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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884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한강에 놓인 다리들
한강은 강원도와 경기도, 충청도 북동부의 많은 곳을 연결하는 큰 간선 수로다. 한강을 따라 이 넓은 지역의 모든 잉여 생산물들이 서울로 흘러들어간다. 또한 소금을 비롯한 거의 모든 상품과 외국에서 온 물품들이 한강을 타고 항구에서 올라와 보부상이나 행상의 손을 거쳐 각 지점에 도착하며, 그곳을 통하여 내륙지방의 장터들에 이르게 된다. 한강에서의 처음 10일간은 하루 평균 75개의 징크들이 물길을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강에는 매우 많은 수의 유동 인구가 존재하였다. 전 구간에 걸쳐 교량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정부가 운행하는 47개의 무료 여객선으로 왕래가 유지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에 와 서울에서 단양의 영춘까지 한강을 배로 돌아봤던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실린 기록이다. 영국이나 유럽의 발달한 해운 문화에 익숙한 그녀의 눈에는 넓고 긴 한강에 다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 무척이나 의아했을 것이다.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외침을 막아낼 만한 역량을 제대로 갖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외적의 침입을 막는 소극적 방위 전략으로 강에 다리를 놓지 않았다. 대신 작은 내에는 징검다리나 나무다리를 놓았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에 참패한 청나라 장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들었던 패인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다리가 유약하기 때문에 말이 끄는 야포 하나를 나르는 데도 주저앉곤 해서 작전이 늦어졌다”라고 했다 한다. 일본의 장군들 역시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다리가 없어 강줄기를 따라 수심이 얕은 상류까지 돌아가야 하는 바람에 작전 지연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라고 이야기했다 한다.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1902년 음독 자결한 보수파 학자인 이병선은 “만약 조선의 길이 넓고 다리가 탄탄했더라면 조선 역사는 잦은 외침에 찢겨 아예 남아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유서를 썼다. 그의 말처럼 조선은 길과 다리가 없어서 그나마 유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은 강들의 운송수단은 나룻배가 유일한 것이었다.사실 다리는 삼국시대부터 축조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우리나라 최초의 다리는 413년에 만들어진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지만 그 위치를 파악할 길은 없다. 최초의 석조 아치교는 남북국시대 때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하며 조성한 청운교와 백운교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국보 제22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다리는 헌강왕비가 망부의 혼이 극락왕생하기만을 부처에게 빌었다는 이야기가 서려 있다.그 뒤 알려진 다리는 개성의 자남산(子男山) 동쪽 기슭의 작은 냇가에 놓인 선죽교로,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순절한 곳이다.살곶이다리조선시대에 이르러 많은 다리가 건설되었는데, 대표적인 다리가 한강의 지류 중랑천에 놓인 살곶이다리다. 이 다리는 원래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위하여 놓으려 한 것으로, 영의정 유정현과 당시 일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직접 공사를 맡게 하였다. 그러나 홍수에 시달리고 강폭이 너무 넓어서 다리 기둥만 세운 채 건축이 중지되고 말았다. 그 뒤 성종 때 승려를 시켜서 돌 1만 석을 캐다가 길이 258척, 너비 20척짜리 돌다리를 다시 놓고 이름을 제반교(濟盤橋)라고 지었다.궁 안에 있지 않아서 백성들도 건널 수 있었던 최초의 다리인 살곶이다리는 한양과 살곶이벌을 이어주던 다리였다.성현이 지은 『용재총화』 권 9에 실린 내용을 보자.
어느 승려가 살곶이다리를 놓을 때 돌 1만 석을 캐다가 큰 내를 가로질러 놓았다. 그 길이가 3백 보 남짓 되며 튼튼하기가 집채와도 같아서 사람들이 마치 평지를 밟는 것처럼 걸어 다녔다.성종이 그의 재능을 알고 이 다리를 놓게 하고는 관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곡식과 포목을 내려주었건만, 비용만 들이고 몇 해가 지나도록 겨우 다리 기둥을 세웠을 뿐 공을 이루지 못해서 성종께서는 끝내 이 다리를 밟아보지 못하였다. 모든 관리들이 이를 가슴아파하였다. (······) 그 뒤에야 살곶이벌에 큰 다리가 완성되니 다리 이름을 제반교라 하였다.또 동대문 밖 왕십리벌에 새로 놓은 다리를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는데, 모두 임금께서 친히 붓으로 써서 내려주신 이름들이다.
서울에서 금천교, 수표교와 함께 유명했던 살곶이다리는 고종 때 대원군이 이 다리의 반을 헐어다가 경복궁의 석재로 쓰기도 하였다.
살곶이다리세종의 명령으로 다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63년 후인 성종 14년에 완성하였다. 교각 위에 받침돌을 올리고 대청마루를 깔듯 세 줄의 판석을 깐 것이 특징이다.
한강대교국내 최초의 근대 교량인 한강대교가 한강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0년이었다. 일본이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따낸 경인철도부설권을 인수해 철교를 가설한 것이다. 이어서 1905년에 일본이 경부철도를 완공함으로써 철도 수송량이 급증했고, 1917년에는 용산구 한강로와 동작구 본동 사이의 한강을 도보로 건널 수 있는 한강인도교(한강구교(舊橋))가 설치되었다.물길로서의 한강을 불구로 만든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44년 청평댐의 건설이었다. 이때부터 한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용산과 마포, 성동구 지역에 둑을 쌓은 것은 일제강점기인 을축년(1925) 대홍수를 겪은 뒤였는데, 그때 한강구교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한강 유역개발계획을 마련한 일제는 1931년까지 둑을 쌓았고 1934년에는 한강대교 건설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에 준공하였다.이곳 한강인도교에서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6월에 한강교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
25일 새벽 네 시경 삼팔선을 경계로 서로 맞대고 있는 웅진, 개성, 동부 해안 지구에서 북한군과 한국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로이터 통신의 보도가 타전되면서 3년간에 걸친 비극적인 한국전쟁의 막이 오른다. 그날 한반도 전역은 억수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남과 북 두 진영은 서로 다른 정보를 내보낸다. 주한미국대사관 측 설명에 의해 UP통신은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한국 삼팔선에서 일요일 새벽에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침공해오고 있음을 전함. 현지 시각 9시 30분의 보고로는 서울의 한국군사령부에서 북쪽으로 6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개성에서 한국군 1사단이 9시경 격파되고 옹진반도 남쪽 3.4킬로미터 지점에서 한국군이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음.
반면 북한 내무성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오늘 6월 25일 이른 새벽 남조선 괴뢰정부는 삼팔도선 전역에 걸쳐 삼팔도선 이북 지역으로 불의의 진공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진공을 개시한 적은 해주 방면 서쪽, 금천 방면, 철원 방면에서 삼팔도선 이북 지역으로 1~2킬로미터까지 침입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만일 남조선 괴뢰정부 당국이 삼팔도선 이북 지역에 대한 모험적 전쟁 행위를 즉각 중단하지 않는다면 적을 제압하기 위해 결정적인 대책을 취할 것이며, 동시에 이 모험적인 전쟁 행위에 의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남조선 괴뢰정부 당국에게 주의시킬 것을 공화국 내무성에 위임하였다.
6월 25일 아침, 이승만은 비원 연못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야크기들이 경무대를 직접 폭격하는 등 서울 함락이 임박해오자 서둘러 피난길에 나섰다. 월요일인 26일 서울시내에 은행들이 개점하자 서울의 특권층들은 재빨리 돈을 찾아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갔다.1950년 6월 초 윌리엄 로버트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은 퇴역에 즈음하여 극동에 파견된 《타임》 특파원 프랭크 기브니 기자의 고별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병력 10만 명을 보유한 남한을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가진 나라로 간주한다. 신속한 남한의 군대는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을 소탕하여 불과 소수의 잔당만을 남겨두었다. 지금은 어떠한 사람도 소련이 훈련시킨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했을 때 대량의 증원 부대 없이 쉽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곤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시아 최강이라던 한국군은 27일 저녁에는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서울 외곽까지 밀렸고, 28일 자정을 넘어서면서는 홍릉 일대까지 빼앗겼다. 그 무렵 문산과 파주 쪽으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수색 쪽으로 오면서 그중 일부가 김포를 향하여 한강을 넘을 채비를 갖추었다. 당시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28일 새벽 2시 북한군의 전차 두 대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대기하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인도교를 폭파하라고 명령한 다음 시흥으로 향하였다.그 전날인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육군공병학교의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세 개의 철교와 한 개의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이때 북한강파출소와 중지도에는 공병경계분대와 헌병대가 배치되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오던 수십 대의 차량이 대파되고 수많은 인파가 파편과 폭음 속에 사상(死傷)을 입는 가운데 폭파 현장은 말그대로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중 한 개의 단선철교는 폭파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나중에 북한군에게 이용되기도 하였다.북한군 주력 부대가 서울시내 중심부에 들어온 것은 28일 오후 3시였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한강교 폭파를 6~8시간 정도 연기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미처 후퇴하지 못한 3개 사단의 병력과 군사 장비가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 외곽을 지키기 위하여 남아 있던 한국군 주력 부대와 대부분의 중화기 및 장비, 보급품과 수많은 시민들을 강북에 남겨둔 채 성급하게 한강교를 폭파하여 그 퇴로를 끊고 만 것이다. 우리의 전사(戰史)에 하나의 오점을 남긴 그 사건은 국민의 지탄을 면치 못하였으며, 폭파 책임자 최창식은 1950년 9월 총살되었고 그 뒤 남한에서 의도적으로 전쟁을 도발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유엔 시찰반이 보고했던 것처럼······ 미군사고문단이 생각하기를, 이승만의 군대가 사보타주를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왜 형편없이 붕괴하고 패주했는가? 이것은 북한군을 한국 내에 깊이 끌어들여 그 위협을 이용해서 미국의 개입을 확실히 한다고 하는 최고부의 군사적 음모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북한군에 의한 한국군의 탄약, 보급품, 군장비의 포획은 북측의 거침없는 진격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함에도 퇴각하는 한국군에 의해 보급품이 파괴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 콩드, 『현대조선사』
그날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것을 시작으로 서울에 있던 나머지 네 개의 다리마저 모두 파괴되었다. 다리 폭파는 곧 고립을 의미했고, 나룻배들은 이미 피난을 떠난 사람들이 타고 건너간 채 강 저편에 버려져 있었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군인들과 시민들에게 남은 선택은 뼈대라도 남아 있는 한강철교를 붙들고 강을 건너거나 헤엄쳐 가거나 아니면 그대로 서울에 갇히는 수밖에 없었다.
성산대교 © 유철상이 다리는 한강의 열두 번째 교량으로서 도심으로 진입하는 시간을 단축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난간이 반달형으로 특유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경제가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한강에 다리가 속속 들어섰다. 1960년대에 우리 기술로 만든 제2한강교가 들어섰고, 동작대교를 비롯한 수많은 다리가 한강에 세워졌다. 한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광진대교, 천호대교, 올림픽대교가 보이고, 잠실철교와 잠실대교를 지나면 청담대교에 이른다. 영동대교, 성수대교를 지나면 동호대교와 영남대로의 길목이던 한강진에 세워진 한남대교에 이른다.
가양대교강서구 가양동과 마포구 상암동을 잇는 다리. 교각과 교각 사이의 거리가 최대 180미터로, 강상판 상자형교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길다.
잠수교가 있는 반포대교를 지나면 옛 시절 삼남대로의 길목이던 동작나루에 세워진 동작대교에 이르고, 노들섬을 가로지르는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지나면 여의도가 지척이다. 원효대교, 마포대교, 서강대교, 양화대교를 지나면 성산대교에 이른다. 가양대교, 방화대교, 행주대교를 거치면 김포대교와 일산대교가 멀지 않다. 서울 부근의 한강에만도 이렇게 많은 다리가 들어섰는데,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시 창죽동 검룡소에 이르는 길에는 얼마나 많은 다리들이 들어섰을까?
국내 최초의 근대 교량인 한강대교가 한강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0년이다. 일본이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따낸 경인철도 부설권을 인수해 철교를 가설한 것이다. 이어서 1905년에는 일본이 경부철도를 완공함으로써 철도 수송량이 급증했고, 1917년에는 용산구 한강로와 동작구 본동 사이에 한강인도교가 설치되었다. 한강 유역개발계획을 마련한 일제는 1934년에 한강대교 건설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에 준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