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군사단체로, 1938년 10월 10일 한구(漢口)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조직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당시의 병력은 1백여명이었고, 2개 구대(區隊)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후 대원들이 점차 증가하여 3백여명을 헤아렸고, 부대편제도 대본부(隊本部)와 3개 지대(支隊)로 편제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직후부터 각 지대 단위로 중국 각 전구(전구)에 배속되어 중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1941년 초에 제1·2지대를 중심으로 한 대원들 대다수가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중경에 남아있던 대본부는 1942년 7월 조선의용대를 개편하는 형식으로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활동과정에서 조선의용대는 대본부 및 각 지대에서 각각『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동방전우(東方戰友)』·『전고(戰鼓)』·『전강(戰崗)』·『내외소식(內外消息)』·『화중통신(華中通訊)』·『강남통신(江南通訊)』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과『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는 조선의용대에서 펴낸 기관지이자 선전지였다. 이는 순한문본으로, 대본부에서 발행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25일 한구(漢口)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광서성(廣西省) 계림(桂林)으로 이동하였고, 동령가(東靈街) 1호에 대본부를 두었다. 대본부에서는 1939년 1월 21일『조선의용대통신』이라는 제호로 창간호를 발행하기 시작, 이후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는 시기까지 모두 42기(期)를 발행하였다. 창간호부터 제27기(期)까지는 순간(旬刊)으로, 제28기부터는 반월간(半月刊)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월간 또는 그 이상의 부정기적으로 간행된 경우도 있다. 그리고 1940년 3월 대본부가 중경(重慶)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제호를『조선의용대』로 바꾸었다. 1940년 5월 1일 발행된 제34기부터『조선의용대』라는 칭호로 발행된 것이다. 그러나 기수(期數)는 그대로 계승하였고, 창간호인 제1기부터 제33기까지는『조선의용대통신』으로, 제34기부터 종간호인 제42기까지는『조선의용대』라는 제호로 발행되었다. 발행된 42호 중 제1·2·4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해지고 있다.75) 이외에 대본부에서는『전고(戰鼓)』·『동방전우(東方戰友)』등을 발행하였던 것 같다.『동방전우』는 계림의 시가원(施家園) 32호에서 발행되었다는 사실과 1941년 8월 16일자로 발행된 제31기의 표지와 목차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76)
조선의용대에서는 대본부 뿐만 아니라, 각 지대 및 분대에서도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제1지대 본부에서는『전강(戰崗)』을, 제1지대 제3분대에서는『내외소식(內外消息)』과『화중통신(華中通訊)』을, 2지대에서는『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란 제호하에 한수판(漢水版)(제1분대)·황하판(黃河版)(제2분대)·화북판(華北版)(제3분대)을, 그리고 제3지대에서는『강남통신(江南通訊)』을 각각 발행하였다고 한다.77) 이것들은 모두 발행사실만 확인된다. 이와 같이 조선의용대의 대본부와 지대에서 각각 잡지를 발행한 것은 창설 직후 중국 각 전구(戰區)로 분산 배속되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중경(重慶)에서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결성한 군사조직이다. 전지공작대는 성립 직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일본군 점령지역인 화북지역을 대상으로 초모공작을 전개하였고,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을 설치하여 초모해 온 청년들을 훈련시켜 대원으로 편입하였다. 그 결과 1940년 말에 이르러 1백여명의 대원을 확보한 무장조직이 되었다. 독자적인 무장조직으로 발전하던 전지공작대는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1941년 1월 광복군에 편입, 제5지대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활동과 관련하여『한국청년(韓國靑年)』이란 잡지를 발간하였다.
『한국청년(韓國靑年)』은 서안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기관지로 발행된 잡지이다. 순한문본이고, 한국청년월간사(韓國靑年月刊社) 명의로 발행하였다. 1940년 7월 15일 제1권 제1기가 발행된 이래 제4기까지 발행되었다. 제1권 제1기와 제4기는 그 내용의 일부가 번역되어 전하고 있으며, 제3기와 제4기는 원본 그대로 영인되었다.78)
3)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된 군사조직이다. 창설 직후 광복군 총사령부는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이전하였다. 이를 거점으로 화북지역을 비롯한 중국대륙 각 지역에 공작원들을 파견, 초모활동을 전개하면서 병력과 활동범위를 확대시켜 갔다. 그 결과 지휘부인 총사령부를 비롯하여 단위부대로 3개 지대를 갖춘 군사조직으로 발전하였고, 중국군 및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공동 작전을 추진하였다. 광복군에서는 서안에서 활동을 개시하면서부터 광복군 창설 및 초모공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하였고, 이를 위한 잡지로『광복(光復)』을 발간하였다. 이외에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서 활동하던 제3지대에서도『선봉(先鋒)』을 발간하고 있었다.
『광복(光復)』은 서안(西安)에서 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가 발행한 잡지이다. 1941년 2월에 창간되었고, 국한문본과 순한문본의 두 종류로 발행되었다. 발행은 총사령부의 정훈처에서 담당하였다. 정훈처장 조경한(趙擎韓)의 책임하에 선전과 직원들이 실무자들이었다. 편집은 사천(四川) 사범대학 출신인 김광(金光)이 전담하였으며, 원고작성과 번역 등의 일은 지복영(池復榮)·오광심(吳光心) 등 여군들이 담당하였다.79)
『광복』은 일종의 선전지였다. 국한문본의 창간사에서는 그 발행목적을 "광복군의 사업진행과 임무를 제(諸)동지동포에게 선전하는 동시에 우리 혁명의 정확한 이론·전략·전술을 연토(硏討)하고저 한다"고 하여, 광복군의 활동상과 임무를 동지동포들에게 알리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적 후방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순한문본은 중국인을 대상으로 발행한 것으로, 중국민중에게 한국혁명의 내용 및 이론을 충실히 소개하고, 한중 민중의 항일정서 환기 등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80)
『광복』은 그 일부가 자료로 수집·영인되었다. 국한문본은 제1권 제1기만 전해지고 있다. 순한문본은 제1권 제1·2·3·4기 및 합간으로 된 제5·6기, 그리고 제2권 제1기 등 6종이 있다.81) 국한문본은 창간호만 남아 있지만, 순한문본과 마찬가지로 계속 발행되었다고 한다.
7. 기 타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발행주체가 분명하지 않거나, 또 어디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것, 그리고 발행사실만 확인되는 많은 신문 잡지들이 있다. 이것들을 기타로 한데 묶어서 발행된 시대순으로 정리 소개한다.
『태동신보(泰東新報)』는 상해에서 상해연회(上海聯會)가 발행한 신문이다. 상해연회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으며, 1909년 2월에 제1호만 발행되고 중단되었다고 한다.82)
『신광(晨光)(새벽빛)(The Morning Light News)』은 일제 정보자료에서 그 발행사실이 확인되는 것으로, 제1호의 내용 일부가 일문(日文)으로 번역되어 있다.83) 이에 의하면『신광』은 북경(北京)에서 신광사(晨光社) 명의로 발행된 주간신문이고, 1920년 12월 28일 제1호가 발행되었으며, 순한문본의 활자판으로 4면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발간취지는 조국독립·한중연결·사회개조·문화발전 등을 표명하였고, 북경의 등시구(燈市口) 곽기운도서국(郭紀雲圖書局)이 통신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앞에서 소개한『진단(震壇)』의 연락처이기도 했다.
『천고(天鼓)』는 북경에서 신채호(申采浩)가 주관하여 발행한 잡지이다. 1921년 1월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월간(月刊)으로 제7호까지 발간되었다고 하나, 현재 창간호만 전한다.84) 신채호는 1920년 4월 이래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보합단(普合團)·다물단(多勿團) 등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통일회의를 발기하여 분산된 독립군단체의 통일을 도모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천고』는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김창숙(金昌淑) 등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발행한 잡지였다.
『한민성(韓民聲)』은 천진(天津)에서 활동하던 한민회(韓民會) 선전부(宣傳部)에서 발행한 신문이다. 일제 정보보고자료에 "한민회(韓民會)는 그 본부를 불국조계(佛國租界)에 두고, 동조계(同租界) 대길리(大吉里) 사무소 김응순(金應淳) 집에서『한민성』등사판 인쇄물 약 400부를 인쇄하여 북경·상해·각 방면의 선인(鮮人)들에게 발송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제2호가 일본어로 번역·첨부되어 있다.85) 제2호의 발행일자는 1921년 12월 10일이고, 국한문혼용의 등사판으로 8면이었다고 한다.
『도보(導報)(앞잡이)』역시 일제 정보자료에서 보이는 것으로, 북경(北京)에서 발행되었다고 한다. 1925년 10월 1일에 제21호, 12월 21일에 제24호가 발간된 사실이 확인되며, 발행인은 주계훈(朱啓勳)으로 나타나 있다.86)
『독립정신(獨立精神)』은 상해에서 독립정신사(獨立精神社) 명의로 발행된 것인데, 발행주체는 분명치 않다. 1925년 12월 15일과 18일에 제2호와 제3호가 발간되었고,87) 통신처는 상해 법계(法界) 망지로(望志路) 영길리(永吉里) 26호로 되어 있다.
『혁명운동(革命運動)』은 광동성 광주(廣州)에 있는 유오한국혁명동지회(留奧韓國革命同志會)에서 발행한 것으로, 발행사실만 전하고 있다. 유오한국혁명동지회는 1926년 6월 광주(廣州)지역의 한인들이 이념·정파를 초월하여 조직한 단체이고, 김성숙(金星淑)과 장지락(張志樂)이 주필과 부주필이었다고 한다.88)
『독립공론(獨立公論)』은 발간사실만 확인되는 것으로, 남경(南京)에서 독립공론사(獨立公論社) 명의로 발행되었다고 한다. 일제 정보자료에 제2기가 1936년 8월 25일자로 발행되었다는 것과 그 내용의 일부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다.89)
『항전시보(抗戰時報)』역시 발간사실만 확인되며, 중한청년연합회(中韓靑年聯合會)에서 발행하였다고 한다. 일제 정보자료에 1937년 10월에 제1호가 발간된 사실과 제1호와 제2호의 내용 일부가 번역되어 있다.90)
8. 맺음말
1910년대부터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를 범위로 하여, 중국관내지역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발행되었던 신문 잡지들을 조사 정리하였다. 정리된 내용들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우선 중국관내에서 발행된 신문 잡지들은 모두 74종이 조사되었다. 이 중에는 실물자료로 전하는 것도 있지만, 발간사실만 확인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신문 잡지들은 중국관내의 전지역에서 발간되고 있다. 발행지역을 확인할 수 없는 10종을 제외하고, 지역별 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상해(上海) : 26, 북경(北京) : 9, 남경(南京) : 9, 중경(重慶) : 9, 광주(廣州) : 3, 천진(天津) : 2, 계림(桂林) : 2, 서안(西安) : 2, 그리고 한구(漢口)·항주(杭州)·부양(阜陽)에서 각각 1종이 발행되었다. 이것은 중국관내 중에서도 어느 지역이 독립운동의 중요 활동무대였는지를 파악하는 주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중국관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 및 단체들에서는 대부분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발행주체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임시정부 및 그 계열 : 10, 반(反)임시정부 계열 : 3, 공산주의 계열 : 9, 무정부주의 계열 : 5종이다. 그리고 1930년대에 활동한 독립운동 정당 및 단체들에서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 6,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 6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 3,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과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에서 각각 1종을 발행하였다. 또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에 결성되어 활동한 군사단체들에서도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 8,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 1, 한국 광복군(韓國光復軍) : 2종을 각각 발행하고 있었다. 이외에 20년대 중반의 민족유일당운동과 관련해서도 4종이 발행되었다.
시간적으로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초부터 시작하여, 1945년까지 신문 잡지들이 계속 발간되고 있었다. 1909년에『태동신보(泰東新報)』가 발간된 적이 있으나, 그 시점은 1919년 초부터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중국관내에서의 독립운동은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신문 잡지의 발행을 연도별로 정리해 보면, 1920년대 : 31, 1930년대 : 31, 1940년대 : 11종이 발간되었다. 1940년대가 5년 정도의 기간이었음을 감안하면, 연대별로 큰 차이가 없다. 이는 중국관내의 독립운동이 시간적인 굴곡 없이, 1920년대부터 해방 때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또 가장 많은 호수를 발간한 것은『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와『독립신문(獨立新聞)』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모두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것이다. 전자는 1919년 9월부터 시작되어 1923년 1월까지, 그리고 1924년 9월부터 다시 시작하여 1944년 12월까지 발간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후자는 1919년 8월부터 1925년 11월까지 모두 189호, 그리고 1943년 6월에 복간되어 7호가 발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중국관내지역에서는 조사된 것만도 74종에 이를 정도로 적지 않은 신문 잡지들이 발간되었다. 하지만 이중에서 부분적으로라도 영인(影印)된 것은 13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외에 일제 정보보고자료에 그 내용의 일부가 번역 수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발간사실만 확인되는 정도이다. 이 신문 잡지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단체나 당사자들이 발행한 것으로, 이 지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더 없이 귀중한 1차 사료가 된다. 일제의 정보자료가 독립운동사 연구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들 자료의 수집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 관련 신문 잡지
*주 석*
*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이 논문은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韋庵張志淵先生記念事業會)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음.
1) 김영범(金榮範)의「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간행(刊行)『광복(光復)』의 독립운동론(獨立運動論)」(『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집, 1987), 정진석(鄭晉錫)의「상해판 독립신문(獨立新聞)에 관한연구」(『산운사학(汕雲史學)』4, 1990), 박환의「1920년대 재중한국인(在中韓國人)의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과『탈환(奪還)』의 간행(刊行)」(『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滿洲韓人民族運動史硏究)』, 일조각, 1991)이 대표적인 연구업적이다.
2) 이러한 작업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국가보훈처가 주도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광복(光復)』·『진광(震光)』·『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 通訊)』을 수집하여 이를『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韓國獨立運動史資料叢書)』제1집과 제2집으로 영인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신한청년(新韓靑年)』·『한민(韓民)』·『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 通訊)』을 수집하여 이를『해외(海外)의 한국독립운동사료(韓國獨立運動史料)』(중국편(中國篇) 3·4)로 영인하였고, 이외에『진단(震壇)』·『부득이(不得已)』등을 소집 수장 하고 있다.
3) 1919년 9월부터 1923년 1월까지 발행된『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중 일부가 이화장 문서에 포함되어 있고, 상해의『독립신문(獨立新聞)』과 미주의『신한민보(新韓民報)』에 일부가 전하고 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19년에 발행된 제1호(9.3), 제2호(9.5), 제3호(9.10), 호외(9.11), 호외(9.11), 호외(9.5), 제6호(11. 17), 제7호(11.21), 1920년에는 제10호(1.20), 제11호(1.26), 제12호(2.12), 제13호(3.24), 호외(3.24), 제14호(4.1), 제15호(4.7), 제17호(5.28), 제19호(11.25), 1921년에는 호외(1.13), 호외(2.7), 제21호(5.21), 제23호(일자 불명), 제24호(6.22), 제28호(7.20), 제29호(일자 불명), 제31호(일자 불명), 제34호(9.14), 호외(9.20), 제35호(9.23), 제36호(10.2), 그리고 1923년 1월 5일자의 호외 등 모두 30개 호이다.
4) 한시준(韓詩俊),『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건국』(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현대한국학연구소 제2차 학술국제회의, 1998), p.24.
5) 1924년 9월에 시작하여 1944년 12월까지 발행된『공보』는 '소앙문서(素昻文書)'에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고, 기타 독립운동 관련 자료집들에 발행사실 및 내용의 일부가 소개되어 있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제1호(1924. 9. 1), 호외(1925. 1. 5), 호외(1925. 7. 7), 제43호(1925. 일자 미상), 제44호(1926. 12. 16), 제45호(1926. 12. 17), 제49호(1931. 3.1), 호외(1932. 5. 22), 제55호(1933. 6. 30), 제56호(1934. 1. 20), 제58호(1934. 9. 15), 제59호(1935. 4. 8), 제60호(1935. 11. 25), 제61호(1936. 11. 27), 제62호(1937. 7. 16), 제65호(1940. 2. 1), 호외(1940. 10. 9), 제67호(1940. 10.15), 제69호(1941. 2. 1), 제71호(1941. 10. 17), 제72호(1941. 12. 8), 제74호(1942. 2. 10), 호외(1942. 2. 25), 제75호(1942. 8. 20), 제77호(1943. 4. 15), 제78호(1943. 10. 31), 호외(1943. 12. 2), 제81호(1944. 6. 6), 제82호(1944. 9. 10),제83호(1944. 12. 20)이다.
6) 이에 대해서는 정진석(鄭晉錫)의『상해판 독립신문(獨立新聞)에 관한 연구』(『산운사학(汕雲史學)』, 4, 1990)라는 상세한 연구가 있다.『독립신문(獨立新聞)』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 논문을 참조.
7) 한시준(韓詩俊),「상해의 임시정부청사 소재지에 관한 고찰」.『한국근대사연구』4, 1996, pp.338 ~339.
8) 정진석(鄭晉錫), 앞의 논문, pp.153~154.
9) 정용대(鄭用大),『대한민국임시정부외교사(大韓民國臨時政府外交史)』,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pp.140 ~141.
10)『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1921년 10월 3일조(김정명(金正明),『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Ⅱ, 원서방(原書房), 1967, pp284~285).
11)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선전(宣傳)』은 제1호와 제2호 뿐이다. 이는『독립신문(獨立新聞)』영인본 뒷편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1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 4, 1975, p.866.
13) '한국독립운동문류발간사(韓國獨立運動文類發刊辭)'(조소앙, 1942. 4. 11).
14)『한국독립운동문류(韓國獨立運動文類)』. 원본은『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조소앙편(趙素昻篇) 3)』(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pp.72~138)에 영인 수록되어 있고, 조일문(趙一文)이 역주(譯註)한 『한국독립운동문류(韓國獨立運動文類)』(건국대 출판부, 1976)도 발간되었다.
15) 김희곤(金喜坤),「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결성(結成)과 활동(活動)」,『한국민족운동사연구』1, 1986, p150.
16) 정진석(鄭晉錫)은 주요한(朱耀翰)이 1919년 5월 상해에 갔을 때,『우리소식(消息)』이 발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창간일을 추정하였다.(앞의 논문, p.122).
17)『신한청년(新韓靑年)』, 창간호(순한문본)은 국가보훈처에서 펴낸『해외(海外)의 한국독립운동사료(韓國獨立運動史料)(7)』중국편(中國篇) 3(1993. pp12~121)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18)『신한민보(新韓民報)』1924년 9월 24일자.
19)『태평양잡지』뎨 7권 8월호(1925년 8월, p.34).
20) 국가보훈처 자료관리과와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다.
21) 재상해(在上海) 총영사(總領事)(선진진일랑(船津辰一郞))가 외무대신(내전강재(內田康哉))에게 1922년 3월 15일자로 보고한 '불령선인(不逞鮮人)の『부득이(不得已)』신문창간호발행(新聞創刊號發行)の건(件)'에 "가정부 비서장 신익희 사장이 이번 독립신문(獨立新聞) 이외에 독립선전기관으로 부득이사(不得已社)를 조직하고, 그 제1호를 지난 2월 27일에 발행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독립기념관 자료실 소장자료).
22) 창간호와 제9호는 국가보훈처에서 수집 보관하고 있고, 제3호는 이화장 자료에 들어 있다.
23) 국회도서관,『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1974, p.40.
24) 신용하(申鏞廈),『신채호(申采浩)의 사회사상연구(社會思想硏究)』, 한길사, 1984, p.43.
25) '이국무총리(李國務總理)의 양신문기자초대(兩新聞記者招待)'(『독립신문(獨立新聞)』1920년 1월 8일자 2면).
26) 임경석(林京錫),「고려공산당연구(高麗共産黨硏究)」,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p.137.
27) 스칼라피노·이정식 공저, 한홍구 역,『한국공산주의운동사』1, 돌베게, 1986, p.58.
28) 임경석(林京錫), 앞의 논문 p.136.
29) 주 27)과 같음.
30) 임경석(林京錫), 앞의 논문 p.140.
31) 임경석(林京錫), 앞의 논문 p.275.
32) 김희곤(金喜坤),『중국관내(中國關內)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韓國獨立運動團體硏究)』(지식산업사, 1995), p.276
33) 김희곤(金喜坤), 위의 책, p.293.
34) 김희곤(金喜坤), 위의 책, p.299.
35) 임경석(林京錫), 앞의 논문 p.142.
36) 김영범(金榮範),『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 비평사,1997, p.278.
37) 신용하(愼鏞廈), 앞의 책, p.63
38) 재간도(在間島) 총영사(總領事)(영목요태(鈴木要太))가 외무대신(폐원희중랑(幣原喜重郞))에게 1925년 3월 19일자로 보고한 '삼월일일(三月一日)にあはる불온선전(不穩宣傳)に관(關)する건(件)'(독립기념관 자료실 소장자료).
39)『탈환(奪還)』에 대해서는 박환의「1920년대 재중한국인(在中韓國人)의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과 『탈환(奪還)』의 간행(刊行)」,『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滿洲漢人民族運動史硏究)』(일조각(一潮閣),1991)이란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40) 사회문제자료연구회(社會問題資料硏究會),『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5(동양문화사(東洋文化社) 영인본, 1977), p.37.
41) 박환,『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성과 그 활동』,『수둔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992, p.957
42)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3, pp.481~489 및 pp.490~498에 각각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43) 재외불령선인'在外不逞鮮人の상황(狀況)'(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 警務局),『조선(朝鮮)の 치안상황(治安狀況) 소화(昭和) 2년판(年版)』, p.16).
44) 김희곤(金喜坤), 앞의 책, pp.245~246.
45)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4 , 1968, p.874.
46)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자료(資料) 3, 1968, pp.442~444.
47) 한상도(韓相禱),「1930년대 좌우익 진영의 협동전선운동」(김희곤(金喜坤)·한상도(韓相禱)·한시준(韓時俊)·유병용(兪炳勇),『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 한울,1995), p.62.
48) 김정명(金正明),『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Ⅱ, 원서방(原書房), 1967, p.515.
49) 제2호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자료(資料) 20(1991, p.308)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50) 김정명(金正明),『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Ⅱ, 원서방(原書房), 1967, p 364.
51) 1932년 10월 26일자로 재상해총영사(在上海總領事) 석사저태(石射猪太)가 외무대신(內田康哉)에 보낸 보고서(국가보훈처 소장자료).
52) 한시준(韓詩俊),『상해한국독립당연구(上海韓國獨立黨硏究)』,『용암차문섭교수화갑기념(龍巖車文燮敎授華甲紀念) 사학논총(史學論叢)』(신서원, 1989), p.608.
53)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자료(資料) 3, 1968, p.608.
54) 이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韓國獨立運動史資料叢書)』제2집.(진광(震光)·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영인수록되어 있다.
55) 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조소앙편(趙素昻篇) 4.(1997), pp.92~105에 영인수록되어 있다.
56) 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위의 책 pp.106~107에 영인수록되어 있다.
57) 윤병석(尹炳奭) 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중국편(中國篇)(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에 영인수록되어 있다.
58) 한시준(韓詩俊),「독립운동정당(獨立運動政黨)과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于松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 한국민족운동사연구(韓國民族運動史硏究)』(나남출판, 1997), pp.799~800.
59) 이는 중국인 학자 손과지(孫科志)가 광동성(廣東省) 도서관(圖書館)에서 수집한 것으로, 독립기념관 자료실에서 소장하고 있다.
60)『민족혁명당당보(民族革命黨黨報)』제1호(1935년 8월 1일)에 의하면, 이 회의에서 당의 기관지 발행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기관지 발행을 위해 800원의 예산을 편성하고 편집원(국한문본 11인, 순한문 7인)을 두기로 한 것이다.(사회문제자료연구회(社會問題資料硏究會)편,『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 2, 동양문화사(東洋文化社), 1976, p.144)
61) 제1호는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2, pp.133~147, 제2호는 pp.148 ~163.
62) 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화평사(和平社), 1991, p.117.
63) 창간호·제2호·제3호는『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3의 pp.52~82 및 pp.83~117 및 326~380에, 그리고 제5호는『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5의 pp51~64에 수록되어 있다.
64)『민족혁명(民族革命)』창간호, 1936년 1월 20일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3, p.52).
65)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3에 제1기(第1期)(pp 257~276), 제2기(第2期)(pp 277~284), 제3기(第3期)(pp285~291)에 일문(日文)으로 번역 수록되어 있다.
66)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5, p.34 및 pp.64~67.
67)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3, pp.33~42(제1호), pp.43~50(제2호)가 수록되어있다.
68) 한시준(韓詩俊),「중경시대 임시정부와 통일전선운동」,『쟁점(爭點)한국근현대사(近現代史)』4, 1994, p137.
69) 윤병석(尹炳奭) 교수 소장.
70)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3의 pp.133~186에 제1·2·3호, pp.384~393에 제5·6호, pp.507~514에 제9호의 내용의 일부가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제14호는 같은 책 5의 pp. 38~40에 내용 일부가 있다.
71) 제1호부터 제3·4기합간의 3개호는 국가보훈처에서 펴낸『해외(海外)의 한국독립운동사료(韓國獨立運動史料)』7(중국편(中國篇) 3)에 영인 수록되어 있고, 제5기는 한상도(韓相禱)씨가 소장하고 있다.
72) 제1권 제4기는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3 pp.499~506에, 제2권 제4기는 같은 책 5의 pp.41~44에 일부 내용이 번역되어 있다.
73)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5 pp 46~51에 내용 일부가 번역 수록되어 있다.
7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韓國獨立運動史資料叢書)』제2집(1988)에 영인수록되어 있다.
75) 국가보훈처에서 펴낸『해외(海外)의 한국독립운동사료(韓國獨立運動史料)』8(중국편(中國篇) 4, 1993)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76) 중국인 학자 손과지(孫科志)는『동방전우(東方戰友)』의 제31호 표지와 목차를 복사하여 필자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에 의하면『동방전우』는 모두 32호가 발행되었다고 하며, 그 전부가 상해에 있다고 한다.
77) 김영범(金榮範),「조선의용대연구(朝鮮義勇隊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88), p.495
78) 제1기와 제4기는 추헌수(秋憲樹)의『자료한국독립운동(資料韓國獨立運動)』3(연세대 출판부, 1973) pp 113~164에 조판 수록되어 있고, 제3기와 제4기는 국가보훈처에서 펴낸『해외(海外)의 한국독립운동사료(韓國獨立運動史料)』7(중국편(中國篇) 3)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79) 한시준(韓詩俊)『한국광복군연구(韓國光復軍硏究)』, 1993, p.254.
80) 김영범(金榮範),「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간행(刊行)『광복(光復)』의 독립운동론(獨立運動論)」,『한국독립운동사연구』1(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p.287.
8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韓國獨立運動史資料叢書)』제1집(1987)에 영인되어 있다.
82) 최기영(崔起榮),『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 신문연구(新聞硏究)』, 일조각, 1991, p.194.
83) 천진총영사(天津總領事) 대리(代理) 대응정차랑(大鷹正次郞)이 외무대신 내전강재(內田康哉)에게 1921년 1월 6일자로 보고한 문건(독립기념관 자료실 소장자료).
84) 윤병석(尹炳奭) 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중국편(中國篇)(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에 창간호가 영인 수록되어 있다.
85) 천진(天津) 총영사(總領事) 팔목원(八木元)이 외무대신 내전강재(內田康哉)에게 1921년 12월 26일자로 보고한 '불령선인취체방(不逞鮮人取締方)에 관(關)하여 불국영사(佛國領事)와 교섭(交涉)한 건(件)'(독립기념관 자료실 소장자료).
86) '불온신문(不穩新聞)『도보(導報)』の기사(記事)に관(關)する건(件)'(독립기념관 자료실 소장자료).
87) 이화장 소장자료
88) 재외불령선인(在外不逞鮮人)の상황(狀況)(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경무국(警務局),『조선(朝鮮)の치안상황(治安狀況) 소화(昭和) 2년판(年版)』, p.15) ; 김영범(金榮範),「의열단(義烈團)의 민족운동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4, p.140.
89)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3 pp.419~424.
90) 앞의『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情勢視察報告集)』5 pp.87~91(제1호), pp.91~95(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