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를 보고 걸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 키 낮은 식물들이고,
화려한 재배종 꽃에 익숙한 눈에 들어 오지 않는 것이 산과 들에 자생하는 야생화이리라.
발 아래를 내려다 보며 걷는 여유와 세심하게 꾸며진 인공 정원의 화려함에 무덤덤해지고 나서야,
산과 들에 피고 지는 야생 그대로 꽃의 신선함을 알게 되는 것이,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게 되는 인생살이의 오묘함이랄까?
크고 화려한 것이야 보려 하지 않아도 눈길을 사로 잡으니 보이는 것이고,
작고 소박한 것은 유심히 보려 해야 보이는 것이니, 이런 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얼레지도 백합과라니 들에 핀 백합화란 이러한 들꽃을 가르킨 것이리라.
그러나, 최근 천리포 수목원에 옮겨 심은 멸종 위기의 두 송이 동강 할미꽃을 파가 버린 사람이나,
이 곳에 핀 몇 송이 안 되는 얼레지를 누군가 독점하려 따가 버린 혐의가 짙은 경우도 있다 하고,
어떤 사진작가의 경우에는 자동차 워셔액을 뿌려 이슬 맺힌 야생화를 연출한다고 하니,
무소유라는 책을 소유코자 하는 욕망과 같은 빗나간 열정은 복을 화로 변하게 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 가는 4월의 길은 얼레지 군락과의 동행이랄 정도로 흔하게.
야생의 얼레지를 보며 걷는 길이었다.
영어로 dog's tooth violet 이라고 하며, 꽃말은 질투라 한다.
표현이 육식동물적으로 날카롭고 경쟁적이다.
어떤 네티즌은 김연아 양 같다고도 하는데, 초식동물에 가까웠던 우리 정서에는 그렇게 보일 것 같다.
감성이 예리한 모씨가 보라빛이 어울린다는 유명인사를 떠 올리는 것도 자연스럽고,
산속에 숨어서 피니, 누군가 호젓한 산길에서 만났던 맨 얼굴의 산 아가씨나,
어느 산사에서 흘깃 지나친 담백한 수행 비구니를 연상한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번 조계산 여행에서 얻은 것의 하나로는, understand로 짐작했던 것이 realize였다는 것이다.
매사 머리로 안 것에 그치지 말고, 가슴 깊이 느껴야 한다는 뜻이리라.
When people realize it, they enter Nirvana.
산 중의 보리밥과 구수한 시레기국은 소박한 맛이, 시내 명궁관의 삼합과 굴비는 곰삭은 맛이,
모두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 것이라 우열을 논할 수 없음이다.
언젠가 송광사 초입의 벚꽃 그늘에서 삼색 속 김밥에 따끈한 보리차를 마시는 상상을 해 본다.
836 미터의 북한산 보다 더 높은 884 미터의 조계산을,
근거도 없는 선입견에 청계산 정도로 만만히 보고, 열차에서 선잠을 자며 무박으로 덤빈 만용 덕분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3 시간이 걸린다는 산길 6.5 킬로미터를 5 시간 넘게 터벅거리며 넘었으니,
트랙킹도 쉽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재확인 하였다.
그나마 무사히 넘어 온 것은 다들 나름대로 절주를 실행한 덕분이리라.
송광사 불일암에 들렀다 저녁 어스름에 내려와,
봄밤에 천천히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고 하룻밤 쉬었다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첫댓글 간단한 여행기에 조계산행의 모든 것을 담으셨군요. 뒤풀이는 잘 하셨는지요? 참으로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습니다. 사진 몇 장을 올려 그날의 기억을 새롭게 해 보겠습니다.
뒤풀이 없이 헤어진 첫 여행이었던 것 같네요. 총경리를 빼고 하는 것도 사나이 의리가 아니겠으나, 사실은 무박의 강행군에 빨리 누울 궁리뿐이었소이다.
산길의 야생화를 보며 Nirvana를 느꼈으니 그것이 행복이겠지요!
작년 가을 소개한 선암사 삼법인 연못의 영문 안내문을 확인한 결과, understand가 아니라 realize였다는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집어 넣었으니, 그런 행복한 해석도 가능하겠네요.