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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 월에....
寶海/ 유 희 민
(제1장)
* 안평대군의 송설체 *
* 안평대군의 송설체 *
1988년 8월 20일. 충무팀 사무실이 바쁘게 움직였다.
몽유도원도를 포함한 일본 덴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던 모든 고미술품이
다음날인 8월 21일 오후 두시에 부산에 있는 김해 공항으로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정확히 전시하기 하루전날 모든 작품이 한국에 들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의외였다.
서울의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올 것으로 알았던 우리의 예상을 깨고
미술품을 실은 화물은 부산의 김해공항에 도착 하는 일반 여객기가
아닌 화물기로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충무팀에서 보유하고 있는 탑차는 모두 세대였다.
그리고 전후에서 호위할 승합차와 승용차 한 대를 포함해 모두
다섯 대의 차량이 움직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차량을 운전할 충무팀 직원만도 다섯 명 그리고 쌍식이 형님을 포함한
경호 직원 열 명, 모두 열다섯 명의 직원을 투입 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다.
“빌어먹을 새끼들....”
쌍식이 형님이 푸념하듯 욕을 했다.
회의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날 보면서 몇 마디 더 했다.
“개새끼들..... 하다못해 몇 일전에라도 연락을 줘야지.
꼭 하루전날 이렇게 바쁘게 지랄을 하는지 모르겄다.
여작 연락이 없어서 내일 오겠다 짐작은 했다만.....”
철저한 일본사람들은 오는 날자 까지도 끝까지 비밀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그들의 조심스러움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그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하세요. 쪽바리 새끼들 원래 좀 그렇잖아요. 소심하고....”
“이해 안하믄 또 어짜겄냐? 할수 없제. 근디 우상이 니는 어짤래? 구경삼아 내려가 볼래?”
“아닙니다. 전 여기 있을게요. 제가 가면 괜히 자리만 좁습니다. 일본에서도 사람이 나올지 모르는데....”
“그랑께 승합차 한 대를 더 가져 가잖냐.
후방경호를 해야 한께... 그라믄 니는 사무실에서 연락 받고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갔다 와서 보고를 하마. 낼 새벽에 여그서 출발 해가꼬
부산 갔다가 박물관 퍼주고 오믄 한밤중 되겄다.
박물관 물건 퍼 줌서 니한티 연락을 하마.”
“예. 그렇게 해 주세요. 너무 서두르지는 말고.”
“아니여. 사람을 경호 할 때는 더러 휴게소도 들리고 하는디...
탑차가 움직이믄 그랄 수가 없어.
그 안에 돈이 들었건, 돌멩이가 들었건 무조건 목적지 까지
쉬지 말고 가브러야 안전한께 쉴 수가 없제.
그것도 불안해서 탑차안에 사람이 두 사람 앉아 있는디 쉬엄쉬엄 올수가 없제.
나는 괜찮은디.... 탑차안에 있는 놈들은 또 얼마나 지겹겄냐?
물건 실었다 싶으믄 곧바로 사이렌 울림서 목적지로 가브러야
그것이 지데로된 호송 업무가 되블제.
그랑께 부산서 밟아블믄 여그 오믄 여섯시나 일곱시 되븐다.
그때 봐서 같이 식사나 하자.”
“예.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갔다 와서 술 한 잔 하자. 나도 니한티 무슨 소리든지 좀 듣고 싶기도 하고.”
“특별히 하실 말씀 있으세요?”
“왜 없겄냐? 인자 니가 말한 그 그림이 한국까지 왔는디.....
도통 무슨 계획을 말을 안한께 깝깝해서 그란다.
인자 이정도 되믄 니 입에서 뭐라고 한마디 할 것도 같은디.....”
나도 쌍식이 형님의 답답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쌍식이 형님의 궁금증을 풀어줄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내가 기삼이 에게 받은 마지막 부탁은 전시회 이틀째 되는 날
우석이와 함께 관람을 하라는 것이 전부 이었다.
나는 그 부탁에 충실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일단 다녀오세요.”
“그래 좀 늦더라도 사무실에 있어라.
“박물관에 도착 하믄 물건 내리는건 아그들 한티 맡겨놓고
나는 먼저 올랑께 그렇게 알고 사무실에 있어라.”
“예. 그렇게 하죠.”
700호실이 폐쇄된 이후로 나는 다시 충무팀 사무실로 복귀했다.
여전히 기삼이는 민변에 깊숙이 관여 하면서 인권 변호사로서의 준비를 쌓아 가고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 개업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사무실을 열어 줄 수 있는데도
그는 사무실에 관한한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 계획에 아직은 변호사 사무실을 개소해서
판을 벌려야 하는 시기는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몰랐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해 보긴 하지만 여전히 농담 같은,
그리고 고승들의 선문답 같은 소리만 할 뿐이었다.
몽유도원도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답답한 심정에 말을 꺼낼 때마다 ‘임마 이제 넌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앞으로 네놈이 할 일은 어떻게 하면 친구인 나를 먹여 살리느냐 그런 것만 연구하면 된다.
제주에서 농사를 짓던지 아니면 충무팀에서 터를 잡든지
네놈이 나를 먹여 살리는 게 이제 앞으로 네가 할 일이다.’ 그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그림이 한국에 왔다.
몇 년을 두고 벼르고 벼렸던 그림이 한국에 왔는데도 그에게 연락이 없었다.
답답한 심정에 내가 그에게 삐삐로 연락을 해 봤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안기부에 사직서를 제출한 이후에 난 그의 직장 번호를 알 수 없었다.
오로지 그가 가지고 다니는 삐삐에 의존해서 연락을 하곤 했지만
그는 나의 정신세계를 알기나 하듯 큰 줄기의 대세를 가름할 일이 아니면 연락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정치적인 이슈가 정체상태로 머물러 있던 1988년의 여름 상황이
그를 좀 쉬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언론은 여전히 올림픽에 대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1948년 제헌헌법을 시작으로 6.29선언 이후의 역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로
제9차 개정이 이루어 졌음에도 헌법재판소의 기능은 여전히
사법부의 독립적 힘을 발휘 하기는 역부족 이였다.
이전의 정부에서 유명무실 하게 기능했던 헌법위원회의 재판(再版)이 될 것이라든지,
대법원의 사생아로서 반쪽 역할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일반적 이였다.
그러나 여당 의원들은 끈질기게 이 기능을 살리려고 노력했고 많은 문제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이런 문제를 제기 하곤 했었다.
언론은 교묘히 국민들의 시선을 올림픽과 연관된 스포츠와 그리고 오락성 프로에
국민의 시선을 돌렸다.
이라크 정권이 자국 국민 쿠르드족을 5천 명 이상 학살한 내용을 간단히 소개 하는 반면
맥가이버 라는 프로를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로 옮기는 따위의 방법과
문화 예술지의 홍보나 일본의 잔혹상을 알리는 ‘소설 마루타’ 따위의 흥행에 국민의 관심을 돌렸다.
여당의 큰 틀 안에서의 양보가 있었던지 올림픽이 치러지기 한 달 남짓한 1988년의 8월은
큰 작전을 뒤로 미루어 놓은 듯 조용한 형국이었고, 그런 와중에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가부끼 공연과 그리고 동남아 고미술전(일본 소장품 전시회)이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몽유도원도를 포함한 일본의 고미술품들이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항공 스케줄을 보내 왔던 것이다. 그것도 전시회 하루 전날 물건을 한국에 도착 시킨 것이다.
오늘밤부터 밤새 그것들을 전시실에 배치하고 내일 아침부터 당장 전시를 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그들은 일본인 자신들의 유산으로 착각하는 그들의 유산을 오랫동안
한국에 머무르게 방치 하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가끔씩 우상이가 분노 하는 것은 두 가지 였다.
그런 문화유산을 마치 일본의 문화재처럼 우기는 일본인들 이였고,
우리 것을 지키지 못한 한국의 학자들 이였다.
어쩌면 개발도상국에서의 국가가 지향하는 경제 발전에 모든 것이 묻혀 지나가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현상 이였는지도 몰랐다.
꼭 학자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쌍식이 형님을 직접 호송 책임자로 보내고 나서도 나는 맘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호송 당일은 초조한 심정으로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보냈던 것 같다. 호송 자체는 그렇게 중요 하지 않았지만
호송에 관한 일본인들의 경호 상태나 그 분위기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세심한 일본인들은 그런 물건을 그냥 비행기로 보내고 모든 걸 박물관 측에
일임 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밤 시간이 되어서야 전화도 없던 쌍식이 형님과 김 부장이 사무실로 불쑥 들어 왔다.
“벌써 다 끝 마쳤어요?”
“설명할라믄 복잡타. 나가서 밥이나 묵음서 이야기 하자.”
“그래요. 그런데 너무 빨리 끝난 것 같은데요?”
“긍께 나가서 술이나 한잔함서 이야기 하잔께.”
말없이 빙긋이 웃고 있는 김 부장에게 내가 눈길을 돌렸다.
‘뭐가 먹고 싶으냐?’ 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김 부장도 역시 눈치가 있는 사내다.
“사장님. 내 눈치 보지 말고 암데나 갑시다. 쌍과부집 가까라?”
“그럼 그렇게 하죠. 여기서 가깝기도 하고, 홍어 생각도 나고.... 형님 그렇게 하시죠?”
“그라자. 그 집도 한번 팔아 주기는 해사 쓸랑갑다. 안 그래도 한 번씩 전화 오고한께....”
홍어 자체가 대단한 별식은 아니지만 목포 사람들은 이상하게 음식 하나로
의기투합하는 묘한 감정이 있었다.
특히 홍어가 그랬다.
영남지방에서 즐겨 먹지 않는 음식이기도 했지만 홍어 이야기만 하면
마치 그걸 먹지 않으면 그 지방 사람들에게서 소외당할 것 같은 그런 음식이 홍어 이었다.
홍어를 먹자는 이야기에 세 사람은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리고 김 부장은 앞장서서 그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 했다.
여전히 식당은 밤손님들로 북적 거렸고 이제 서울 사람들도 홍어의
그 메케하고 톡 쏘는 암모니아 냄새에 그렇게 거부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것 같았다.
서울사람 전체는 아니지만 최소한 쌍과부집을 찾는 손님들은 이제
그 맛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들어서자마자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다.
첫댓글 성큼다가온 가을.... 조석으로 쌀쌀합니다....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한 휴일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