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8908
글: 아걸설역사(阿傑說歷史)
"일중즉이(日中則移), 월만즉휴(月滿則虧)"
해가 중천에 뜨면 내려가고, 달이 차면 기운다.
이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중신 범수(范睢)의 대표적인 전고(典故)이다.
진나라에서 그는 일찌기 상당한 권세를 가진 인물이었다. 태양이 중천에 뜬 것같은 전성기처럼...그러나, 그는 심사숙고하는 지혜가 있었고, 어떻게 나아가고 어떻게 물러나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는 기꺼이 권력과 영예를 버리고자 했고, 최종적으로 민간에 은거하는 것을 선택했으며, 조용히 생활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원만한 마침표를 찍는다.
진나라의 대신 이사(李斯)는 그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진소왕(秦昭王)은 범수를 얻고, 공실(公室)을 강화하고, 사문(私門)을 막았으며, 제후를 잠식하여 제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범수의 일생에서 그는 완전히 "소인"인 것만은 아니었다.
1
범수의 복수성격은 그의 어릴 때 경력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원래 위나라의 대부 수가(須賈)의 수종(隨從)이었다. 그런데 수가는 그가 제(齊)나라와 몰래 통하며 위나라의 이익을 팔아먹고 있고 있다고 모함한다, 그리하여 위나라의 상국 위제(魏齊)의 의심을 받아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
운이 좋게도 그의 친구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진나라 사자 왕계(王稽)를 따라 진(秦)나라로 도망친다.
진나라에 도착한 후, 범수는 형세를 살펴보고, 진소왕을 도와 당시 진상(秦相) 양후(穰侯) 위염(魏冉)이 "나라에 해를 끼치고 개인적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시정한다. 그리고 나아가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중요전락을 제안한다.
그후 범수는 탁월한 재능과 공헌을 세운다. 그리하여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다섯번 무릎을 꿇고' 그를 객경(客卿)으로 모시고 진소왕을 도와 패업을 실현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진상(秦相)에 임명된다.
그때는 진나라가 강성해지고, 위나라는 쇠약해질 때였다. 수가는 위나라의 사자로 진나라로 화해를 청하러 온다. 이는 범수에게 절호의 기회가 된다. 일찌기 그를 해치려 했던 수가와 위제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그는 먼저 "거지"로 변장을 해서 가수가 그를 모욕하면 그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며 "진상을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수가를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을 벗어나, 수가는 그를 모욕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잘 대접했다. 그리하여, 범수는 결국 그를 해치지 않는다.
그러나, 원한을 품은 범수가 여기에서 그만두지는 않았다. 연회에서 그는 진상의 신분을 이용하여 억지로 가수에게 짐승사료를 먹게 하여, 가수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범수의 복수의 길은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그는 위나라의 화해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요구조건을 내세운다. 그것은 위제(魏齊)의 수급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나중에 진소왕의 지지를 받아, 평원군(平原君)을 인질로 잡고, 결국 위제를 압박하여 죽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범수는 가수를 모욕주었을 뿐아니라, 성공적으로 위제를 죽여버린다. 마침내 자신의 복수목표를 실현한 것이다.
2
기원전260년, 장평지전(長平之戰)이 발발한 후, 범수는 교묘하게 이간계(離間計)를 써서 조나라로 하여금 전투중에 지휘관을 바꾸게 만든다. "아직 식사는 하시는가(尙能飯否)"의 명장 염파(廉頗)가 그저 '지상담병(紙上談兵)'만 아는 조괄(趙括)로 교체된 것이다.
장평지전에서 진나라는 조나라의 40만명에 이르는 항복해온 병졸을 갱살해버리고, 겨우 240명의 노약자와 부녀자와 어린이만 석방한다.
장평지전이후, 비록 모수자천(毛遂自薦)과 신릉군이 비밀리에 구원해주긴 하였지만, 조나라의 멸망은 이미 결정된 셈이다. 이때 범수와 백기(白起)간의 의견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는 범수가 백기를 모함하여 해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백기의 계획은 병력을 3로로 나누어, 일거에 조나라를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범수는 진나라의 식량운송라인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생각하여, 재정소모가 과중하므로, 그는 진나라와 조나라가 화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진소양왕은 싸우지 않고 6개 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이익의 유혹하에 기원전259년 철군한다.
그러나, 전국시기의 정치풍운변환은 조효성왕(趙孝成王)으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이 6개의 성을 제(齊)나라에 뇌물로 바치고, 합종(合縱)하여 진나라에 항거하는 것을 추진한다.
진소양왕은 대노한다. 그는 왕릉(王陵)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공격하게 하나 공성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마음 속의 분노를 풀지 못한다.
할 수 없이 백기로 하여금 왕릉을 대신하여 조나라를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백기는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진소양왕에게 경고한다: "우리 진군이 조나라 경내에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만일 산동육국이 연합하면 우리 대진의 장병들은 시신도 남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빨리 철군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진소양왕은 약속을 어긴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명장 왕흘(王齕)을 파견하여 계속 한단을 포위공격하게 한다.
결국 백기의 예측이 들어맞는다. 진군은 패배하고 만다.
"살신(殺神)" 백기는 이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만다: 지도자가 실수를 저지르면, 그것을 보완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냉소적이고 비웃는 말을 던진 것이다.
백기는 한단을 오랫동안 포위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춘신군과 신릉군에게 반격을 당했다는 말을 들은 후, 아무런 건의도 올리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진왕이 내 말을 듣지 않더니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진소양왕은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한다. 진군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진소양왕의 분노는 모조리 백기를 향하게 된다.
이때 범수는 백기의 공로가 자신을 넘어설 것을 우려하여, 백기를 사졸로 강등시키고, 자결을 명하도록 건의한다.
이렇게 하여 일대전신 백기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
한단전투때 진소양왕은 범수의 건의에 따라 그의 친구인 정안평(鄭安平)을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정안평은 승부가 결정되기도 전에, 이만의 진군을 이끌고 조나라에 투항했다.
진나라의 법률에 따르면, 범수는 사람을 잘못 기용한 죄가 있으므로 삼족을 주살하는 중죄에 해당했다. 그러나 진소양왕은 그가 진나라에 한 공헌을 고려해 관대하게 처리하여 그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범수가 극력 추천한 또 다른 친구 왕계는 하동군수로 있는 동안, "외국과 사통"하여 다른 제후들과 결탁한다. 결국은 이로 인하여 처형당하게 된다.
범수는 매일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가 연나라사람 채택(蔡澤)의 "일중즉이, 월만즉휴"라는 경시를 듣고 홀연히 깨닫게 된다.
그는 상앙, 오기같은 권신이 권력의 앞에서 자신을 잃고 적시에 몸을 빼지 못해서 결국 스스로 재난을 초래했다는 점을 인식한다.
기원전255년, 범수는 채택을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고, 관직을 사임하고 은거하여 정치무대에서 떠난다.
일대명상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범수의 일생을 살펴보면, "소인"이라는 말로 그를 형용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는 수년후에도 여전히 책략을 써서 수가, 위제에 복수를 하고, 전공이 탁월한 백기에 대해 편협한 마음을 가진 측면도 있지만, 그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일면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정안평, 왕계등을 기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진상의 직위를 사임할 때, 그는 채택을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했다. 이를 통해 채택이 그에게 살 길을 알려준 것에 감사했다. 그리하여 명철보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르므로, "은원분명"이라고 형용하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장평지전의 전략적인 선택을 되돌아보면, 백기와 범수의 의견중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한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의문의 여지없이, 범수의 도움으로 강대한 진나라는 결국 진시황 영정의 영도하에 육국을 통일한다.
이는 진소양왕이 범수를 이렇게 칭찬한 것이 이해되게 만든다: "옛날 주문공은 여상을 태공으로 삼고, 제환공은 관이오를 중보로 삼았는데, 지금 범군이 우리나라의 원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