다.
대명의 삼변총독(三邊總督) 위학증(魏學曾)은 신속히 병력을 배치하여, 부총병 이구(李昫)를 영주(靈州)로 보내고, 유격장군은 명사주(鳴沙州)로 보내어 황하를 방어하여 반군이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그는 화마지에 주둔하며 반군을 막았다.
명군이 황하를 건너자, 반군은 자신의 세력으로는 막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속속 후퇴한다. 47보는 모조리 수복된다. 반군은 부득이 영하성으로 돌아가서 지킬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대군이 몰려오자, 발배등 반군의 수령들은 사방을 둘러보다가, 할 수 없이 몽골의 각부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몽골인들은 자선가가 아니다. 착력토등 몽골의 각 부락은 일찌감치 자신만의 계산이 있었다.
영하지구는 동쪽으로 황하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하란산(賀蘭山)에 막혀 있다. 중간은 옥토로 부유하기 그지없었다. 몽골의 여러 부락은 영하의 땅에 대해 오래 전부터 침을 흘리고 있었다. 명영종 천순연간 몽골이 하투(河套)를 점령한 후, 영하는 황하의 동서 양쪽에 끼어있는 쐐기같았다. 만일 영하를 점거할 수 있다면, 동서 하투는 하나로 연결되어 몽골은 더욱 자유자재로 유목할 수 있을 터였다.
하물며 순조롭게 지원군을 얻어내기 위하여, 발배는 영토를 갈라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만일 지원을 와준다면, 나는 화마지에서 중위(中衛)에 이르는 지역을 여러분에게 넘겨서 물과 풀을 가지도록 해주겠다."
광활한 토지에 풍성한 물과 풀, 몽골인들에게는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다음으로, 융경제와 평화협상을 한 이후, 명나라와 몽골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을 멈추고 호시(互市)를 열었지만, 명나라조정은 여전히 오래된 평형지술을 놀고 있었다. 한쪽은 끌어들이고, 한쪽은 탄압하는 것이다. 순의왕등 부락에 대한 호시의 대우와 조건은 천아도사등 부락들보다 훨씬 좋았다. 착력토등은 명나라조정에 계속 불만을 품고 있었고, 사고를 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겨, 비록 위학증이 이미 몽골각부에 반란에 동조하지 말도록 통보하였지만, 발배의 요청을 받자 연수(延綏), 영하, 감숙(甘肅)의 변방외에 있는 몽골각부는 속속 반란에 가담한다. 그중 천아도사부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발배의 구원요청사자가 올 때, 또 다른 몽골부락의 수령 절진황태길(切盡黃台吉)의 처는 착력토에게 가지 말 것을 극력 권유했지만, 착력토는 이렇게 반문한다: "내가 만일 영하를 점거하면, 너에게 매년 화마지에서 그곳의 자원을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 어떠냐?" 이를 보면 몽골인들이 영하를 눈독들인지는 이미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각부에서 출병하자, 전투형세는 급변한다.
착력토는 북부에서 평로성(平虜城)을 맹공한다. 그리고 또 다른 몽골수령 재승(宰僧)은 삼천기병을 이끌고 옥천으로 쳐들어갔다. 명군은 등뒤에서 공격을 당하다보니 영하성을 포위했던 삼만의 병력을 나누어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몽골기병은 기동력이 좋고, 질풍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속속 명군의 식량운송로를 습격한다. 한연거(漢延渠)에서 몽골원군은 발승은과 협력하여 명군의 보급선을 기습한다. 이 전투에서 식량을 실은 수레 200대를 획득한다. 명군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오월에 들어서면서, 날씨가 더워진다. 명군병사들은 외지에서 파견온 것이어서 질병이 만연하고, 게다가 반군과 몽골군이 속속 식량보급선을 공격하자, 국면은 명군에 극히 불리하게 바뀐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명나라조정도 깨닫게 된다. 몽골원군을 해결하지 않으면 영하의 반란을 평정하기 어렵겠다고.
총독 위학증과 감군어사 매국정은 신속히 반란평정전략을 수정한다. 한편으로, 명나라조정은 마찬가지로 돈을 들여 회유하기로 마음먹고, 큰 재물을 주어 몽골각부가 발배를 떠나도록 유인한다. 다른 한편으로, 섬서의 변군을 모아 몽골군을 중점적으로 공격하도록 하여, 명군을 기습하는 몽골의 후방을 친다.
발배의 재력은 당연히 대명과 비교할 수 없다. 금방 지원왔던 몽골각부는 동요하기 시작한다. 갈수록 많은 몽골부락의 수령들은 대명으로부터 이득을 얻은 후,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간다.
다만, 착력토는 야심이 컸다. 국면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한편으로 사자를 명나라로 보내 재물을 요구하면서 명나라를 안심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관망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번 반란국면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는 직접 영하성으로 가서, 발승은에게 이렇게 떠본다: "고성(孤城, 고립된 성)으로 관군을 상대할 수는 없다. 싸우면 필패이다. 차라리 초무(招撫)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발배등은 착력토의 말이라면 모두 따랐다. 그들은 할 수 없이 큰 돈을 착력토에게 뇌물로 주면서, 그로 하여금 명군과 초무에 대해 협의하도록 요청한다. 이 교활한 몽골수령은 명군과 반군의 사이를 오가면서, 양쪽에서 모두 이득을 챙긴다.
몽골인은 욕심이 끝이 없었고, 지나친 욕심에 명나라조정은 분개한다. 그렇게 많은 돈을 주었지만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제 무력을 쓸 수밖에 없다.
칠월 십팔일, 몽골원군의 일부가 연안(延安)등지로 침입한다. 명군은 병력을 보내 막는다. 영수총병 동일원(董一元)은 새외로 나가 몽골의 후방을 친다. 몽골군은 본거지가 공격당하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팔월, 착력토는 그래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정예기병을 이끌고 기습하며 다시 한번 재물을 약탈하고자 한다. 그러나 명나라장수 두송(杜松), 마귀(麻貴)의 부대에 막혀 크게 피해를 입는다.
명군은 각지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한때는 하란산 바깥까지 추격한다. 그렇게 몽골각부락의 기세를 꺽는다. 몽골각부는 진화타겁(趁火打劫)하려다가 오히려 손해보는 장사를 하게 된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착력토마저도 더 이상 계속 변방을 침범하는데 흥미를 잃는다.
이제 몽골군은 철수했고, 다시 들어오지 못했다.
몽골의 지원군을 잃자, 발배의 반군은 고성에 갇히고, 철저히 독안에 든 쥐로 전락한다. 명군은 더 이상 후방이 공격받을 우려가 없어졌고, 이제 반란평정은 시간문제로 된다.
체주(掣肘)
만력20년(1592년) 오월, 북경 자금성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안색이 침중했고, 발걸음도 오지러웠다. 마치 천근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건청문(乾淸門) 밖에 도착하자, 그는 '풀썩'하고 단단한 석판위에 무릎을 꿇는다.
석성은 두 손이 떨렸고, 상소문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면서, 대전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쳤다:
"폐하! 영하의 반적이 지금 극히 창궐하면서, 온갖 나쁜 짓을 벌이는데도 지금까지 평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연유를 따져보면, 여러 장수들이 겁을 먹고 전투를 피하면서 전혀 진취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총독의 권한은 약하기 때문에 삼군을 호령할 수도 없습니다. 신이 간청컨데, 삼변총관 위학증에게 상방보검을 내려 명을 듣지 않는 자는 엄히 처벌하도록 하여 위엄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금 기다렸지만, 대전내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우물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석성은 마음이 조급해져 이를 악물고 다시 보충하여 말했다: "만일 십일내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신의 머리를 베어주십시오, 신은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
석성이 이 정도로 위학증을 적극 밀어주고, 자신의 목숨까지 걸면서 그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 것은 두 사람의 사적인 교분이 있고, 입장이 일치한다는 것 이외에, 더 많은 것은 위학증에 대한 보살핌이다. 왜냐하면 반란평정의 전선에 나가 있는 위학증총독은 확실히 일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만력19년, 당시 66세의 위학증은 다시 나섰고, 조정으로부터 중임을 위임받아 삼변총독이 되오, 섬(陝), 연(延), 녕(寧), 감(甘)의 군무를 장악한다.
부임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영하의 반란이 일어나고, 그 소식은 우레처럼 북경까지 전해져서 북경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병부상서 석성은 분노를 금할 수 없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발배 이 반적. 간이 배밖으로 나왔구나,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마땅히 즉시 병력을 출동시켜 정벌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정의 위엄이 서지 않고, 나쁜 마음을 품을 자들은 겁줄 수 없을 것이다."
이어서, 명나라 조정은 신속히 위학증에게 명을 내려, 영하로 급히 달려가 반란을 평정하고 원흉을 체포하도록 한다.
그때, 대명의 구변(九邊)의 군사대비는 느슨해 있었고, 전량은 부족하고, 국면이 복잡했다. 그러므로 위학증이 신속히 반란을 평정하기는 난이도가 컸다.
병마(兵馬)가 움직이기 전에 양초(糧草)가 먼저 가야 한다. 이건 병력운용의 기본이다. 위학증은 방법을 강구하여 차마관은(茶馬官銀)으로 군용자금을 마련하였다. 군용자금이 충분해지자 장병들의 사기가 높아지고, 군심이 신속히 안정된다.
반란의 연쇄반응을 막기 위해, 위학증은 즉시 군대를 배치하고 신속히 반군의 공세를 억제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일찌감치 몽골각부가 진화타겁할 생각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병력을 모아 변방의 각 통로를 막아 최대한 몽골과 반군이 결탁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위학증의 대응이 적절했기 때문에, 그리고 명나라조정의 원군이 신속히 도착했기 때문에, 반군은 금방 영하성으로 쫓겨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몽골각부의 지원군이 차례대로 물러나자, 명군에 대한 압박은 크게 완화된다.
명군이 많은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다. 위학증은 반군은 이미 철지난 메뚜기로 얼마 더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위학증은 반란평정의 난이도를 너무 쉽게 평가했고, 명군이 영하성을 포위공격하는 전황은 예상외로 치열했다.
명나라때 영하성은 원래 16국시기 하국(夏國)의 개국군주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건설한 성의 기초 위에 수리한 것이다. 당시 서하의 이원호도 이 성을 근거로 칠십만 송군을 막아냈다. 이를 보면 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매번 명군이 맹공을 퍼부을 때, 반군은 영하의 종번 경왕(慶王)을 앞장세워 방패막이로 삼았다. 공성장병들은 투서기기(投鼠忌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군이 여러번 공성전을 벌였지만 매번 병력손실만 입으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위학증이 몇 달이 지나도록 평정하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마침 그때 일본이 조선을 대거 침략하여, 요동의 국면에 졸지에 긴장상태에 빠진다. 내우외환의 열악한 국면을 맞이하여, 만력제는 점차 위학증에 대한 인내심이 고갈되게 되고, 기한을 주면서 반란을 평정하라는 조서를 계속하여 내려보내고 있었다.
황제가 진노하니, 위학증이 받는 압박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학증은 하루빨리 반란을 평정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는 고민도 있었다. 내부의 적수가 왕왕 외부의 적수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법이다.
영하전투에서,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감군어사 매국정은 위학증이 반란을 평정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독 이여송은 명을 받아 영하로 지원을 왔고, 위학증의 반란평정을 도왔다. 출정하기 전에, 명나라조정은 그를 섬서군무제독(陝西軍務提督)으로 임명했다. 이를 보면 조정이 이여송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여송은 영하에 도착한 후, 위학증의 오른팔왼팔이 되려하지 않고, 독단전행하며, 위학증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이여송은 군인집안 출신이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위학증은 비록 삼변총독이고, 관직과 권한이 이여송보다 높지만, 이여송은 그를 무시했다. 자연스럽게 위학증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다.
군대내에 고슴도치가 있으니, 총독의 권위는 크게 깍인다. 각로의 명군장수들도 총독을 무시하게 된다. 위학증의 지휘는 먹혀 들어가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명군의 전투력은 크게 약화된다.
이여송과 비교하면, 감군어사 매국정이 위학증에게 주는 골치거리는 더욱 컸다.
일찌기 명을 받아 영하로 가기 전에, 매국정은 위학증의 지휘능력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했었다. 그는 4번이나 위학증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위학증이 군대를 엄격히 다스리지 못하고, 반란평정에 힘을 쓰지 않는다면서, 조정에 그의 파면을 강력하게 요청한 것이다.
매국정의 탄핵에 대하여, 위학증은 상소를 올려 매국정이 총독의 명령에 따르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두 사람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전선지휘관들 사이의 불화는 위학증의 고민일 뿐아니라, 멀리 북경에 있는 조정에서도 우려하는 사항이었다. 다만 위학증은 이전에 전투에서의 공적이 있고 게다가 병부상서가 그를 보증하고 있으므로, 만력제는 결국 위학증에게 반란평정의 총지휘를 맡기기로 결정한다. 걸림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조정은 위학증에게 상방보검을 내려,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황제의 조서가 내려오고, 위학증이 상방보검까지 받게 되자, 이여송과 매국정도 조금은 고개를 숙인다.
아군측의 걸림돌문제를 겨우 완화시키자, 위학증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영하성을 함락시키는 전략을 짜는데 집중한다. 이 해자는 깊고 성벽은 높은 견고한 성을 어떻게 넘을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위학증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낸다. 물을 병사삼아, 수공으로 성을 잠기게 하는 것이다.
영하성은 동북쪽이 저지대이다. 만일 이곳에 제방을 쌓고, 황하를 뚫어 황하물을 끌어들여 성안으로 보낸다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수관성(决水灌城)방안이 신속히 병부로 올라간다. 석성은 이 계책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영하성내에는 무수한 백성들이 남아 있으므로 수공을 펼치게 되면 생령이 도탄에 빠질 것이다. 그리하여, 석성은 먼저 결사대를 보내 성으로 들어가서 적군에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만일 반군이 그래도 항복하지 않으면 그때 수공을 취하는 쪽을 선호한다.
그리하여 석성은 위학증에게 서신을 보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 만일 반역의 우두머리를 잡을 수 있다면, 몇명만 처형하고 이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다."
위학증은 이미 제방을 쌓아, 황하의 물을 끌어들이도록 명을 내렸지만, 역시 무고한 백성들을 희생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결국 황하의 제방을 터뜨리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위학증은 석성의 건의에 쫓아 반군을 초무해보기로 한다.
그러나, 반군의 수뇌들은 이번에 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무를 받아들이더라도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모두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정한다. 위학증이 여러번 사람을 성안으로 보내 초무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위학증의 초무방안에 대해 만력제는 수치로 여긴다. 그리하여 조서를 내려 질책한다:
"위학증은 여러차례 겁많고 무능한 장수들에 의존하여, 반적의 계책에 말려들었으니, 실로 조정의 신임과 당부를 위배한 것이다. 이 초안(招安)의 건은 가볍게 믿어서는 절대 안된다. 만일 더 이상 시간을 지연시키고, 일을 그르친다면, 크게 처벌받게 될 것이다."
황제의 불만정서를 모두 보았다. 매국정의 위학증에 대한 탄핵도 다시 활발해진다.
칠월, 여러번 탄핵상소를 올렸으면서, 매국정은 다시 극히 악독한 말로 위학증을 탄핵한다:
"장수들의 용병이 아이들 장난만도 못하다. 그들의 첩보는 모두 거짓이다. 조정에서는 하루빨리 위학증을 파면해야 한다. 신은 실로 반란군들이 횡행하는 것을 더 이상 참고 볼 수가 없다. 전선의 용병이 이 지경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영하의 반란이 오랫동안 평정되지 않자, 황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한다. 매국정의 탄핵상소 및 과도언관의 탄핵하에서 위학증의 임기는 끝나게 된다.
칠월하순, 명나라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보낸다: "영하에서 화란이 일어나고 장병을 잃었으며, 사태해결이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지금 반적이 오랑캐를 끌어들여 침범하여 잔혹하게 백성들을 해치고, 식량보급선을 끊었다. 이런 것은 모두 전 삼변총독 위학증이 범한 욕국(辱國)의 죄이다." 위학증은 문책받아 체포된 후, 경성을 끌려간다.
이런 처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설마 위학증의 능력이 부족하여,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 할 것인가?
기실 그렇지만은 않다.
금의위(錦衣衛)가 위학증을 총사령관의 군장에서 끌어낼 때, 삼군장병들은 모두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영하반란이 평정된 후, 후임자인 섭몽웅(葉夢熊)은 급히 조정에 상소를 올려, 위학증의 영하전투에서의 공은 크다고 말하면서, 조정에 그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청한다.
더욱 생각지 못했던 일은 위학증이 낙마한 후, 그를 탄핵하는데 앞장섰던 매국정도 그를 용서해줄 것을 청한다. 자신이 탄핵했던 일을 후회한다면서, 만일 위학증이 오명을 벗지 못하면 자신은 후세인들에게 욕을 먹게 될 것이라고 한다.
황제가 간섭하고, 당쟁이 끊이지 않고, 장수는 발호하며, 병력과 물자는 부족하다....전투총지휘관으로서, 위학증의 처지는 바로 명나라말기 여러 장수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후 웅정필(熊廷弼), 손승종(孫承宗), 원숭환(袁崇煥), 홍승주(洪承疇), 노상승(盧象昇), 양사창(楊嗣昌)등이 모두 그의 전철을 밟는다.
위학증이 파면되면서, 명나라 조정은 즉시 지휘관을 교체하고, 영하반란평정의 중임을 섭몽웅의 어깨에 지운다.
난상(亂殤)
만력20년(1592년) 칠월 이십사일, 섬서 영하진
영하성밖에서 하늘에 검은 구름이 피어올랐고, 마치 바로 물을 짜낼 수 있을 것처럼 뭉쳐 있었다.
섭몽웅은 갑옷을 입고, 높은 누대에 올라갔고, 아래에는 장병들이 운집해 있었다. 칼과 창이 내뿜는 차가운 기운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강력했다. 손에 상방보검을 들고 팔을 쳐들면서 소리쳤다. 그의 호령은 바람을 뚫고 사람들의 귀를 멍하게 만들 정도로 컸다:
"삼군은 명을 들으라! 오늘이 바로 적을 무너뜨릴 때이다!"
위학증이 면직된 후, 명나라조정은 섭몽웅으로 하여금 직무를 대행하게 한다. 전선의 장수들이 불화한 선례에 비추어, 조정은 과감하게 그에게 상방보검을 내리고, 생사여탈권을 부여한다. 또한 이여송등 장수들에게 지시에 따를 것을 엄명하고, 매국정에게는 병권에 간섭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하여 섭몽웅은 고도의 자주지휘권을 부여받게 된다.
조정의 신임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전철이 있으므로, 무거운 압박 속에서, 섭몽웅은 전혀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만일 하루빨리 영하성을 점령하려면, 수공밖에 없다는 것을.
총사령관의 격려하에 명군장병들은 사기가 크게 오르고, 모두 용감하게 전투에 앞장선다. 개미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위공성한다. 얼마 후, 명군은 이미 만들어 놓은지 오래된 제방을 터트린다. 황하의 물이 맹수처럼 밀려들어갔고, 순식간에 영하성의 여장(女墻, 성에 추가해놓은 부분)을 무너뜨린다.
팔월초하루에 이르러 외성의 사방은 모두 물이다. 큰 물이 이미 내성벽의 8,9척 높이에 이른다. 곧 내성벽이 무너질 상황이었다. 반군은 부득이 밤에 배를 타고 제방의 명군을 공격한다.
그러나, 명군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고, 이 번투에서 반군은 무수히 많은 사상자를 낸다. 다음 날, 동서의 내성벽이 무너지는다. 영하성은 함락이 다가왔다.
영하성내의 반군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다.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명군은 공성을 하면서, 이간계를 펼친다. 반군의 두목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도록 유도한 것이다.
매국정은 먼저 사람을 보내 성안의 발승은을 회유한다: "어사대인은 발씨가 이전에 세운 변방을 지킨 공로를 생각하여, 지금 무명소졸들과 함께 주살당하게 된다면 실로 안타깝다고 여긴다."
이어서, 사자는 유동양을 찾아가서 만나 이렇게 권유한다: "장군은 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번 반란에 가담했습니까.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이라면, 심시도세해야 합니다. 화를 복으로 바꾸셔야 합니다."
이렇게 이간계를 펼치는 동안에 섭몽웅은 명군으로 하여금 항복을 권유하는 문서의 납환(蠟丸)을 계속하여 성안으로 쏘았다. 반군은 상하간에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고, 군심이 동요하게 된다.
결국 반군내부에서 살륙이 시작된다. 먼저 유동양이 사문수를 죽인다. 며칠 후, 발승은이 유동양과 허조를 제거한다. 반군이 내부투쟁에 빠진 틈을 타서, 구월 십칠일, 명군은 떠오른 시신을 밟고 영하내성으로 진입한다. 발배 부자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바닥에 엎드려 고분고분하게 투항한다.
그러나, 발배 부자의 항복서는 조정의 용서를 받아내지 못한다. 섭몽웅은 순식간에 발승은을 체포하고, 발배의 저택을 포위한다. 발배는 절망에 빠져 자결하고, 가족들도 모조리 불을 질러 죽는다.
그후 섭몽웅은 수중의 상방보검을 휘둘러 포롤 잡힌 반군 가정을 모조리 참살한다. 그리고 그들의 수급을 쌓아 경관(京觀)을 만든다. 감군어사로서, 매국정은 이런 조치에 극히 불만을 가진다. 그러나 잔혹한 현실을 바꿀 힘은 없었다.
그후 백골과 혈육으로 쌓아올려진 "승리비(勝利碑)"는 하란산의 자락에서 청회색의 인광을 내뿜고 있었고, 전쟁의 잔혹함과 야만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군은 나쁜 짓을 많이 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안에서 원래 조용하게 생활하던 백성들은 반군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도탄에 빠져버린다. 심지어 무고하게 죽기까지 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란이 발생한 후, 경번(慶藩)의 종실을 붙잡는 것이 반군행동의 제일차목표였다. 경번 진원왕(鎭元王) 주신선(朱伸𩀈)은 얼마 되지 않는 왕부 호위병력을 모아, 발배를 기습하여 반란을 평정하려고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만다. 분노와 수치를 느낀 반군은 분노를 왕부의 사람들에게 푼다. 경왕비는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칼을 꺼내 자결하고, 전체 왕부의 남녀노소는 모조리 도륙당한다.
황족마저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으니, 일반백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반란이 발발한 후, 유동양이 비록 반군의 약탈을 금지했으니, 이미 미쳐버린 반군병졸들의 성안에서의 온갖 악행은 그치지 않았다.
군기빠진 병졸들이 백성들의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여자들을 북루에 모아서 간음하는 일이 벌어진다. 금방 명군이 영하성을 포위하고 영하성은 양식과 풀이 끊기면서 반군은 다시 성안에서 양식을 긁어모은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더더욱 살길이 막막해진다.
얼마 후, 몽골과 결맹하기 위해, 반군은 성안의 여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몽골 각부락에 보낸다. 일시에 영하성내에서는 가가호호 처와 딸과 헤어지는 장면이 벌어지며, 곡성이 하늘을 울린다. 많은 여자들은 능욕을 참자 못하고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어 자결한다.
명군이 황하의 제방을 터트려 수공을 진행한 후, 영하는 이미 물바다가 된다. 성안의 주택은 속속 무너지고, 백성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그러나 반군은 백성들이 내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엄금했고, 그리하여 많은 백성들은 익사당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안에는 날로 양식이 부족해지고, 반군은 마필을 죽여서 먹었다. 백성들은 그저 나무껍질, 가죽신을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랬다. 굶어죽고, 병들어죽고 자살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어찌어찌 명군이 성을 함락시킨 날까지 버티면서 살아남은 백성들은 이제 악몽이 끝났다고 여겼지만, 누가 알았으랴. 명군장병들도 성으로 진입한 후 대거 재물을 약탈하고 사방에서 방화살인을 저질렀다.
섭몽웅이 발배의 수급을 들고 개선할 때, 영하성밖의 백골무덤에는 반군의 시신도 있지만, 무고하게 죽은 백성들의 유해도 있었다.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에 들어가는 중대한 승리가 대명에게 남긴 것은 만싱창이의 영하뿐만이 아니라, 메우기 힘든 국가재정이 구멍이었다.
발배의 난은 8개월간 지속되면서 백은 200여만냥을 소모했다; 이어서 임진왜란 7년간 진행되면서 백은 700여만냥을 소모한다; 그후 파주의 난(播州之亂)으로 다시 2,3백만냥을 소모한다.
삼대정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대명의 재정은 돌연 붕괴에 직면한다. 여러가지 잠복해 있거나 원래 출현해야하지 않았을 문제들까지 도미노효과처럼 집단적으로 폭발한다. 밀어닥치는 사태에 대명제국으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고, 이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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