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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금론사(古今論事)
원소(袁紹)에 대하여 얘기하면 후세인들에게 남긴 이미지는 광망자대(狂妄自大), 강퍅자용(剛愎自用)이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우리 집안은 사세삼공(四世三公)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소위 "사세삼공"은 원소의 가족 4대에 모든 대에 삼공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세삼공"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그리고 원소의 가족은 어떻게 "사세삼공"을 달성했을까?
"사세삼공"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한 가족중에 한 사람이 "삼공"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평생 자랑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삼공은 예로부터 있었다. 다만 서로 다른 왕조마다 삼공의 의미는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 주(周)나라의 삼공은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이다. 진(秦)나라의 삼공은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이다. 서한(西漢)의 삼공은 대사공(大司空), 대사마(大司馬), 대사도(大司徒)를 가리킨다.
동한에 이르러서는 광무제 유수가 황권을 드러내기 위하여 삼공에서 "대(大)"자를 빼버리고 사마를 태위로 고친다. 그리하여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태위(太尉)가 된다.
삼공은 각각 업무를 나누어서 관장했다. 태위는 군사를 책임지고, 사도는 예의교화를 책임지고, 사공은 건설공사를 책임졌다. 여기서 설명해야할 점은 성을 건설하고 방어공사를 하는 것은 사공의 직책이지 태위의 직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유수가 고의로 제약하여, 삼공의 권력은 견제를 받아 건의권만 있지 결책권은 없었다. 그렇지만 삼공은 대신들 가운데 여전히 가장 높은 지위였다.
이들 보다 위에는 대장군만 있다. 그러나 대장군의 위치는 외척을 위해 남겨둔 것이었고, 승진해서 맡을 수 있는 직위가 아니었다. 즉, 삼공이 대신의 최고위직인 것이다.
삼공의 반열에 드는 것은 아주 어렵다. 먼저 충분한 경력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아주 높은 위망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 자신의 능력도 있어야 한다.
이런 요구조건은 아주 높다. 다만 같은 시기에 이런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도 몇십명이다. 삼공에 오른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이다. 이는 바로 한 가족에 삼공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평생 자랑할 수 있게 되는 이유이다.
원씨가족이 "사세삼공"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 가족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소가 항상 "사세삼공"을 입에 달고 다닌 것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원씨가족은 어떻게 "사세삼공"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
원안(袁安): 사세삼공의 시작
여남원씨는 오랫동안 보통의 지방호족일 뿐이었다. 세가대족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원씨집안이 나중에 최고의 명문집안이 되고, 사세삼공의 성취를 이룬 것은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그는 바로 '원안'이다.
원안은 원소의 고조부이다. 즉, 원소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남원씨의 굴기는 겨우 몇대를 거친 것이다.
그때는 과거제도가 없었다. 관료를 성공하는데 우선, 집안을 보았다. 그 다음으로 능력, 인품을 보았다. 원씨집안의 당시 가세를 보면 원안이 조정에 들어가더라도 하급관료에 그칠 것이지, 삼공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었다. 확실히 원안의 성취는 그의 능력, 인품으로 얻은 것이다.
원안은 오랫동안 현령같은 하급관료를 지낸다. 원안은 지방의 현령으로도 열심히 일했고, 서서히 그는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권력귀족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으로 주변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나중에 낙양령(洛陽令)이 그의 명성을 듣고는 그를 방문한다. 그리고 "원안곤설(袁安困雪)"이라는 성어를 남기게 된다.
이 낙양령은 비록 지방관리이지만, 낙양은 동한의 도성이었기 때문에 낙양령의 지위는 당연히 낮지가 않다. 그는 최소한 조정에 들어가서 조정업무를 논의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낙양령으로 인하여, 조정의 인물들도 원안에 대하여 듣게 된다. "일처리를 열심히 하고 풍골이 있는" 젊은 관료가 있다.
71년, 조정에 큰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원안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당시는 한명제(漢明帝) 시대였는데, 누군가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모역을 꾸민다고 고발한다. 유영은 한명제의 동생이다. 한명제는 자신의 몇몇 형제들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난 후, 한명제는 이 일을 엄중하게 처리할 생각을 한다.
한명제가 대신에게 묻는다: "초왕의 모역건은 영향이 아주 좋지 않다. 여러분들중 누가 나서서 이 일을 처리해주겠는가?"
대신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맡는 사람은 결국 불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자고이래로 모역사건은 관련자가 많다. 결국 여러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사건이 처리되고나면 조정문문대신들의 분노에 부닥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한명제에 의해 희생양으로 버림받는다. 이를 통해 여러 대신들과 그 배후의 세가대족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시간이 계속 흐르자, 한명제의 인내심은 바닥이 난다. 그는 좋지 않은 얼굴로 여러 대신들을 보면서 말한다: "무슨 뜻이냐. 평소에는 듣기 좋은 말을 하더니, 관건적인 순간이 되니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이냐. 그저 이익만 취하고 손해는 피하겠다는 것이야. 그럼 짐에게 너희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비록 세가대족의 대신들은 이 일을 맡기 싫어했다. 그러나 황제도 이들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 대신이 이렇게 건의한다: "폐하, 원안이라는 자가 현명하다고 명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처리를 하는데 공정하게 하고 사적인 정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 일을 그에게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한명제는 그 말을 듣고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여겨 윤허한다.
그리하여, 동한역사상 가장 코미디같은 일이 벌어진다: 일개 현령이 당당한 왕야를 심리하는 것이다. 현대로 놓고 보더라도 보기 드문 경우일 것이다.
사실은 증명한다. 한명제는 이번에 제대로 사람을 기용했다. 원안은 일처리에서 모든 것을 동한의 법률에 따라 처리한다. 절대로 누구를 봐주지 않았고, 누구를 억울하게 연루시키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한명제에게 많은 사람을 사면시켜줄 것을 청한 것이다. 이들은 비록 유영의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깊이 관련되지는 않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실제 진행되는 일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명제의 목표는 단지 유영과 그의 심복이었다. 나머지 사람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안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원안의 이런 조치는 조정의 많은 문무대신들에게 호감을 산다. 어쨌든 사면받은 사람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글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직접적으로 조정의 대신이기도 했다.
이들은 원안에게 빚을 진 셈이다. 자연히 그에게 보답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한명제에게 원안의 관직을 승진시켜줄 것을 청한다. 이렇게 하여 원안은 별볼일 없는 현령에게 일약 구경(九卿)중 하나인 태복(太僕)이 된다. 마침내 조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재능을 시전할 수 있게 된다.
86년, 사공 제오륜(第五倫)이 나이가 들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원안은 그의 자리를 넘겨받는다. 다음 해에 사도 환우(桓虞)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원안은 사도의 직위도 겸직한다.
이렇게 하여 원안은 삼공의 반열에 올랐을 뿐아니라, 삼공중 두 자리를 차지한다.
다만, 원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나중에 큰 일을 해낸다. 그리하여 원씨집안 "사세삼공"의 기초를 닦는다.
88년, 한장제(漢章帝)가 사망하고, 한화제(漢和帝)가 뒤를 잇는다. 한화제는 나이가 어려서, 두태후(竇太后)가 수렴청정한다. 두씨외척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두씨외척은 모두 발호했다. 조정대신들중 많은 사람은 분노했지만 감히 말하지는 못한다. 이때 원안이 나선다. 그는 공공연히 두태후와 맞섰고, 사사건건 두씨외척과 맞서싸웠다.
그는 여러번 위위(衛尉) 두독(竇篤)과 집금오(執金吾) 두경(竇景)을 탄핵하며, 두 사람이 부하들이 사방에서 약탈하는 것을 방종하고 있으며, 조정의 명령이 없이, 임의로 변방의 군대를 이동시켰다고 말한다.
이때의 원안은 이미 옛날의 무명지배가 아니다. 그는 직접 두 사람에 대하여 모반의도가 있다고 고발한다. 그리하여 문제를 사직을 위험하게 만드는 엄중한 사건으로 끌어올리니, 두태후도 이 일을 가지고 그를 처리하기 곤란했다. 어쨌든 그는 대한의 사직강산을 위하여 나선 것이니 누가 그를 잘못했다고 말하고, 그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두태후는 할 수 없이 두독과 두경을 처벌하게 된다.
두씨외척은 한때 원안과 맞설 것도 생각했다. 그러나 원안에게는 조그만치의 헛점도 없었다. 그를 탄핵하려고 해도 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갈수록 많은 대신들이 원안이 편에 선 것이다. 두태후가 받는 압력이 갈수록 커진다. 두씨외척의 기세도 상당히 줄어든다. 그의 일족들은 일처리에서 예전만큼 발호하지 않는다.
92년, 원안은 돌연 집에서 급사한다.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대신들은 원안의 죽음이 두씨외척으로 인한 것이라 여겼다. 일시에 쌍방의 관계는 긴장된다. 이때 한화제는 이미 성장했고, 그는 쌍방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일거에 두씨외척을 제거한다. 그리고 친정할 수 있었다.
이때의 원씨집안은 이리 지방호족이 아니었다. 당시의 명문망족이 되어 있었따. 단지 원씨집안은 기반이 얕을 뿥이었다. 그리하여 세가대족들과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원씨집안이 진정한 세가대족이 된 것은 이후의 몇대 후손들이 노력한 덕분이다.
원창(袁敞): 원씨집안 제2대의 삼공
한화제가 등극한 후, 그는 원안이 조정을 위해 한 일들에 감사해 하면서, 원안의 아들들을 중용한다.
여러 아들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사람은 원창이다.
원창은 부친의 영향을 깊이 받아 일처리에서 모든 것을 공정하게 했다. 그는 일처리가 공정하여 한화제가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고, 그는 태복(太僕)으로 승진하여 구경에 오른다.
다만, 그의 직위는 기본적으로 여기가 끝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삼공의 지위는 숭고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창은 비록 뛰어났지만, 삼공의 자리에 앉는데는 부족했다.
사실상, 원창이 나중에 삼공이 되는 것은 의외의 사건때문이다.
한화제가 죽은 후, 부친에게 발생한 일이 다시 한번 아들에게 발생한다. 한상제(漢殤帝)는 나이가 어려서 등태후(鄧太后)가 조정을 장악하고, 등씨외척이 굴기한다.
아마도 두태후의 전철이 있어서인지, 등태후는 관리들을 새로 기용하여 자신의 조정에서의 지지자로 삼는다. 원안은 명성이 높았으므로 등태후가 그를 사공으로 발탁한다.
등태후가 보기에, 원창을 사공에 앉히면, 대신들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원창은 자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므로 원창이 자신의 편이 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에게 걸림돌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아쉽게도 등태후는 잘못 계산했다. 원창은 부친 원안의 영향을 받아, 외척간정에 대하여는 심악통절(深惡痛絶)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공이 된 후, 사사건건 등씨외척과 맞선다. 그리고 등씨외척에 불만을 가진 대신들은 그의 주변에 모여든다.
등태후는 자신이 돌맹이로 지기 발을 찍은 격이었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나중에 등태후는 온갖 방법을 써서 원창이 자결하도록 압박한다. 원창이 자결한 원인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일이 원창의 아들이 궁중의 기밀을 누설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진상이 어떠한징 대하여 등태후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비록 원창은 죽었지만, 그가 외척과 불공대천으로 싸운 점은 원씨집안의 지위를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리게 되고, 사림영수의 지위를 갖게 된다.
원탕(袁湯): 원씨 제3대 삼공
원씨집안의 제3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원탕이다.
원탕은 원안의 차남 원경(袁京)의 아들이다. 몇째아들인지는 알지 못한다. 사서에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원씨집안의 이전 2대와 달리, 원탕은 무슨 큰 일을 해내지는않았다. 다만 그의 최대장점은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은 원탕의 자격이 아주 높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것은 하나의 장점 혹은 하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탕은 86세까지 살았다. 당시 평균수명은 50세 정도였다. 현대로 놓고 보더라도 원탕으 장수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오래 살다보니, 원탕의 경력은 풍부했다. 사실상, 그가 어렸을 때, 조부 원안이 초왕 유영의 모역안을 처리하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원안, 원창이 어떻게 외척과 대항하는지도 보았다.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은 말할 것도 없다.
현대의 말로 하자면, 원탕은 조정의 "백과전서"였다. 황제, 조성신하들이 무슨 문제가 생겨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처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원탕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다.
경력상의 차이는 책을 몇권 더 읽는다고 좁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원탕은 조정내에서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닌다.
이런 인물에 대하여 황제는 물론이고 권력을 장악한 외척도 감히 가볍게 대할 수 없다. 그리하여 원탕은 삼공을 다 해보았을 뿐아니라, 안국정후(安國亭侯)에 봉해진다.
관우가 자신이 받은 한수정후(漢壽亭侯)를 매일 자랑하고 다녔으니, 이를 보면 원탕의 안국정후는 그 가치가 삼공보다 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봉(袁逢), 원외(袁隗): 원씨집안 제4대에 두 명의 삼공이 나오다.
이때는 원씨집안의 뿌리가 이미 깊이 박혀 있다. 세가대족일뿐아니라, 조정, 사림에서 많은 제자, 친구를 가지고 있어, 영향력이 매우 컸다. 황제마저도 어느 정도 꺼릴 정도에 이른다.
원씨집안에는 이 대에 이르러 두 명의 삼공을 배출한다. 한명은 원봉이고 다른 한명은 원외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성취를 이룬 것은 그들의 뛰어나서가 아니라 두 사람의 덕분이다.
그 두 사람은 바로 한명이 한영제(漢靈帝)이고 다른 한명이 원사(袁赦)이다.
한 가족에서 두 명이 삼공에 들었다는 것은 기실 황제의 금기사항을 범한 것이다. 이는 이 가족의 조정에 대한 영량력이 지나치게 커지게 만들어, 황권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한영제는 특이한 황제이다.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당당한 일국의 군주로 스스로 관직을 매매했다.
원사는 이름만 들어도 원씨집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원사는 여남원씨이지만 방계에서 태어났다.
원사는 젊었을 때 죄를 저질러 궁형을 받는다. 그리하여 궁에 들어가 환관이 된다. 원사는 재능이 있었다. 궁안에서 아주 잘나갔고, 결국 중상시(中常侍)가 된다. 즉 십상시(十常侍)의 한명이다.
비록 원씨집안은 환관과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원사로 인하여 쌍방의 관계는 많이 완화된다. 원봉과 원외가 동시에 삼공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원사의 공로이다.
한영제의 심복으로서, 그는 원씨집안을 위해 좋은 말을 많이 했고, 그리하여 한영제는 원봉과 원외를 발탁하게 된다.
원봉과 원외가 삼공의 자리에 앉은 후, 다시 원사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 그리하여 원사는 여러 환관들의 위에 서는 존재가 된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고 보완하는 관계였다.
이때의 원씨집안은 이미 황족과 외척에 바로 다음가는 대세력이 된다. 그들의 제자는 전국에 깔려 있다.
당초 하진(何進)이 외부병마를 데려와서 십상시를 상대하자고 했을 때, 왜 동탁(董卓), 정원(丁原)등을 불렀을까? 왜냐하면 그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원소이고, 동탁, 정원은 바로 원씨집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원소는 당시에 도모하는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는 동탁을 너무 얕게 보았다. 그는 실력은 부족하면서 야심은 적지 않고, 결국은 원씨집안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 쌍방은 반목할 뿐아니라, 원외, 원기(袁基)등은 낙양성내의 가족들이 모두 동탁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당연히 그것만으로 원씨집안의 기반을 흔들 수는 없었다. 원소, 원술 형제는 가족의 실력과 영향력을 등에 업고, 신속히 제후들 사이에서 굴기하여, 한 지방의 패자가 된다. 이것은 모두 원씨집안 '삼세사공'의 기반때문이다.
아쉽게도 두 형제는 좋은 카드를 가지고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은 조조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 두 사람의 시신을 짓밟고 올라서서 조위는 점점 강대해질 수 있었고, 삼국에서 가장 실력이 강한 나라가 되며 나중에는 아예 한으로부터 황위를 찬탈한다.
이런 말이 있다: "자손은 자손의 복이 있다." 원안부터 시작하여 원씨집안이 몇대에 걸쳐 이룩한 노력이 결국 자손들이 모두 말아먹는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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