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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나는 한 순간의 노리갯 감이 되는 길과 여느 왕후보다 더 막강한,
중원의 패자를 지배하는 진정한 승리자로의 길을 보았고,
당신은 내가 어떤 길을 택했는지 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 서시(西施). 서른일곱번째 이야기
"잠시만 얼굴을 보고 나오는 것도 안 되겠습니까,
제발 잠깐만, 무사한지만 보려 합니다"
밤도 깊어가고 하루종일 옥사 앞에서 하는 일 없이 서있느라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의
끽해봤자 이화 부인의 큰 아들 뻘밖에 되지 않는 포졸은 같잖다는 눈으로 그녀를 째려보고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해! 자꾸 이리 귀찮게 굴면 확 그냥 싸그리 다 처넣어버리는 수가 있어!'
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이화 부인은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서용의 무사여부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야, 하고 생각하며 체면 불구하고 제 아들 뻘되는 포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한다.
"나으리, 제발..."
새파랗게 어린 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으리라 애원하는 자신의 꼴이라니,
수치심과 치욕이 몰려들었지만 이미 벼랑 끝으로 몰린 현실에선 그마저도 사치다.
"나으리, 약소하지만 이것이라도 보태어 어디가서 술 한잔 잡숫고 오세요"
옆에서 있던 단은 작은 돈주머니 하나를 누가 볼새라 은근슬쩍 포졸의 손에 쥐어주며 어른다.
"어허! 이거 뭐하는 짓인가! 이년들이 단체로 죽고 싶어 환장했나!
썩 치우지 못해?"
젊은 포졸은 짐짓 화를 내는척 하며 돈주머니를 밀친다. 그러면서 슬쩍 지금껏 잠자코 말없이 뒤에서
광주리 하나를 옆에 끼고 서있던 륜의 새하얀 얼굴, 어둑어둑한 사위 속에서도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는 듯한 그녀의 창백한 살결과 화롯불의 불빛에 노오란 고운 꽃잎이 핀듯한 얼굴을
은근한 눈으로 보며
"자고로 술도 이쁜 계집이 따라주어야 제맛인데 하물며 돈이라고 그러지 않을쏘냐"
륜은 포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포졸은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듯 어머니와 언니를 쳐다보자 이화 부인은 아예 남의 일인냥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고
단은 난감해하며 하지만 부탁한다는 눈빛으로 륜을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 상황에 이것보다 더한 일인들 못하겠니?'
입술을 질끈 깨물며 륜은 단에게서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륜이 다가오자 포졸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모른체한다.
"부탁합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화를 참고 돈주머니를 앞에 내밀었건만 포졸은 끝까지 모른체한다.
영문을 모르는 륜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을 구하듯 언니를 돌아보자 역겹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단의 시선과 마주쳤다. 단은 고개를 설레설레 지으며 륜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언니의 말을 듣고난 륜은 '아!' 하고 탄성에 가까운 분노의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때까지도 모른척 휘파람을 불고 있던 포졸은 음흉스럽게 웃었다.
륜은 이를 꽉 깨물고 포졸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포졸의 더러운 손을 잡아 그 위에 직접
주머니를 얹어주었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륜이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잡은마냥
최대한 접촉을 줄이며 잡았던 포졸의 손을 놓으려는 순간, 덥썩- 포졸의 뜨거운 손이 한발 앞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당황한 륜이 안간힘을 쓰며 손을 빼려 비틀어보지만 포졸은 아예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고
희롱하듯 쓰다듬는다.
"얼굴만 이쁜 줄 알았더니 살결도 보드랍구나, 겉에 내놓은 손이 이리 보드라우면 안의 살은
얼마나 더 부드러울까?"
치욕감이 륜을 덮쳐왔다. 그 즉시 포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며 아버지의 면회고 뭐고 당장에
포졸의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혀줄 생각으로 뭐라 하려는 찰나,
시간을 알리는 경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에 포졸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슬그머니 륜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뭐, 너무 심한 장난은 안 치는 것만 못하겠지"
라고 사과도 아닌 말을 중얼거리고는 옥사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자신의 행동이 너무 심했다
싶어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하고 이제 서용과 그들을 만나게 해주려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지만 한편에는 여전히 포졸에 대한 분노와
그에게 당한 모욕감에 륜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단이 그런 륜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토닥거려준다.
"됐어, 원래 포졸들은 다 그런놈들이란다.
하루종일 흉악한 놈들이 갇혀있는 옥사 앞을 지키는 자들이다보니 심술맞아 진것이지 본래
나쁜 자들은 아닐거야, 참자, 응?"
언니의 달램에 륜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참아야 한다.
일이 일어난지 벌써 일주일 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의 시간을 말하자면 그건 마치 악몽처럼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꿈이 만약 실제였다면 몇 번이고 죽고도 남았을 만한 고통을 당했는데도 몸에는 상처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서용이 잡혀가고 난 후 남은 가족들이 겪었든 시간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서용이 살인자라는 사실이 온 도시 안에 퍼지자 마자 사람들, 그건 그전까지 그들이 얼마나 륜의 식구들과
친밀하게 지냈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친밀함이 깊을수록 더욱 더 심하게 사람들은
륜과 남은 식구인 이화 부인과 단을 괴롭혔다. 일이 일어난 지 첫날에는 그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였다.
호기심과 증오심에 어린 사람들이 그들의 집을 하루 왠종일 에워싸고 안을 들여다 보려 했으며
집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마치 그들이 또 다른 살인을 계획하려 머리를 맞대고 있다는 듯 철저히
륜과 그 식구들을 감시했다. 하지만 그들이 듣고 본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식을 들은 이화 부인은 그대로 까무라쳐 버렸고, 륜 역시 며칠을 심하게 앓아
제대로 운신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육신이 멀쩡했던 단 역시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넋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앉아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화 부인은 이대로 주저 앉을수는 없다며 자신도 성한 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일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앞으로 서용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묻고 다녔으나
세상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서용과 그의 일가를 살인죄인으로 취급하고
있었으며 금수만도 못하다며 손가락질 하고 있었다.
하물며 진 대인조차도, 그가 관리를 만나고 왔다는 소식에 무언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간
단과 륜을 외면했다. 서용과 그들 가족은 한 순간에 세상의 끝까지 떨어져 버렸다.
서용은 생사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관아에 찾아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귀뜸을 해달라고
그것도 안되면 적어도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사정을 해도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해서라도 서용을 볼 수 있다면, 이까짓 모욕 정도야 얼마든지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륜이 고개를 들자 옥사에서 포졸이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아까의 젊은 포졸이 아닌 다른이였다.
그는 옥사 앞에 서있는 세 사람을 보자 인상을 찡그리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뭣하고 있는거야? 당장 꺼져!"
어리둥절한 단이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우리는 방금 안으로 들어간 젊은 포졸 나으리께 죄인을 만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단의 말에 포졸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뭐?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
"방금 들어가신 그분께 물어보세요, 우린..."
"그 친군 벌써 집에 가고 없어, 방금 나와 교대했단 말이야"
순간 어안 실색한 것은 단 뿐만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린 분명... 우린 분명 값까지 치뤘단 말이에요!"
그제서야 속았단 생각에 분노한 단은 얼굴이 금새 시뻘개졌다.
이화 부인은 마치 산 사람이 아닌듯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던지
새로 교대한 포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묻는다.
"값을 치르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그나저나 누구를 보러 왔지?"
"서용이오.."
이화 부인의 나즈막한 답에 잠시 생각하던 포졸은 고개를 내젓는다.
"안 됬지만 만날 수 없네."
"도, 돈은 나으리께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아까의 그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속은것이 분하긴 하지만...
그러나 포졸은 끝내 고개를 젓는다.
"서용은 지금 아무도 만날 수가 없어. 쯧쯧- 아까 그 못된 젊은 놈에게 속은 것이군.
나도 이 문지기 생활하며 젊었을 적에는 그런 짓을 많이 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사후에 부처님께 귀의하려
덕을 쌓으려고 왠만하면 다 볼 수 있도록 눈감아 주는데 말이야, 서용만은 어쩔수 없어.
이건 현령 대감의 명령이야. 돈을 얼마를 내고는 상관이 없다고."
그는 딱하다는 듯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면... 나으리께서 이 음식이라도 전해줄 수 없겠습니까?"
들고 온 음식이 담긴 광주리를 앞에 내밀어 보지면 포졸은 그것도 안된다며 고개를 젓는다.
"서용은 지금 다른 죄수들과 떨어진 곳에 혼자 갇혀있어.
그곳은 아무나 드나들 수가 없지. 미안하지만 아무것도 도와줄 수가 없구만"
결국 그들은 그대로 허무한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크게 상심한 단이 결국 울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어깨라도 다독여 줄텐데, 이미 몸도 마음도 너무나도 지쳐버린 터라 어느 누구 하나
상대방을 위로해 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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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은 암흑같이 컴컴했다. 작은 방 안에서는 집을 나서기 전 미리 재워놓은 온유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단은 눈물을 훔치며 혼자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이화 부인과 륜은 어디로도 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처럼 오두커니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엄마...혹시 샤오룬 오라버니가..."
이화 부인과 단 둘이 있게 되자 륜은 오랫동안 혼자 생각해왔던 것을 조심스레 입에 올려본다.
하지만 이화 부인은 단번에 륜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건 생각하지도 마라,"
"하지만 모르는 거잖아요,"
륜은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이화 부인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넌 참 못됐구나"
그것이 이화 부인의 답이었다.
"네 입으로 샤오룬 도련님과 혼인하는 것이 싫다, 도련님의 권세를 이용하는 것이 비겁한
짓이라며 싫다고 말해놓고 이제 와선...!'
"하지만 상황이 이렇잖아요,"
"그렇다면 넌 아사(餓死)를 피하기 위해선 남의 떡을 훔쳐 먹어도 된다는 거니?!
그리고 그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거야?!"
말문이 막힌 륜은 답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화 부인의 질책은 계속되었다.
"네가 받지 않아 네게는 소중하지 않은 마음일지라도 주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이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는 소중한 것일 수도 있어. 넌 부정할지 몰라도 넌 그걸 너무나 많이
이용해 왔고 그러면서도 그 마음은 거부해왔지. 이제는.... 그만 해야돼.
넌.... 지금까지 우린 충분히 그분들께 폐를 끼쳤으니까.."
어둠보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한숨 소리와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근래에 듣지 못한 이화 부인의 또렷한 말소리였다.
슬픔이나 분노로 혼탁해진 목소리가 아닌, 본래의 그녀의 맑고 힘을 지닌 목소리였다.
"착하고 남을 배려하는 것만이 훌륭한 사람은 아니란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주변을 살피는, 비바람이든 폭풍우든, 어떤 역경에도 그 맑음을 잃지 않는
호수와도 같은 마음을 가지어야 한다.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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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그때 이미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는 건지도 모른다.
이미 무슨 일이 닥쳐올 것인지 보았던 것이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 함은. 철부지처럼 이랬다저랬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잔망스럽게도 자신의 미모로 사람들을 농간하려는 싹을 보이던 어린 딸을 꾸짖는 한편 그러한 정신과
생각으론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견디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염려한 말이었고,
호수와도 같은 사람이 되어라, 는 것은........ 앞으로 겪게 될 모진 풍파에도 닳지 않고, 바래지 않고
언제나 지금처럼. 철없지만 순수하고 깨끗한 소녀의 마음을 언제나 간직하길 바라는,
결국 지켜주지 못한 그 미안함 마음에 말하지 못할... 여느 부모가 바랄 평범한 바램이었으리라.
비록 어리석었지만 무언가 충격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 가장 바보 같고 무서운 짓을 벌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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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대인의 앞에 앉아있는 예인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 없었다.
누가 보면 그녀가 옥에 있다 나온 사람처럼 생각할 정도였다.
자세히 보면 여린 눈가에는 눈물기마저 보인다.
하지만 진 대인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님, 정말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은쟁반에 옥구슬 흐르는 듯한 고운 목소리도 촉촉히 젖어있건만, 진 대인은 평소 그가 예인을
대하던 태도가 무색할 정도로 철저히 그녀를 무시하는 듯 대꾸조차 없다.
"저러다 도련님의 옥체에 무리라도 가면 어찌합니까,"
그녀의 물기 섞인 목소리에는 역시 평소 그녀답지 않게 원망이 강하게 섞여 있었다.
진 대인의 눈썹이 꿈틀하였고, 그제서야 그가 반응을 보이는 듯 했다.
"겨우 며칠 곡기를 끊은 것 가지고 몸져 누울 녀석이라면 사내 대장부가 아니니
그럴 바엔 너도 다른 정혼자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인은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예상치 못한 진 대인의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진 대인의 침착한 표정 속에
숨은 초조함에 가까운 심리적 고충을 발견하였다.
그 순간 예인은 아차- 싶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치에 맞지 않게 경우없이 굴었는지 진 대인이 대놓고 호통이라도 친 것마냥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잘 보고 배운 귀족 아가씨가 어찌 이렇게 체신머리 없이 굴었을까.
이번 일로 가장 마음이 불편할 사람은 다름 아닌 진 대인이었을텐데 예비 손주 며느리가
될 자신이 하는 행동이란 고작 집으로 가다 소식을 듣고선 아무리 정혼자의 일이라 하더라도
다 큰 처녀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기수를 돌리어 달려와선, 시할아버지가 될 진 대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커녕 오히려 샤오룬의 벌을 감하여 달라고 어린 아이처럼 떼나 쓰고 있었다.
진 대인이 방금 외친 말은 단순히 예인의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닌, 그녀가 지금 샤오룬을 계집의
치맛폭 뒤에 숨는 졸장부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정곡으로 찌른 말이었다.
얼굴이 발개진 예인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송구합니다"
"샤오룬이 받고 있는 벌은 그 죄에 합당한 것이라 내가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니라,
지아비가 될 샤오룬을 위한 네 마음은 알겠으나 아끼고 감싸주는 것만이 모든 능사가 아닌 것이다."
진 대인의 말은 가시처럼 따가웠다.
말 속에는 아직 정식 부인도 아닌데 정식 부인처럼 구는 그녀의 행동을 꼬집고 있었고
동시에 그 뜻은 곧 예인에게 네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서용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 째, 사건 다음날 관아에 잡혀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던
샤오룬은 문제를 일으킨 벌로 벌써 며칠 째 방에 감금되어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샤오룬은 감금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회계로 돌아가는 길, 하루종일 내린 비로 강가에 이르러 발목이 잡혀 지체하던 예인을 사건이 일어난 밤,
샤오룬이 직접 살인 사건에 연루된 줄 알고 지레 겁을 먹고 이 사실을 알리려 밤새도록 회계로 가는 길을
뛰었던 하인이 만난 것은 천운이었을까, 불운이었을까. 아니면 그 하인이 충정이 강한 것이었을까 혹은
그저 방정맞을 정도로 오지랖이 넓었던 것일까.
아무튼, 그 소리를 듣자마자 예인은 주저없이 다시 소흥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릴 중추절을 위해 아버지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이미 그녀의 안중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돌아온 게 무색할 정도로 집안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일로 예인이 꼭 참석해야 할 집안 행사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건 황 대인에게도 민폐이고
보기에도 좋지 않은 일이니 진 대인이야 당연히 심사가 껄끄러웠을 것인데. 샤오룬은 정말로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충실히 벌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바깥과 단절된채 방에 틀어박혀 죽은듯이 지냈다.
갇히고 난 처음 이틀은 하루 종일 광분하며 진 대인을 만나게 해달라며 발악을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는 죽은 듯 잠잠해졌고 스스로 방문을 걸어잠그고 어떤 누구와의 접촉도 거부했다.
진 대인의 심사는 전에 없이 날카로워져 갔고, 샤오룬은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한데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이 바로 십 년 넘게 자신들과 조우하며 믿고 믿었던 서용이라는 사실의 충격에
집안 하인들마저 암흑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지난번에야 초대된 손님이었지만 지금은 초대가
끝났는 데도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시 돌아온 예인은 말하자면 불청객에 가까운 이방인이었다.
샤오룬에 대한 걱정과 날카롭게 곤두 선 진 대인의 모습. 집안을 감싸고 있는 어두운 분위기에
한 순간 한 순간이 마치 까슬한 모래알에 부대끼듯 불편하기만 했다.
결국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기는 커녕 폐만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예인은 쉽사리 떠나지도
못했다. 자신이 이대로 지금 돌아가 버리면 왜 갑자기 다시 소흥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 황 대인이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고, 자칫하면 회계에 이 일이 알려질 지도 모른다. 그러면 정말로 큰 일이 날지도 모른다.
홀로 방 안에 앉아 예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움을 주자니 모두에게 폐만 끼치고, 하지만 또 가만히 있자니 그럴 수도 없고,
그때 예인은 문득 륜이 생각이 났고, 그녀는 손뼉을 마주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이제서야 그녀의 생각이 났을까?
지금 누구보다 가장 심하게 고통받고 있을 사람은 바로 륜이었을 텐데 말이다.
스스로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고 덕이 없는 사람이라 꾸짖으며 예인은 조심스레
륜을 방문해 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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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은 시녀에게 시켜 알아낸 륜의 집 앞에 서서 이리저리 안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평소에 그다지 친밀한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 또 폐일까 걱정도 되고
요즘 살인 사건 이후 워낙 민심이 흉흉하여 귀족 아가씨가 호위도 없이 (비록 서용의 집은 진 대인 저택
바로 옆에 있긴 했지만) 거리를 나선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예고도 없이 남의 집에 방문하는 것인데 호위까지 주렁주렁 달고 가면 마치
쳐들어 가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한 예인은 일부러 그녀가 가진 옷 중 가장 초라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옷을 흘끔거렸다)
옷을 입고 달랑 시녀 하나만 대동한 채로 륜의 집을 찾아왔다.
하지만 도무지 안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앞으로 형님 아우할 사이인데, 설사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안면이 있고 샤오룬과도
무관하지 않은데다가, 자신이 소흥에 있는데도 모른척 한다는 건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한 번은
방문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인은 상당히 집 안으로 들어서기가 꺼려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냥 문 앞에서만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침 집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륜도 아니고 이화 부인도 아닌, 하지만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창백한 듯 약간 노르스름한 피부에 동글동글하게 생긴, 그리고 선해 보이는 게 륜과 닮은...
예인은 곧 그녀가 자신이 소흥에 처음 온 날 잠깐 보았던 륜의 언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마당에 물을 버리러 나왔던 단은 인기척에 필요 이상으로 놀라며 고개를 들었고,
상대가 예인이라는 것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안녕하세요..."
어설프게 웃으며 예인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단은 어쩔줄 모르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갑자기 다짜고짜, 말도 없이 예인의 손을 붙잡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놀랐지만 예인은 그저 단의 손에 이끌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집 안은 어두웠다.
그리고 아직 따뜻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예인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입을 막았다.
특별히 나쁜 냄새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늘 밝고 따뜻하고 행복한 기운만 맡아오던 그녀에게
이런 뭔지 모를 불행함이 묻어나오는 싸늘한 공기를 마시는 것에 대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문까지 꼭꼭 걸어잠그고 나서야 단은 거친 숨을 내쉬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신 거에요"
거의 다그침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아, 나는 그저 걱정이 되어.."
자신이 륜을 걱정한다는 말이 이상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도 너무나 이상하게
들려 말을 하면서도 망설였지만 정작 단은 그딴 것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어서 돌아가세요, 여기 계시는 걸 보이면 안 돼요!"
단은 예의 따위는 무시한 채 예인과 그 시녀를 마구잡이로 떠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었던 예인은 당황하여 툭 던지듯 본론을 외쳤다.
"류, 륜을 만나러 왔어요"
예인의 등을 떠밀던 단의 손이 멈추었다.
"내가 참견할 일도 아니고... 아니, 어쩌면 내가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단지 륜이 걱정 되어.."
낮인데도 밤처럼 짙은 집안의 어둠속 어디선가 스며들어온 희미한 빛에 회색빛으로
보이는 그 속에서 예인은 꿈벅거리는 단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조금씩 어둠에 눈이 익고 보니
창문이란 창문과 틈이란 틈은 모조리 나무로 못질하여 막아놓은 것이 보였다.
"륜이는 지금 집에 없어요"
한참만에 단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예인은 반문하듯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관아에... 갔어요, 현감을 만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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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 어르신을 만나도록 해주세요,"
"현감 어르신이 네 동무냐? 만나자 하면 만나지게?
허튼 수고 하지 말고 썩 돌아가!"
벌써 몇 시간째 이 실랑이를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험상궂게 생긴 포졸은 눈을 부라리며 위협했다. 하지만 륜은 꿋꿋히 같은 말을 반복한다.
"현감 어르신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어허!
어디 어린 것이 감히! 빨리 가지 못해?!"
귀찮다는 듯 포졸은 거칠게 위협했고, 그 거친 말투에 륜의 눈썹 한쪽이 치켜올라 갔다.
그 모습을 본 포졸은 눈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 지른다.
"아니, 이 어린것이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게 어른에게 눈을 부라려?
네 부모가 밖에서 그리 하라고 가르치더냐? 쯧쯧 과년한 기집아이가 다짜고짜 관에 찾아와서
현감 어른을 보자 생떼 쓰는 것만 해도 알 수 있지. 도대체 그 부모란 작자들이 누구길래!"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륜의 검은 눈에 격렬한 분노의 빛이 담기 시작하였으나 때마침
안에서 나오던 포졸의 동료가 말을 거는 바람에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어, 이 아이 아직도 여기 있군.
참 어린것이 질기구만, 아침부터. 어, 그런데 말이야.
이 아이 '그' 아이 아닌가?"
"무슨- 자네 이 아이가 누군지 아는가?"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
이야기가 이런 단계로 접어들 적마다 느끼는 그 달갑지 않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 상황에서는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며 륜은 잠자코 어서 사내가 자신이 누군지를 알고 길을 비켜줬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 '그'!! '그 살인죄인'의 딸이로구먼!!!"
순간 너무 놀란 륜은 자신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쯧쯧- 어쩐지 기집년 하는 행실이 천박하다 싶더니, 뼛다구가 그 따위니까
과년한 기집년이 부끄럼도 모르고 대가리 꼿꼿이 쳐들고 바락바락 대들지, 하여튼간
이 뼛다구가 천것인 것들은-"
갑자기 포졸의 표정은 아까의 험악함을 넘어 혐오감 섞인 것으로 바뀌었고 그의 말투는
무척이나 거칠어졌으며 그의 말에는 이제 더 이상 한 인간에 대한 배려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거침없이 모욕스러운 욕설을 뱉어내며 포졸은 마치 인간 이하의 것을 쳐다보듯 대놓고
무례한 눈빛으로 륜을 훑어보았다.
륜은 너무나 기가막혀 화조차도 낼 수가 없었다.
"뭘 쳐다보고 있어?! 당장 썩 꺼지지 못해? 이 더러운 년이!"
포졸은 들고 있던 창대로 륜을 사정없이 밀쳐내었고 비틀거리며 물러서다 륜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륜은 그 포졸을 향해 세차게 노려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모욕 뿐이었다.
"야, 이년아, 현감 어르신이 너같이 천하고 더러운 기집년이 보자고 하면 만나주는 그런 위인이시더냐?
하여튼, 너같은 천것들이 더 지랄맞다니까, 그러니까 이 나라가 이 모양이지!"
"내가 왜 천것이오!! 난 어엿한 어염집 여식이오"
분노한 륜이 악을 쓰고 외쳐보지만 포졸과 그의 동료는 코웃음을 친다.
"어염집 여식 좋아하네, 어느 살인 죄인의 식솔들이 양민 취급을 받는다냐?
미친년, 하긴 가진것 없고 배운게 없어 낯짝이 두꺼우니 살인이라는 그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저리 고개 빳빳이 세우고 다니겠지만 말이야."
"-!!"
순간 륜은 '살인은 내가 저지른 것이 아니오!' 라고 외칠뻔 했으나 그 자신이 놀라 그 말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흙바닥 위에 주저앉은 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부탁합니다. 현감 나으리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지만 포졸은 코웃음을 치며 동료와 함께 농담을 지껄이며 안으로 들어갔고 관아의 육중한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닫히었다. 혼자 남은 것은 륜 뿐이었다.
처음에 륜은 망연자실하여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금 자신이 당한 모욕이 기가 막혀서이기도 했으나 더한 것은 현실의 냉혹함이었다.
짐작은 했었지만 자신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가 이리 바뀌었다니.
서러운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상하게도 샤오룬의 얼굴이었다.
태어나서 가장 차가운 대접을 받은 후 태어나서 자신을 가장 귀하고 따뜻하게 여겨주던 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지만 륜은 마음을 다잡고 눈가를 훔쳤다.
이미 자신은 샤오룬을 충분히 이 일에 끌어들였다. 더 이상 그를 곤란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 일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자신이니 자신이 현감을 직접 만나 증언만 한다면 아버지도 곧
풀려날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 먹은 륜은 자세를 단정히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루 왠종일 사람이 드나드는 관아인데 설마 언제까지고 자신을 모른척하고 지나칠리는 없겠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면 곧 현감을 만날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모든일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륜은 굳게 믿고 있었다.
관아 사택의 높은 곳에 앉아 밖을 내다보던 범려가 이 광경을 보았다.
현감과 차를 마시고 있던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리 우스우십니까?"
차를 따르다 말고 궁금한 듯 현감이 물었다.
"마을에 무언가 억울한 사연을 가진 백성이 있는듯 하군,"
범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쭉 빼고 밖을 내다본 관리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대개는 도무지 말도 안되는 한심한 일들을 가지고
타령을 하는 어리석은 작자들이지요."
손수 범려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관리는 하염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찾아와 하소연하는 백성들의
한심함에 대해 투덜대었고 그 말을 들으며 범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관리의 말에 대한 응수가 아니었지만 범려의 반응이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것이라 생각한
관리는 신이 나 더욱 떠벌거리기 시작했다.
"기껏해보았자 누가 제집 뒷담에 열린 호박을 따갔네 아니네 하는 한심한 이야기들 뿐이니
결국은 제풀에 지쳐서 돌아가는 일이 과반수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 돌아갑니다."
"그런가,"
범려는 찻잔을 들어 차의 향을 음미했다.
한낱 시골 관리인 주제에 차는 제법 고급을 내왔다. 물론 손님인 범려를 대접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내온 차의 수준은 시골 관리가 손님에게 최고로 극진히 대접할 수있는 수준을 넘은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럼 그런지 지켜보지."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차를 내려놓으며 범려는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째서 차를 더 들지 않느냐며 당황하는 관리를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부정부패의 썩은내가 진동을 하니 도무지 차를 음미할 수가 없구나,"
아래로 향해 내려가며 범려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아무리 한심한 일이라도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온 백성들을 비웃다니.
사사로운 일이라도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관리가 결코 상급 귀족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범려는 포졸들에게 밀쳐져 땅바닥에 주저앉고는 그대로 요지부동 자리를 잡고 앉던
륜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범하다 할 듯 하면서도 미련하구나,"
륜을 생각하며 범려는 즐거이 중얼거렸다.
지난 오 년 간, 범려는 지속적으로 륜을 눈여겨 봐왔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감지했던 것이 정말 사실인지; 륜이 정말 얼굴만 예쁜 다른 많고 많은
공녀들과 다를 바가 없는지 아니면, 미모로 사람을 홀리는 것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지혜로
사람을 홀릴 재능이 있는 아이인지 알기 위해 말이다.
만일 륜이 단순히 규방에 틀어박혀 평생 아녀자의 덕목이나 외우고 자수를 놓고 난을 치는게 최고고,
조금 더 낫다면 남자들이 읽는 책이나 조금 들여다 보고 남편의 말상대나 되어주는 정도의 '일반적인'
지성을 보였다면 그게 얼마나 뛰어나든 범려는 이렇게 자신이 직접 일선에 나서는 등의 수고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범려가 그 동안 지켜본 륜은 약간 고집스럽고 어리게 굴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심성이 무척이나
곱고 남에 대한 배려가 깊은 아이였다. 특히 어른들을 잘 공경하여 마을에서도 소문이 좋았다.
그 미모 탓인지, 까다로운듯 철없이 굴기는 하지만 함부로 입을 놀린다거나, 장난을 치고 떼를 쓰더라도
단 한 번도 남이 눈살을 찌푸리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고 모든 일에 그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를 하는 편보다는 들어주는 쪽이었지만 나서지는 않아도 늘 뚜렷하게 자신의 주관을 관철시킬 줄
아는 아이였다. 범려는 여러면에서 륜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미모와 지성. 보통이 말하는 지성과는 다른 무언가를 지닌 아이처럼 보였다.
범려의 눈이 맞다면 륜은 특별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어느 누구나 호감을 가지게 할 줄 아는 특별한 지혜 말이다.
그건 타고난 매력이 아닌 '능력'이다. 비록 훌륭한 여인이 갖추어야 할 야무진 손끝이나
살림솜씨는 갖추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리라 싫은 소리를 듣겠지만
그녀는 그녀를 비난한 이들과, 그녀가 비교당했던 모든 여인들, 그리고 그 여인들의 하늘인
남편들 머리 위에 서서 그들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것이다.
범려가 찾고 있던건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을 끌어당기고 그것을 관리할 줄 아는 능력에 그 정도 능력을 자연스레 부리는 머리...
모든 일에 종이와 종이 사이를 자연스레 비집고 지나갈 수 있는 그 머리의 유연함이라니.
동시에 미련스럽다 할 만큼 선한 성품... 참으로 완벽한 조건이 아닐 수가 없구나"
보면 볼수록 이상적이다, 라고 생각하며 범려는 여전히 꿋꿋한 얼굴로 관아의 문 앞에 앉아 있는 륜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시험이다,
네 가치를 마음껏 증명해 보거라"
그에 따라 네 향후 신분도 한낱 노리개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제왕의 패자..... 천차만별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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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미친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남쪽과 해안이 가까운 월나라는 중원의 다른 나라에 비해 날씨가 따뜻한 편이었다.
덕분에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는데도 아직도 여름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뙤약볕 아래 륜은 꿋꿋이 흙바닥 위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어제부터 단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움직이는 것보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더 고역인지 륜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았다.
처음에는 오기와 독기로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포기하고 싶었으나 적지 않은 나이에 옥사에서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간신히 버티었으나 지금은 목적과 동기 모두 상실하고
그저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일념 하나 뿐이었다.
성인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열 여섯 어린 소녀가 하고 있는데도 관아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얼굴을
내미는 이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보며 쯧쯧하며 혀를 찼다.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륜의 의식은 상념의 어딘가를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어제 포졸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에는 샤오룬의 얼굴이 떠올랐고, 현감을 만날 때까지 여기에 있겠다
다짐한 순간에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그리고 곧 시간이 지나면서... 밤이 깊어가고 불이 꺼지어
가는데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것을 보고 조금씩 현실의 상황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륜은 자신이 현감을 만나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의식은 자연스레 서용이 이미 죽은 것처럼 느껴지어 그가 죽은 후의 일이 마치 환각처럼
눈 앞에 펼쳐지었다. 마을에서 쫓겨나는 어머니와 자신...
어쩌면... 그러길 바라지는 않지만 이 일로
이십 년 가까이 살아온 시댁에서 쫓겨나 함께 떠도는 언니 단. 그리고 슬프지만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샤오룬...
샤오룬....... 정말 그럴까?
장면이 바뀌어 샤오룬이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와중에 그 앞에 뛰어들어 막아내는
'
모습을 본다. 애써 자신을 대신해 항변하고 감싸주지만 결국 샤오룬도..... 모진 채찍질을 받는다.
싫다. 그런건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샤오룬이 자신에게서 돌아서는 것 또한 원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 륜은 불과 일주일 전, 샤오룬과 혼인하는 것이 팔려가는 것 같다며 투정부리던 자신의
모습이 어찌나 철없던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지루하다 투덜대던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왜 이렇게 되버렸을까,
무의식 중 떠오른 질문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답으로 떠오른 것은 아버지의 도박이고 납치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게 아닌것 같았다. 그건 그저 뼈대에 붙어있는 살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가 있지만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려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교만하게 살던 못된 마음이겠지.
도박하고 남의 것을 빼앗는 자들이라고 속으로 백안시하던 오만함,
보잘것 없는 뱁새인데 남의 덕에 특권 한 번 누렸다고 본래 신분을 망각하고
황새인척 굴었던 몹쓸 자만심 탓이겠지.
그동안 고치지 않고 오히려 지적 받으면 받을수록 일부러 더욱 심하게 굴던 나쁜 행동들의 벌을
이제야 한꺼번에 받는듯 했다.
마음이 인정사정없이 할퀴고 얻어맞은것처럼 너무나도 아파왔다.
그 와중에 이마에 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된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쨍쨍하던 햇빛이 무안하게 하늘은 새까만 잿빛 구름으로 뒤덮혀 있었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차가운 물방울이 하나 둘 씩 떨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상념에 젖어 멍하니 있던 륜은 보슬비에 온몸이 홀딱 젖는 것도 몰랐다.
금새 날이 짐과 동시에 곧 으슬으슬 뼛속까지 여위는 추위가 밀려왔다.
거리에는 이제 인적도 없었다.
륜 혼자 오도커니 길 위에 앉아 있었다.
추위와는 별개로 외로움과 삶의 허탈함에 대한 생각이 밀려왔다.
"참으로... 집 밖만 나서도 이리 다른 세상인 것을 어리석게도 난 그동안 그것을 모르고
비좁은 내 우물 안만이 세상의 전부라 믿고 살았구나"
부모님과 샤오룬의 보호로 만들어지고 지켜진 그 세상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했었고 그 안에서
잘살 수 있음이 오로지 자신이 잘나서, 자신의 덕인줄 알았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그동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지금껏 잘 살아온 것이 다 누구덕인지 모르고
그 누구 앞에서 혼자만 잘났다 까불어 댄 것을 생각한다면..
어제 포졸에게 맞았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찔끔하고 터져나왔다.
륜은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면서, 울지 않으리라. 지금 깨달은 이 모든 사실을 쓰더라도 모두 삼키고 삼켜,
훗날 내가 크는 거름으로 삼으리라, 라고 굳게 다짐한다.
가슴 쓰라린 그 사실들을 륜이 곱씹는 동안, 한동안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히었던
관아의 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었다. 생각에서 깨어나 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 관비 하나가 기름 종이로 만든 우산 하나를 들고 나와서는 륜에게로 다가왔다.
륜이 그 관비를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올리자 무표정한 표정의 그 관비는 짧막하게 말하였다.
"들어오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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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단 한 번도 다리를 피지도 않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륜이 다리를 피고 일어서서
걷기 위해선 관비의 도움이 필요했다.
관비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드디어 관아 안에 들어온 륜은 건물 안에 들어서자 갑작스런 온기에
잠시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관비는 아랑곳없이 륜을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잠, 잠깐만요. 청사는 바로 저쪽..."
현판을 보니 관비는 륜을 관리가 업무를 보는 청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륜이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인 이 관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륜을 끌고 전혀 알 수 없는 이상한
곳에 그녀를 끌고 와서는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낯선 건물 안에 그녀를 덩그러니 남겨두고 사라졌다.
혼자 남은 륜은 관아 앞에 앉아 있을 때보다 더욱 망연자실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그리고 정말 자신을 부른 것이 현감이 맞긴 하단 말인가?
혹시 관비들끼리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떠돌았고 한참 후 륜이 내린 결론은
'무언가 잘못되었다' 였다.
륜은 이제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헤매기 시작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잠깐동안 이왕 이렇게 된 것 잡힐때 잡히더라도 아버지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가자, 생각하였으나 미로처럼 얽힌 건물 안을 몇 번 헤매다 보니 도무지 그것조차
자신이 없어졌다. 간신히 건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성공했으나 도대체 출구가 어디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륜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혼자 멍하니 서있었다.
추위보다 더 오싹한 절망감이 뱃속에서 울리는 듯 했다.
바보같이 서있는 게 멍청해 보였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치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좁은 벽 안에 꼭 갇히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보아하니 길을 잃은 모양이로구나"
갑자기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기도 헀지만 무엇보다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던 이 건물에서
한참만에 만난 사람이 반가웠던 륜은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뒤돌았다. 그리고... 그녀는 낯익은 얼굴을,
기억이 날듯 말듯 하면서도 왠지 잊을리가 없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범려는 시종이 들고 있는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 아래에 서서, 어둠속에 유난히 환한듯한 호롱불에 비친,
이 파리한 몰골에 놀란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는 소녀를 재미나다는듯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오년 만에 다시 본 소녀는 생각했던것보다 더 아름다워졌고, 생각보다 더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위태로움이 그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했다.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보랏빛이었다. 희고 작은 얼굴 위로 검은 머리칼이 식물의 뿌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범려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을비라 차갑다. 들어올테냐?"
우산을 받치고 있는 자신의 시종 역시 그 차가운 가을비에 흠뻑 젖어가고 있는데도 범려는
손을 내밀어 륜에게 우산의 남은 공간에 들어올테냐며, 그녀의 '의사'를 '묻는다'
여전히 놀란듯 커다랗게 떠진 륜의 눈이 범려의 내민 손과 그의 웃고 있는, 너무나도 선하고
따뜻해 보이는 그 웃음 띈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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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이 전해진 것은 자정을 지난 늦은 밤, 이른 새벽이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고 난 후 서용의 형이 집행될 것이오. 시간에 맞추어 관아 앞 광장으로
와 형에 참석하고. 형이 끝난 후 시체를 수습해가시오"
동일한 소식을 알리는 도사들이 이화 부인과 단이 있는 서용의 집과 진 대인 저택을 찾아갔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절규하는 이화 부인에게 관에서 나온 도사는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살인 행위 외에도 그가 그동안 도박 자금을 대기 위해 값비싼 보석을 훔친 사실 뿐만 아니라
진씨 저택의 곡식을 빼돌린 것이 확인 되었소."
도사는 더 이상 말하는 가치가 없다는 듯 고갯짓으로 회군 명령을 내린다.
한밤중 갑자기 뗴거지로 찾아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던지듯 알리고는 무책임하게 돌아가버린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것은 비로 인해 질척해진 땅위에 난 성난 소떼의 발자국과도 같은 발자국들
뿐이었다. 그것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이화 부인과 문켠에 쓰러지듯 멍하니 주저앉아 버린
단을 짓밟는 잔인한 주술의 표식인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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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진 대인은 갑작스레 한밤중에 들려온 한 통의 서신을 읽고는 짧막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만에 죄인의 형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아무런 수사 상황에 대한 귀띔조차 없었던, 그야말로 대충대충 시간에 쫓기듯
마무리 지으려는 꼼수가 보이는 정황이었다.
범려가 나타난 것이 무언가 좋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건만... 이건 도대체 무엇인가!
소흥 관리는 게으르고 멍청한 자이긴 해도 전 대장군이었던 진 대인이 떡하니 자신의 고을안에 살고
있는 마당에 모든 법과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이리 경거망동하게 행동할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범려가 이 일에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하지만 범려는 현 관직에 있는 자이고, 한 나라의 상국(相國-재상) 으로서 법과 절차를 지키고 수호해야
하는 위치이다. 그렇기에 범려 때문에라도 관리는 더더욱 감히 이런식으로 일을 처리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분명히.... 하지만 왜....
문득 진 대인의 눈에 며칠 전 회계에서 도착한 강연의 편지가 눈에 띄었다.
읽어야지 생각했으면서도 근래 여러가지로 심기가 불편했던데다 보낸이가 다른이도 아닌 조카손자인
강연이었기에 단순히 안부인사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싶어 밀쳐두고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쌩뚱맞게도 지금에서야 갑자기 그 강연의 편지가 강하게 끌린다.
진 대인은 손을 뻗어 강연의 편지를 뜯었다.
그리고 짧막한 강연의 편지를 읽어내려 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 진 대인의 얼굴은 점차 창백해진다.
"이럴수가...!"
편지를 읽은 진 대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말이었다.
믿을수 없다. 지금... 이게 정말 진실이란 말인가?!
진 대인의 안부를 묻는 말로 강연의 편지는 시작하고 있었다.
한 줄 정도 회계의 가족들에 대한 말을 짧막하게 쓴 강연은 그 뒷줄에서 약간 망설이는 듯한
어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중추절 전에 할아버님을 뵐 수 있을것 같습니다.
혹시 벌써 알고 계실지 모르겠사오만, 상국께서 지금 소흥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리고 이번에
회계로 돌아오실 적에 필요한 호위병력을 제가 있는 중앙군에서 차출하길 원하시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상국께서 특별히 저를 지목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올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것 참, 상국께서는 제가 회계 제일 가는 화류가라는 사실을 모르시나 보옵니다. (그렇지만 제가 공과 사 구분은
뚜렷하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공녀들을 호송하는 호위군의 지위를 제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소흥에는 잠깐동안 머물듯 싶지만 할아버님과 샤오룬의 얼굴은 보고 갈 수 있을듯 싶습니다.
소흥에 가면 연락하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무탈하십시오.]
진 대인은 드디어 희미하기만 했던 일의 전말을 대강 짐작할 수 있는듯 하였다.
범려가 5년만에 소흥에 다시 나타난 이유!
의심가는 점이 많았던 살인 사건 그리고 그 결말.
아직도 모든 것의 세세한 부분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범려의 목적만큼은 알 수 있었다.
범려는 기어코 륜을 데리러 다시 온 것이었다!!!
륜을 데려가기 위해 범려는 치밀하게 계산하여 살인사건을 계확하였다.
그리고 그 일의 처리과정을 위해 자신이 직접 소흥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제는 륜을 회계로 데려갈
호위병력까지 미리 다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이건 마치 뛰어난 사냥꾼이 사냥물을 잡기 위해 덫을 치고, 잡아서 요리까지 할 준비를 한
그야말로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이라고 밖에는 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이 계획은 마치 비웃듯 진 대인의 바로 코 앞에서 이루어졌다.
진 대인이 범려에게 보기좋게 한 방 먹은 셈이었다.
"이...이 간교한 놈!!"
치를 떨며 진 대인은 외쳤다.
화가 남과 동시에 진 대인은 범려의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계획에 섬뜩함을 느낀다.
진 대인은 애써 화를 삭히며 조금씩 머리를 짜내어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일들을 조합하여
범려의 계획을 짜맞추어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맞추다 보니 범려의 계획은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행동까지 계산되어 있는듯 했다.
가장 먼저 범려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 소흥에 도박과 탈세와 암거래 등의 불법 행위를 할 수 있는
여관을 세우도록 했을 것이었다.
사건이 일어났던 여관은 지금껏 소흥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성들에서
범죄자들이 건너와 온갖 불법 행위를 해왔던 사실이 드러나 주인은 극형에 처해질 예정이었다.
그만큼 민가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물론,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은 무거운 엄벌에
다스려지는 행위였다. 그런데 범려는 륜을 얻기 위해 그것을 눈감아 준 것이다.
상국이나 되는 범려가 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진 대인은 범려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얼마든지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무대가 세워지고 범려는 전문 도박꾼들을 내려보내 순진한 서용을 끌어 들이도록 했을 것이다.
평생 일과 가정밖에 몰랐다 늘그막에 들어 일을 하지 않아도 살림이 넉넉해진 서용은, 나이가 들어
일도 예전처럼 할 수 없어 무료하던 참에 심심풀이로 한 두번씩 도박에 손을 댔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점차 판이 커지고 빠져나올수 없게 되었고 도박꾼들은 서용에게 친근하게
굴며 그를 이리저리 조종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과 어울리며 서용은 걷잡을 수 없이
도박에 빠져 빚을 지게 됬을 것이고, 빚이 쌓이자 지금껏 친근하게 굴며 도박꾼들은 난폭하게
굴며 돈을 가져오라 강요했을 것이다.
진 대인은 이 와중에 그들이 서용에게 환각 성분이 있는 담배를 피게 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한 두번 피우던 것이 중독되어 서용은 나중에 그것 없이는 견디기 힘들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피우기 위해서라도 그들과 어울리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런 식으로 서용은 조금씩 자신이 관리하고 있던 곳간에 손을 대었고 처음에는 티도
안 날만큼 조금씩 빼돌리던 것이 점차 대범해지어 몇 십 가마씩 빼돌리었고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륜의 보석에까지
손을 대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보석이 서용의 발목을 붙잡았을 것이다.
곡식은 팔아버리면 그만이지만 보석은 팔아도 그 흔적이 남으니까.
결국 서용은 빚을 갚지 못했고 패거리는 그 댓가로 륜을 납치한다.
그러면서 서용에게는 빚 대신 륜을 팔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겠지. 비록 노름과 약에 미쳤었지만 그것에 딸을
팔을 정도는 아니었던 서용은 혼자 륜을 구하러 간 것이다...
처음에는 혼자서 해결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도움 받는 것을 늘 불편하게
생각했던 이화 부인의 강직한 성격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러다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이화 부인이 차마 진 대인는 알리지 못하고 샤오룬에게 알렸겠지.. 그리고 샤오룬은
영문도 모르고 그저 륜이 위험하다니까 끼어든 것이고.
그러나...가장 큰 문제는 이 살인사건이다.
샤오룬의 말로는 서용과 죽은 사내, 그리고 패거리의 우두머리. 이 순서대로 달라붙어 밀치다가 난간에 밀리었고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가운데 껴있던 사내가 떨어져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혼자 서있던 건 서용
하나 뿐이었다. 세 사람이 복잡하게 엉켜있던 데다가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서용이 혼자 서있었으니 서용이 범인이라는 것이다.
여러가지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남은 패거리 중 하나가 옥사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또 다른 하나는
도망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우두머리 사내로 추정되는, 무척 심하게 훼손된 시체가 소흥 근처에서 발견
되었다. 결국 남은건 서용 하나 뿐이다.
범려의 계획은 그야말로 물샐 틈 하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패거리가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확한 증인도 없는 상태에서 서용이 범인이 아니라 우길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이렇든 저렇든 처음부터 범인은 서용으로 지목되어 있었던 것이다.
범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계획을 더욱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나머지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너무나도 손쉽게. 범려는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다음날 소흥에 나타났다.
아마 이 주변 어딘가에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사건을 주시하다 일이 터지자 마무리를 위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날 관아에서 진 대인과 모습을 마주쳤다.
이 부분에서 진 대인은 진심으로 범려에게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범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 대인이 개입하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오양 진씨는 그 높은 세도와 권세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더러운 정치적 일이나 권력남용에 연루된
일이 없었다. 오양 진씨 일가라면 죄를 지으면 지은대로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하고 국법을 당연히 준수해야 했다.
결코 가문의 힘을 이용하여 벌을 피해나가려 하면 안된다.
청렴결백이 가문의 신조나 다름없는 오양 진씨의 당주인 진 대인. 더군다나 대립 관계인 범려가 있는 앞에서
어찌 손자와 서용의 죄를 경감해 달라고 감히 '손을 쓸' 생각을 하겠는가?
게다가 진 대인은 서용에 의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귀족을 농락한 죄는 관용을 베풀어도 그 처벌을
피해나갈수 없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거나 그를 위해 손을 썼다간 그의 체면이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판이었다. 범려는 그것까지 철저하게 계산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서용의 처형이 결정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비상식적이긴 하지만 강연의 편지에서 본 범려가 공녀 호송을 위해 호위군을 요청했다는 말 그대로
범려는 모든 일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이제 그 마지막 장인데 그깟 법 따위야
우스운 일인 것이다. 그가 서용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라에서 강력하게 금하고 있는 불법 도박장 개설을
눈감아준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그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선 못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서용의 처형 문제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뒤에 범려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진 대인의 머릿속에 강하게 드는 의문 한 가지.
어째서 호위를 맡은 지휘관으로 강연을 지목했을까.
범려는 끝까지 진 대인을 견제하며 희롱할 셈인가?
혈족인 강연이 사촌의 연인인 륜을 치욕의 길로 호위하여 데려간다.
철저하게 샤오룬을 우롱하고 비웃는 것이었고, 진 대인을 시험하는 것이다.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오양 진씨 일가의 꼬투리를 잡겠다는,
하! 범려 이놈, 욕심이 많다 많다 네 놈 같은 놈은 또 처음이로구나!
"일석이조, 일석삼조를 네 놈이 기어코 얻고야 말겠다는 것이구나."
진 대인을 시험한다 함은 혹시라도 진 대인이 갓난아기때부터 보아온, 어쩌면 손주 며느리가
됬을 륜에 대한 마음에 강연을 시켜 그녀를 도망시켜 주라 명령할까, 두고보는 것이고.
설사 진 대인이 그렇지 않아도 만일 륜이 제 스스로 도망간다면 책임은 강연에게 돌아간다.
공녀를 놓치는 일은 굉장히 큰 죄였기 때문에 강연은 그 일로 질책을 넘어 그의 가문까지도 크게
벌을 받을 것이다. 늘 완벽함으로 무장한 오양 진씨의 꼬투리를 어떻게 해서든 잡아서 훗날 크게
이용하겠다는 범려의 야심이 보인다.
"제법이구나,"
이를 갈며 진 대인은 중얼거렸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진 대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당한 것은.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범려는 단순히 륜만을 노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실용을 따지는
그로써는 계집 하나를 얻기 위해 굳이 이리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진 대인과 오양 진씨를 향한 일종의, 그것도 상당히 대담한 선전포고였다.
일족과 혈족이 아니더라도 집안의 하인 하나까지도 집단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보호하는 오양 진씨에게
그것도 차기 당주의 후첩이 될 여인을 이런 식으로 빼돌리며 도발한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그 놈을 너무 풀어 주었구나.."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가 왕 행세를 한다더니.
왕권까지 허수아비로 만들며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선대의 만행에 대한 속죄의 표시로 그 동안 철저하게
조정에서 모습을 숨기고 은둔하던 오양 진씨였다. 그리고 범려는 아마도 그것을 오양 진씨의 숨이 다한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진 대인은 이를 아드득 갈았다. 그의 눈에는 한 번도 보인적 없는 살기가 번뜩이었다.
진 대인은 이것이 범려의 계획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였다. 범려가 소맷자락에 마지막 결정적인
패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패가 공개되는 순간, 이것은 완벽한
범려의 승리였다. 진 대인과 오양 진씨 하나라고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에게 범려가 어떤자인지를
완벽하게 각인시킨 조용하고 작은, 하지만 그 어느 대전(大戰)보다 더 많은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한
무섭고 차가운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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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많은 분들은 제가 이제 소설 중단했다고 생각하셨을지도;;
그동안 여러가지 일들이 있어서 소설을 쓰고 올릴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일단 컴퓨터를 한달이 넘도록
소설을 쓸만큼 오랫동안 할 수가 없었달까요.
어쩄든 다시 한 번,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업쪽은 앞에 ☆ 달아주세요^^
첫댓글 ☆ 기다렷어요!!!!! 범려두 무섭구 무엇보다 륜이가 제일 불쌍해요ㅜㅜ 잘됫음 좋앗을텐데..역시 재밌네요ㅋㅋㅋㅋㅋㅋ
ㅎㅎ 참 늦게왔죠; 죄송합니다. 맘은 늘 빨리 올려야지 하면서도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올라오기만을 기다렸어요.ㅠㅠ 작가님 화이팅!! 정말 재미있어요,
안녕하세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그래도 잊지 않고 이리 댓글도 달아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에요-_-;;;
☆작가님 이제서야 오시다니요!!!!!!!!!!!!!!이제부터는 계속 꾸준히 올리실꺼죠??!! 중간에 멈추시면 절대 안되요 ㅠ ㅠ
죄송해요~~>ㅁ<;; 앞으론 꾸준히 올릴거에요ㅎㅎㅎ
☆깜짝 놀랐어야 이제 연재 안하시나 했거든요 ㅎㅎ 이제 다시 자주 뵐수있겠죠?ㅎㅎ
ㅎㅎ 살짝 부담스러운데요? 최대한 자주 뵙도록 노력할게요!
☆정말 륜이가 불쌍한거같애요ㅠㅠ둘이 잘됏으면햇는데,,,성실연재해주세요ㅋㅋㅋㅋ
ㅎㅎㅎ 뭔가 꾸짖는 느낌이 납니다ㅎㅎ 성실연재... 정녕 이건 제게 힘든 일일까요ㅠㅠ
☆ 너무 오랫만이잖아요 ㅜ 어떻게 해.. 어쩐지 집요한 범려라고 했는데, 정말 무섭도록 치밀하게 륜이를 데려가려고 하네요. 재밌어지는데, 힘내세요 !
죄송해요~ 너무 늦게 왔어요ㅠㅠ 꾸준히 성실 연재 하도록 노력할게요(응? 정말?ㅋㅋ)
☆ 너무 늦으신거 아녜요?ㅠㅠ 암튼.....범려 너무 얄밉네요....똑똑하다고 해야할지 간사하다고 해야할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ㅠㅠ 에휴, 이 죽일놈의 귀차니즘 탓이죠 모...-_-
☆계속기달렸는데 이제 오셨네요.....ㅜㅠ근데 점점 무서워지네요 ㅎㅎ
죄송합니다. 아, 제가 진짜 여러사람 힘들게 만드는것 같네요-_-;;
경국지색이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