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소주 한잔하러 포장마찻집에 가보면 거긴 사장들만 오는지, “사장님”이란 말이 자주 귀에 들린다. 사장도 아닌 사람을 사장이라 그렇게 불러 주는 것과, 직책이 있는 사람을 그 직위에 알맞게 불러 주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직함이나 직위는 그 사람이 수행하는 업무와의 관계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 준다. 예수님께 붙여진 칭호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이다.
‘주’라는 칭호의 구약적 이해
사도 신경의 두 번째 조항에서 ‘그(하느님) 외아들’에 이어 또 다른 칭호인 ‘우리 주’를 접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를 살펴보게 된다. ‘주’라는 개념은 물론 성경적인 개념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헬레니즘의 영향하에 있던 종교나 문화에는 ‘신의 아들’이란 표현보다 ‘주’라는 표현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로마의 황제를 자주 ‘주’라고 불렀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레니즘의 ‘주 숭배’ 사상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신 자신과 제자들이 가장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던 구약성경의 사상과 배경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주’는 원래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하느님의 경칭으로, 또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인 야훼 대신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고(기원전 586년) 근동 지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회당에 모였는데, 그때 성경을 읽고 시편을 노래할 때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너무나 성스럽게 여긴 나머지 그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나의 주님)란 명칭으로 대신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에 히브리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 ‘아도나이’에 해당하는 ‘기리오스’(Kyrios : 주)란 희랍어를 선택하였다. 히브리인들이 YHWH(야훼)라 쓴 것을 기리오스라고 번역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주’ 개념의 이해는 명확히 성경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발음조차 하지 않고 그러한 경칭으로 부른 것은 하느님의 권력과 지배의 최고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예로는 ‘주’(탈출 23,17; 이사 1,24), ‘온 세상의 주권자’(미카 4,13), ‘모든 민족들의 주님’(시편 136) 등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는 야훼의 거룩한 이름과 ‘주’라는 칭호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주’ 칭호와 예수 부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잘 입증되는 바와 같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을 가장 간략하게 나타내는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유일신 사상에 철두철미한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주님이심을 신명기의 말씀(흔히 ‘쉐마’라고 부른다.)을 들어 확언하시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가는 계명이라고 강조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 12,29-30; 신명 6,4-5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성경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자주 전해 준다.
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것은 주로 부활 후의 사건을 서술할 때이다. 비록 루카 복음에서는 자주 ‘주’라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지칭하지만, 이는 성령 강림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회고하면서 예수님을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보고 있다. 부활 이전의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자주 불렀고 부활 후에는 ‘주님’으로 부른다. 특히 우리가 기억하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란 토마 사도의 대답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긍정하는 신앙 고백의 대표적인 대목이다.
성령 강림을 경험한 베드로 사도가 다른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향해 행한 첫 설교에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 고백한 것도 부활 체험과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활 체험이란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와 구체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의미이다. 이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토마 사도의 신앙 고백과 같은 의미이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 2,36).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서는 자주 예수님을 ‘주’라는 칭호로 부르는데, 예수님이 주님의 지위를 획득하신 것은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필립 2,8-9 참조). 이때 예수께 붙여진 ‘주님’이란 칭호는 단순한 ‘선생님’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구약의 백성이 부르던 야훼를 대신하는 ‘주님’이다.
부활로써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승리자가 되셨으므로 이제 그분께 강생 이전에 성부와 함께 누리시던 그 영광을 돌려 드림이 마땅하였고, 그러한 이유에서 부활 이전의 호칭인 ‘사람의 아들’, ‘선생님’ 등의 칭호 대신에 ‘주님’으로 부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주님이시며 구약에서 야훼에 관하여 언급된 귀절이 그분에게 적용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사도 2,34-36 등 참조). 예수께 ‘주님’이란 칭호를 부여한 것은 결국 나자렛 사람 예수는 하느님이시고 야훼이시며, 전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전능의 주권자이심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 주’ 신앙 고백의 의미
‘우리 주’라는 칭호가 부활 체험과 관계가 있다는 의미는 동시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어떠한 실제적 관계가 놓이느냐를 밝혀 준다. “주여, 어서 오소서!”(‘마라나 타!’, 1코린 16,22; 묵시 22,20)라는 초세기 공동체 때부터 반복되던 이 전례 기도문은 나자렛 예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함을 고백한다. 주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의 생애를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셨고 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지상 파견 목적을 완성하셨으며, 성부 오른편에 좌정하시어 주님으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다. 이젠 그리스도인의 모든 운명이 그분께 달렸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권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과 만물에 마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하늘과 땅 위의 모든 힘들과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모든 힘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어느 이름보다도 빼어난 이름”(필립 2,10-11)이란 표현으로 설명한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으로서 생사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과 만사의 모든 운명은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세상의 모든 악의 문제나 모순 덩어리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주님의 재림이 지연됨으로써 부활 체험과 현실 상황 사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신앙의 내외적인 갈등을 겪게 마련이었다. 주님이 이룩하신 구원의 의미 문제, 현실에 산재한 악의 문제,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육신의 감각으로는 다시 확인할 수 없는 데서 따라오는 신앙과 현실 사이의 괴리들에 직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통치권의 의미’를 새로이 조명하게 되었다.
또한 ‘주’에 대한 신앙 고백이 내포한 외적인 갈등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주어졌다.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고백하던 초대 신자들의 생활은 당시의 정치 권력층과의 마찰을 빚게 하였으며, 특히 황제 숭배의 강요 앞에 굴할 수 없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국가의 통치자들, 특히 황제의 권한을 신격화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주권은 종교 신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 전체에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님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영광중에 승천하신 주께서 이 세상을 완전 정복하시어 주권을 행사하시기 위해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시 오실 것이라 희망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빗나간 것이었음을 차츰 깨닫게 되고,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시간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게 된다. 즉 주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지만, 현재는 교회를 통하여 주께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주님의 통치를 교회는 자신의 삶으로 증거해야 했다.
이러한 교회의 삶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야 하고, 또 자신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전권을 전적으로 수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늘 새롭게 잉태되고 탄생되어야 한다. 성자께서 인간으로 탄생하신 그 자체가 분명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 통치의 모습이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는 모습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상 천하를 다스리시는 모습이다. 교회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통치 모습에서 자신을 새롭게 할 때 비로소 교회는 ‘우리 주님’의 주권을 이 세상에 한껏 확장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진동하게 하는 권능자로서가 아니라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 상처받기 쉬운 한 아이로 오셨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전능의 힘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약함을 받는다. 그러나 그 약함은 어느 힘보다 더 큰 힘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의 이러한 주권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란 토마 사도의 신앙 고백을 우리 모두는 마음으로 외쳐야겠다. “마라나 타 - 주여, 어서 오소서!”
[경향잡지, 1994년 4월호, 하성호 요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