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 콜마트, 이 달의 직원
7월 말에 있었던 일이다. 삼례에서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억지로 찾아내 본다면 제일 교회의 가을 운동회 정도? 나는 몇 해 전에 어머니를 따라, 삼례초등학교 체육관에서 개최된 제일 교회의 운동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모인 사람의 숫자는 많아야 3백명에서 4백명 정도였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이 모임에는 적게 잡아도 4백명에서 5백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였다. 물론 모인 사람이 많은 것이 나에게 좋을 것은 없다. 전부 라이벌들이니까. 서둘러 달려갔더니 매장 안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낙담했다. “경차(輕車) 한 대가 공짜로 생기나 했더니,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삼례 사람들이 다 나왔구만.”
삼례 콜마트 매장 앞에는 시보레 스파크 한 대가 우아하게 리본으로 장식을 한 채 높다란 받침대 위에 올라가 의젓하게 서있다. 거의 여섯 달 정도 저러고 서 있는데, 이제 저 물건의 주인이 가려지는 것이다. 여섯 달이면 긴 기간이다. 햇볕과 비, 바람 속에서 중고차로 변해가는 그 물건을 보면서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밤에는 카바를 씌워놓는 것일까?” 내가 경품에 이토록 큰 기대를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기대를 넘어 거의 자신감까지 가졌는데, 그것은, 나는 경품권을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 달 동안 나는 콜마트에서만 쇼핑을 했다. 만원 당 한 장을 주는데, 그 동안 내가 모은 경품권은 50장이 넘었다.
추첨 시간이 다가와 집을 나서야 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냥 경품권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추첨 장소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최측에서 당첨 번호를 발표할 때 나는 재빨리 내 경품권의 번호를 확인해야 하는데, 50 개나 되는 번호를 어떻게 재빨리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잘못했다가는 당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르고 넘어가는 억울하디 억울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25 장은 와이프에게 맡기고, 내 몫의 25 장을 번호 순으로 정리하였다. 와이프는, 내 방식을 비웃으면서, 백지에 경품권 번호를 옮겨 적었다. 콜마트에 도착한 후에 알게 되었지만, 백지에 경품권 번호를 순서대로 옮겨 적은 사람이 제일 많았다. 백지에 경품권을 정성스럽게 붙여 가지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50 장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 옆의 사람은 간첩들이 쓰는 난수표처럼 수많은 숫자가 빽빽하게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나는 또 낙담했다. 자신감을 말할 것도 없고 기대감과 투지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여섯 달 동안 내가 이 가게를 찾은 것은 경품 때문만은 아니니까.”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약 1년 전의 어느 날이다. 나는 면도기 진열대 앞에 서서 고심을 하고 있었다. 이 날 갑자기 전기면도기를 버리고 면도칼을 끼워 쓰는 옛날 면도기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트에 나왔는데, 의외로 상품의 종류가 많아 선택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쉬크니, 도루코니, 제품의 종류도 다양했지만, 면도날 카트리지가 포함된 상품도 있었고, 면도 거품이 포함된 상품도 있었다. 나는 이 물건, 저 믈건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면서,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 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면도기 사시려고요?” 면도기 진열대는 계산대 근처에 있었는데, 계산대에서 일하는 캐쉬어 아가씨가, 계산하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나에게 온 것이다. “종류가 많아서 고르기 힘드시지요? 면도기는 저도 잘 모르는데......” 그러게 말이다. 여자가 면도기에 대해 뭘 알겠는가?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아랑곳없이 참견을 해댔다. 나중에는 아예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내가 결정을 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기세를 보였다. “거 참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어쨌건, 나는 이 아가씨의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다.
몇 주 뒤에 계산대에서 그녀를 다시 보았다. 내가 산 물건을 하나하나 집으면서 계산을 하다가 그녀는 면도날 카트리지에서 멈춘 채 나를 쳐다보았다. “이 면도날이 사용하시는 면도기에 맞는 거예요? 상표가 다르면 안 맞는다는 거 아시죠?” 물론 그녀가 들어 올린 면도날 카트리지는 내가 지난 번에 산 면도기와 동일한 상표(쉬크)였지만, 이 아가씨의 참견 혹은 친절이 싫지 않았다. 알고 보았더니, 이 아가씨,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내 장바구니에 귤 봉지가 담겨있으면, 귤 봉지를 쳐들어 혹시 아랫 쪽에 짓무른 것이 숨겨져 있지나 않는지를 확인하고, 그런 것이 있으면 자기가 가서 좋은 것으로 바꾸어준다. 내 장바구니에 쥬스용이라는 딱지가 붙은 사과 봉지가 있으면, 내가 쥬스용인지를 알고 고른 것인지를 확인해 본다. 쇼핑을 하다가 물어 볼 것이 있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이상한 일이지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 아가씨가 불쑥 나타난다. 나에게는 포인트를 적립해 주는 적립 카드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것을 만들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여 나는 그것까지 만들었다.
작은 안경을 썼으며 통통한 편이다. 나는 이 아가씨와 금새 친해졌다. 우리 사이에는 비밀도 생겼다. 나에게는 봉투값 20원도 받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경품권은 1만원 당 한 장을 주게 되어있지만, 내가 1만 5천원 정도만 구매해도 두 장을 준다. 나는 삼례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한 번도 웃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낼 때가 많지만, 삼례 콜마트에 가는 날은 그렇지 않다. 그 아가씨가 친절하게 구는 상대는 나만이 아닐 것이라고? 비밀이 있는 상대도 나만이 아닐 것이고? 물론 그렇다. 어느 날 저녁 계산대에서 줄을 서있을 때의 일이다. 내 앞에서 60대의 아저씨가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이 아가씨의 친절증 혹은 참견병이 또 발동했다. “이 아이스크림, 2천원 짜리인 줄 아시고 고르신 거예요? 800원 아니거든요.” 아저씨가 움찔했다. “본 젤라또는 할인이 안 되거든요.” 한 순간 망설이던 그 아저씨는 체면보다 실속을 택했다.
콜마트의 맞은 편에는 삼례에서 제일 큰 제일마트가 있었는데, 콜마트가 들어선 뒤, 이마트 에브리데이로 바뀌었다. 콜마트 옆에는 (아마도 제일마트 때문에)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대한민국마트가 있었는데, 콜마트가 들어선 직후 숨이 멎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는 자그마한 우성수퍼가 있었는데, 그것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젊은 콜마트 사장은 파격적인 경품을 내거는 등 자기가 운영을 잘해서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그 날 시보레 스파크는 40대 남자에게 돌아갔다. 그 남자가 손을 흔들면서 뛰어나오자 삼례 콜마트를 애용하는 500명의 삼례주민들은 신사적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화장지 한 통 못 받았고, 신라면 한 개 못 받았지만, 나도 박수를 쳐주었다. 시보레 스파크는 추첨일 이틀 뒤부터 보이지 않았다. “아, 이제 무슨 재미로 살아간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제 무슨 재미로 살아간다는 말인가 하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던 나에게 새 희망이 생겼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우리 아파트 앞 5거리에 플래카드가 하나 내걸렸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경축: 고산 시장 재개장/ 경품 대잔치/ 1등 경차 한 대”
첫댓글 오랜만에 영태교수님 글 접하니 참 반갑네..삼례도 골목 상권 경쟁이 치열하구나..경차 희망 이루려면 고산시장에서 구매 해야겠네..근데 고산시장에도 "이 달의 여직원"이 있을라나?? ㅎㅎ
꿩먹고 알먹기 쇼핑이네. 나도 멋지고 상냥한 슈퍼 아줌마 찾아야겠네.
그런데 이 아가씨, 그만 둔 것 같아. 안 보이더라고.
이마트 에브리데이에서 빼 간거아녀?....그쪽 애들 특기거든ㅋㅋ
새로 알게 된 사실인데, 콜마트가 이마트 에브리데이에 손님을
빼앗기는 중이라고 하네.
상품 경차와 당찬 아가씨 점원과 조교수의 이야기 잼있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