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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죽 화(花)06
힘없이 터덜터덜 길을 걸어오는 설죽화.
걸어온 지 얼마 안돼서 설죽화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도령, 앞에서는 애써 웃으며 밝은 척을 했지만 상중이었던 도령의 모습이 처량하고 안돼 보여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준 마지막 선물이 도령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를 맞으며 설죽화는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태검도령이 죽순마을을 떠날 무렵, 설죽화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떠나고 말았다.
아니, 설죽화가 도령을 피해 숨어버렸다. 도령의 얼굴을 보면 혹, 자신도 모르게 울까봐 그것이 겁이 났다.
태검에게 늘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설죽화는 도령이 말을 타고 길을 떠나는 모습을 꽃나무 위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키가 작은 나무여서 그런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태검도령의 떠나는 모습을 볼수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태검도령이 죽순마을을 떠난 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설죽화도 예전의 설죽화로 다시 돌아와 사내아이마냥 동네 아이들을 호령하며 마을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태검 도령이 생각날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왜냐하면, 근래에 관심은 아버지의 서신에 온통 쏠려있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서신이 오는 날에는 대나무 숲에 들어가 그곳에서 서신을 읽곤 했다.
전쟁이란 것이 금방이면 끝날 것 같았는데 언제 끝날지 아득하기만 했다.
설죽화는 아버지의 얼굴도 본지가 오래되어, 금세 잊어버릴 것 같아 불안한 마음도 살짝 들었다.
“어머니! 나 왔소, 오늘은 아버지한테 서신 없었소?”
오늘도 동네 안을 주름잡고 다닌 후에
신고 있던 짚신을 내팽개쳐두고 설죽화가 방으로 뛰어 들어가며, 들뜬 목소리로 어미를 찾았다.
헌데, 방안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돌아서 앉아있는 홍씨 부인의 어께가 파르르 떨렸다.
“.....어머니?........”
설죽화가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내자 홍씨부인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설죽화를 마주했다.
어머니의 모습에 설죽화는 당황하여 할 말을 잃은 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찌 하냐…….이 일을 어찌하면 좋아...... 네 아버지가…….”
울음 섞인 홍씨부인이 내려놓는 그것은 서신이었다.
설죽화가 그렇게 바라던 아버지의 서신.
설죽화는 침을 한번 삼키더니 어머니가 건네준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이 땅의 침략무리 천만 번 쳐들어와도
고려의 자식들 미동도 하지 않네.
후손들도 나같이 죽음을 무릅쓴 채 싸우리라 믿으며
나 긴 칼 치켜세우고 이 한 몸 바쳐 내달릴 뿐이네」
서신에 설죽화의 눈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신을 들고 있던 설죽화의 두 손이 덜덜 떨리더니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그런 설죽화를 가슴팍으로 끌어안으며 같이 흐느끼는 모녀.
“아버지가 네게 마지막으로 남긴 시라고 하더구나. 네가 이것을 항상 간직하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이셨다고…….
네가 만일 사내였다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을 터인데…….”
말끝을 흐리는 홍씨부인을 커다란 두 눈으로 바라보는 설죽화.
이내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어머니, 나 잠시 나갔다 오겠소.”
“어디를 말이냐?”
“아버지 있는 곳에…….”
설죽화가 아버지의 서신을 오른쪽 손에 쥐고서 걸어간곳은 대나무 숲이 있는곳이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던 그곳... 대나무 숲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리고는 어께를 들썩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금방일줄 알았다. 아버지가 금방 돌아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군으로 가기 전 아버지가 보였던 미소가 생각이나 울음은 더욱 멈춰지지 않았다.
‘아버지, 금방 오겠다고 나랑 한 약조 잊었소? 나랑 어머니는 어찌하라고....아버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동안을 울었다.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많이 울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퉁퉁 부어 빨개진 눈을 한두 번 깜박이더니 아버지의 서신을 다시 한 번 열어본다.
「후손들도 나같이 죽음을 무릅쓴 채 싸우리라 믿으며
나 긴 칼 치켜세우고 이 한 몸 바쳐 내달릴 뿐이네」
시를 다시 찬찬히 살펴본 설죽화의 머릿속으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칼을 들고 용감하게 적들을 무찌르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다, 한 거란인이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는 모습을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끔찍한 상상에 설죽화는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다.
‘아버지가 오면 이곳에서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아버지한테 무예도 계속 배우고...아버지가 해주는 전쟁얘기도 듣고, 또 아버지랑....“
울컥 눈물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아버지, 난 어떻게 해야 하오…….내가 사내였다면 어머니 말대로 벌써 칼을 들었을 것이고,
아버지 유언 지킬 수 있었을 텐데........내가 계집인 것이 지금처럼 후회스러운 적이 없었는데……. ‘
아버지의 서신을 바라보던 한탄하던 설죽화의 머릿속으로 문득 한 가지 말이 떠올랐다.
“나 강해지고 싶다”
예전, 오래전 들은 말은 아니었지만 마치 오래전에 들은 것 같은 그말.
태검도령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도령은, 나처럼 강해지고 싶다 했는데, 나 같은 계집이 무엇이 강하다고 그런 말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설죽화.
그러다, 눈을 감고 풀밭에 누워버렸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면서, 태검도령이 했던 말과 겹친다.
한참을 그 상태로 누워있었다.
그리고 대나무사이 하늘이 노을빛에 물들어갈때쯤 설죽화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내, 전에 볼 수 없던 굳은 의지의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나무 숲을 빠져나왔다.
“너 괜찮은 것이냐? 네가 혹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봐 이 어미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아느냐?”
대나무 숲에서 돌아온 설죽화를 껴안으며 애처롭게 말하는 홍씨부인.
그런 어미에게 안긴 설죽화의 표정은 마치 넋 놓은 사람처럼 표정변화가 없었다.
“어머니…….”
“왜 그러하냐?”
“예전에 아버지가 나한테 이렇게 말씀했던 적이 있있소.
사람은 한번 태어나고 죽으면 그만인데 죽기 전에 해봐야 할 것이 있다고.
부모에게 죽는 순간까지 효를 다하고, 정인에게 늘 사랑과 아량을 베풀고.....
그리고......나라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목숨을 다해서 싸워 이겨라…….”
넋 놓은 무표정으로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는 설죽화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홍씨부인.
“어머니 말대로 내가 사내였다면 아버지 유언을 받들 수 있을 텐데…….
조금이라도 이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
말을 흐리는 설죽화가 갑자기 두 눈에 힘을 주더니 굳은 각오가 된 얼굴로 홍씨부인을 바라봤다.
“사내가 아니라면 사내가 되겠소.”
설죽화의 말에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은 홍씨부인
“너,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이냐? 사내가 되겠다니, 이게 무슨 청천 벽력같은 소리인 게냐.”
설죽화의 말에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어찌 하지 못하고 설죽화를 바라보는 홍씨부인
“네가 제정신인 게냐? 지아비를 잃은 것도 믿기지 않는 나보고 지금 네가 하는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어머니의 말에 분노 섞인 말이 튀어나오는 설죽화.
“원수를 갚겠소. 아버지의 원수, 나라의 원수.......”
홍씨부인은 설죽화의 말에 당황하여 설죽화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홍씨부인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 계집아이로 보이기만 했었는데,
이 아이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무관 집안에서 계집으로 태어나 받았던 서러움이 문득 홍씨 부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허나, 이 아이 만은 험한 길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여느 처녀들처럼 고운 모습으로 사랑하는 이와 정답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헌데,설죽화 이 아이는 정반대의 길을 가겠다고 우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홍씨부인은 정신이 아득하여 잠시 휘청하더니 눈을 희미하게 뜬 채 설죽화를 바라보았다.
또랑또랑한 검은 두 눈에는 굳건해 보이는 의지가 보이고, 굳게 다문입술에서 지아비인 이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어찌해야 합니까, 이 아이 고집이 보통이 아닌 것을.......이 아이 뜻대로 해야 합니까.’
안쓰러운 표정으로 설죽화를 바라본다.
설죽화가 마음을 추스르더니 눈물이 가득고인 눈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계집이었던 설죽화는 이세상에 없소.
사내인 설죽으로 다시 살아가겠소.”
설죽화가 어머니에게 말한 마지막 다짐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고려와 거란과의 2차전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늘 한적하고 고요했던 죽순마을에서 통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군으로 나갔던 사내들이 주검이 되어 돌아오거나, 아예 시신조차 찾지 못하여 아비를 잃은 아이들이 점차 늘어갔다.
설죽화도 그중에 한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느 아이들과 다른 마음이었다.
설죽화는 현실에 순응한 채 그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이 그녀를 변하게 만들었다.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만 갔다. 언제부터 그렇게 빠르게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는 변화했지만 죽순마을의 대나무들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마을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첫댓글 오우오우오우. 죽화 화이팅 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젠 죽이네. 그냥. 설 죽~
두 아역의 이미지가 스캔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